기신과 신기의 같은 생각
신기는 어른이 될 수도 있다는 흐뭇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눈을 뜨고 보니 완전히 다른 방에 자리하고 있었고 몸에 이상한 옷을 입고 있다.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니 길거리에는 엔진마차가 빼곡하게 몰려 있었다. 평양 전체의 엔진마차를 다 합쳐도 거리의 엔진마차들만큼은 안 될 것이다. 자신의 시야가 매우 높다는 생각이 들어 대충 짐작해보니 지금 있는 방의 높이가 50미터는 됨직했다. 이처럼 높은 건물을 신기는 상상해본 적이 없다.
괴수의 대부분이 건물을 파괴하기 좋아하기에 힘들게 고층건물을 짓지 않는다. 어차피 남아도는 게 땅이니 쉽게 쉽게 단층집을 지으면 된다. 건물 파괴에 대해 괴수들은 자연상태의 모습을 좋아하는 듯하다는 연구결과가 있지만 얼음도 깨는 것을 보면 그저 혈기가 왕성하고 세상에 불만이 많은 열혈 괴수들일 수도 있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대한제국에서는 군에서만 사용하는 무선 연락단말이다. 푸른색과 붉은색 중에서 고민하다가 푸른색을 선택했다. 마법사의 직관이 통했는지 단말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신아, 빨리 1층 커피숍에 내려와. 금창도 방금 도착했어."
신기는 곧바로 옷을 점검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갈 때 방 카드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무런 정보도 없지만 신기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예전에 기신의 스텟을 찍을 때처럼 본능적으로 정확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서 능숙하게 1층 버튼을 누른 신기는 커피숍에 들어가서 영호와 반갑게 인사를 한 뒤 금창과도 정중한 악수를 나눴다. 신기의 행동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어제저녁 함께 술을 마셨던 영호도 전혀 알맹이가 바뀐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금창이라고 합니다. 회사 본부가 영국에 있죠. 사실 제가 찾아갔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지금 중국 이적시장이 열렸습니다. 일곱 개의 대구단들이 전부 제 고객이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 결례를 무릅쓰고 이쪽으로 모셨습니다."
금창의 능숙한 영어에 기신도 영어로 대답했다. 고위 귀족으로서의 소양과 같은 것이다.
"어차피 친구도 볼 겸 지나가는 길에 들르는 건데 수고라 할 것도 없습니다.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죠."
"노팅엄 사투리를 사용하시는군요. 언어에 천부적인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어도 금방 배워내리라 믿습니다."
블루 드래곤의 심장이 있는 노팅엄은 대영제국의 수도이다. 즉 노팅엄 말투가 대영제국 표준어라는 뜻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들이 노팅엄 말투를 배우느라 엄청 노력하는데 여기서는 사투리 취급을 받고 있다.
"조건은 이렇습니다. 연봉은 세금 후로 천만 유로이고 한 달에 한 번씩 지급됩니다. 승리수당에서 감독의 비율은 15%입니다. 우승을 하면 최소 백만 유로의 우승상금이 따로 나갈 겁니다. 물론 세금 후 금액입니다. 중국에서는 계약을 세금 후로 하며 세금은 전부 구단에서 처리해 줍니다."
신기는 기신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기신처럼 대상단의 직원으로 일하던 평민이 귀족 출신의 신기도 평생 만져보지 못할 재화을 얻을 기회가 눈앞에 펼쳐지면 그 유혹에 항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천년 거송처럼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자신처럼 고귀한 혈통을 타고 나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만 가능한 것이다.
'설마 기신 이 자식이 내 몸 안에 들어가서 엘리사와 좋은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니겠지? 이 자식은 성인이 된지 오래니까 스킬도 엄청 뛰어날 거야. 그런데 사용하는 건 내 육체지만 나는 아니니까 성인이 된 건가 아니면 계속 총각인 건가?'
신기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금창도 속으로 주판을 두들겼다. 기신이 거절하면 곧바로 3천만 유로를 부를 생각이다. 이번 일은 돈만 걸린 일이 아니다. 만약 기신이 대표팀 감독이 되어 중국을 다음 월드컵에 진출 시키면 금창은 돈을 제외하고도 명예와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권력과 명예는 따라오지 않았다. 명예는 언론을 통해 만들면 되는 것이기에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한다. 그 길을 평탄하게 닦아줄 가장 적임자가 기신이다.
"천만 유로면 천오백만 유로, 3천만 유로면 5백만 유로라. 만약 내가 삼천오백만 유로를 원하면 어떻게 됩니까?"
신기의 말에 금창은 등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신기는 분기점의 도움말을 통해 알아낸 것이지만 금창은 절대 새 나가면 안 되는 비밀을 기신이 알고 있자 많이 당황했다.
"금창 씨가 2백만 유로를 손해 보는군요. 그러면 안 되죠."
금창은 신기에게 완전히 눌렸다. 자신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고 구단의 운영진들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 어디에 가서 떠벌리지 않았을 것이다. 기신이 이 정보를 안다는 것은 지금까지 기신에 대한 모든 평가를 상향해야 함을 뜻한다. 생각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거물이거나 뒷배경이 있을 수도 있다.
'설마 아스널과 맨시티마저 움직인 것인가? 벵거와 만수르가 버티고 있는 두 구단을 무슨 수로 움직였지? 큰 도박회사들 베팅을 보면 노츠 카운티에 거금이 걸린 일은 없었는데. 설마 지하 도박장이 배후인가?'
축구는 종종 검은 돈을 유통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실력 차이가 현저한 두 팀이 붙을 때 약한 팀의 배당이 가끔 10배 이상씩 되는 경우도 있다. 돈을 받아야 하는 자들은 거기에 일정 금액을 베팅한다. 돈을 줘야 하는 쪽에서는 반대로 걸고 도박장이 승부조작을 한다. 강팀에 건 자는 거금을 날리고 약팀에 건 자는 도박장을 통해 거금을 받는다.
서로 만나지 않고 도박장을 통해서 돈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경우 아예 추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법자금의 유통에 애용된다. 도박장은 수수료도 받고 승부조작을 통해 수익도 내고 일거양득이기에 모두가 만족한다.
'그런 지저분한 자들과 관련된 사람이면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낫다. 괜히 나한테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
"제 지금 목표는 유럽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고 난 다음에 다른 것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창은 겉으로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참으로 안타깝군요. 구단에 기신 씨를 추천한 건 저거든요. 클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후 중국을 월드컵에 올리면 한국 대통령도 기신 씨 앞에서 큰소리치지 못할 겁니다. 뜻이 굳건하여 보이니 안타까운 대로 기신 씨가 웅지를 다 펼친 뒤에 다시 기회가 노려야 하겠군요."
금창은 일상적인 대화를 조금 더 나누다가 자리를 떠났다. 영호는 갑자기 바뀐 기신의 마음에 속상한 어투로 말했다.
"지금 우리 회사가 연 매출이 천억 정도야. 세금을 절반만 내기 때문에 이윤이 3백억 조금 넘어. 너는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벌 기회를 발로 차버린 거야. 여기서 몇 년 돈을 벌다가 다시 유럽에 가서 꿈을 이뤄도 되잖아."
"친구,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네. 무언가를 해야 할 시기는 분명 정해져 있는 거야."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하면 신기 자신에게 특전이 생긴다. 그러니 어떻게든 팀을 우승시켜야 한다.
"나 내일 멕시코로 갈 생각이야. 티케팅 좀 도와줘."
멕시코에 영입 대상이 있다. 32살이 된 멕시코 센터백인데 재계약에 실패해서 현재 자유계약 신분이다. 능력에 비해 요구하는 돈이 많아서 아직까지 계약이 되지 않았다. 원래는 남은 DPP로 영입하려 했는데 기신의 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접 찾아가야 한다.
신기는 지금의 이 세상이 더 마음에 들고 축구 감독이라는 신분도 몹시 마음에 든다. 그리고 자신과 몸이 바뀐 기신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민이 고위 귀족이 되었으니 말이다. 대영제국이나 다른 나라들이면 몰라도 대한제국에서 평민이 고위 귀족이 되는 일은 황제의 목숨을 구하는 방법 외에는 없을 것이다. 마법병기 연아의 제작자 연아도 겨우 명예 자작이고 전 세계에 손꼽히는 김은결 역시 백작보다도 못한 명예 후작이다.
최영호와 저녁을 먹고 방에 돌아간 신기는 곧바로 잠에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육체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가 심하기 때문이다. 공항까지는 영호가 데려다주겠다고 했으니 비행기를 제대로 타기만 하면 된다.
큰 우여곡절이 없이 순조롭게 비행기에 탑승한 신기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게임기를 꺼내들었다. 귀족의 품위 때문에 항상 숨어서 게임을 해야 했던 신기에게 있어 사람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게임을 하는 것은 환한 대낮에 발가벗고 달아 다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게임기를 머리에 쓰는 신기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 나는야 분주한 분계선 ###
기신은 책을 통해 아주 기본적인 지식들을 얻을 수 있었다. 모든 사태의 발단은 임진괴란이었다. 임진년 일본의 후지산이 폭발하며 수많은 괴수들이 뛰쳐나왔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을 보이는 족족 살해하고 건물들을 파괴하던 괴수들은 바다를 건너 조선 반도와 명나라를 침공했다.
남아서 괴수들과 싸우는 자들도 있고 무작정 북으로 도망가는 자들도 있었다. 왕 역시 군대의 보호하에 도망을 쳤지만 말을 탈 줄 모르는 왕 때문에 느려진 행렬은 결국 괴수에게 따라 잡혔고 왕가가 몰살 당했다. 상황은 명나라 역시 다르지 않아 명 황실 역시 혈통이 끊겼다.
도망만 다니던 사람들은 추운 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새롭게 사회를 이루었고 결국 국가 규모로 커졌다. 그때 대한제국이라 이름을 지었고 예전에 비해 강해진 검사들의 노력으로 남쪽으로 차츰 영역을 넓혀갔다.
하지만 괴수들의 패턴이 갑자기 변하면서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다시 북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다 북극해를 통해 대영제국과 외교관계를 확립하게 되었고 지식과 경험의 교류로 점점 더 쉽게 괴수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백 년 간 내전에 휩싸였던 러시아가 안정되고 나서 세 국가는 힘을 합쳐서 영토의 회복을 도모했다. 대영제국은 짐 덩어리인 캐나다를 강제로 독립시킨 후 국력이 강성해 지면서 서유럽의 영토를 차츰 회복해갔다.
밀고 밀리면서 인류는 괴수에 대한 정보를 차곡차곡 쌓아갔지만 괴수들은 여전히 본능대로 움직였다. 인간들은 마법의 5단계 이론을 통해 마법을 신비의 영역에서 끌어내렸고 괴수들을 7단계로 나눠서 더욱 경제적으로 괴수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마법병기와 이동진의 발명 그리고 마석에서 마력을 뽑아내는 마법진의 고도화 덕분에 인류는 강한 화력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거기에 대한제국은 마붕탄이라는 전략 병기를 만들어내서 호주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였다.
러시아와 대영제국이 합심하여 대한제국을 견제했고 대한제국은 어쩔 수 없이 호주의 영원한 자유화를 인정하는 조약에 사인을 했다. 중동은 여러 부족들이 석유를 팔아서 식량과 무기를 사서 연명하고 있었다. 복속시키는 것보다 무역을 통해 석유를 확보하는 것이 더 싸게 먹히기 때문에 누구도 그 땅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석유를 가공하면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시약의 제작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재료가 나온다. 마법의 실패 확률을 낮추고 본인의 능력보다 한 단계 높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물론 전부 전략물자로 민간인들은 구경하기 힘들 것이다.
기초 마법책을 덮은 기신은 마법을 사용해 보았다. 책에 적힌 대로 했지만 1단계 마법은 발현되지 않았다. 몸은 신기의 몸이지만 정신은 기신의 정신이라서 마법이 발현되지 않는 것 같다. 주먹을 꽉 쥔 기신은 속으로 다짐을 했다.
'어떻게든 돌아가야 해. 원래 세상이 훨씬 나아.'
- 작가의말
둘 다 기신의 세상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일치한 거죠. 원래 이 부분은 40화 이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감히 앞당겼습니다. 세이브/로드로 기신이 경기를 승리하는 패턴을 반복적으로 쓰려니 소재 고갈이 오더군요.
그리고 도박장 돈세탁은 제 상상입니다. 실제로 어떻게 하는지 정확한 수법은 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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