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사의 주술
프로그램의 촬영이 끝난 후 대부분 제작진은 돌아갔다. 하지만 일부는 남아서 노츠 카운티의 남은 일정을 찍고 축제까지 촬영한 후 돌아갈 작정이다. 그래서 PD 한 명과 작가 두 명, 김순애 아나운서와 VJ 몇 명이 남았다.
마지막 경기는 안타깝게도 원정이었다. 1:1의 점수로 비겨서 결국 1위를 하지 못했다. 1위 팀이 마지막 3경기에 4점의 승점밖에 따내지 못했는데 노츠 카운티가 마지막 경기에서 무승부를 내면서 결국 2위가 되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기신은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대답했다.
"해마다 우승컵을 최소 하나씩 들었는데 올해는 그렇지 못해서 매우 아쉽습니다. 내년에는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한번 노려볼 생각입니다."
기자들도 웃었고 기신도 웃었다. 말을 한 기신도 진심은 아니었고 듣는 사람 중에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기신의 여유에 모두 감탄했을 뿐이다. 평소에는 겸손한 사람인데 인터뷰를 할 때만 인격이 오만하게 바뀐다.
구단 버스가 출발하자 수백 대의 차들이 뒤를 따랐다. 아스널과의 경기 때에는 천 대가 넘었는데 오늘은 표를 구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대다수 사람은 축제를 준비하느라 원정에 따라오지 않았다. VJ들은 구단 버스와 팬들의 차량에 탑승하여 이 장관을 카메라에 담았다.
구단 버스가 축제현장에 도착하자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소리가 큰 폭죽이 아니라 아름다운 불꽃을 피우는 폭죽이었다. 노츠 카운티와 계약하던 날 본 적이 있는 흑인 경찰이 기신에게 손가락 두 개로 경례를 날렸다. 기신 역시 한국식 군례로 응답했다.
로만이 구단을 대표하여 연설했다. 중간에 두 번이나 우느라고 연설이 끊어진 것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명연설이다. 노츠 카운티는 프리미어리그 팀이라는 말이 연설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문제는 그것이 팬들이 가장 원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시장의 연설은 짧았다. 노팅엄 포레스트의 팬이기 때문이다. 시장의 차분한 연설이 끝나자 헌터가 선수들을 대표해 팬들에게 인사했다. 딕슨은 이미 눈물바다가 되어서 자기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했다.
"내년 프리미어리그 골든슈즈를 노츠 카운티에 가져오겠습니다."
손뼉을 치는 팬도, 환호하는 팬도, 야유를 퍼붓는 팬도 있었다.
"제가 가져온다고는 안 했습니다. 엑토르가 해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원래는 딕슨이 하기로 되어 있었던 연설인데 헌터에게 넘어갔다. 그래서 헌터는 아무 말이나 막 해댔다. 무슨 말을 해도 호응이 좋고 반응이 격렬하니 연설할 맛이 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신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기신의 연설이 끝나면 그야말로 미친 축제가 될 것이다. 기신은 가슴에서 기분 좋은 울렁거림을 느꼈다. 드물게 기신은 양복이 아닌 노츠 카운티의 로고가 박힌 체육복을 입었다.
"주술사의 이름으로 약속드립니다. 위대한 노츠 카운티는, 더욱 위대해질 것입니다. 이 주술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유효할 것입니다."
두 팔을 한껏 펼친 기신의 포스는 유로파리그 결승전을 초월했다. 진심이 담긴 강렬한 의지와 축제 현장에 자리한 수십만 시민들의 염원이 심장 속의 마나를 움직였다. 치유에만 움직이던 용의 마나가 자리한 모두에게 작은 축복을 내려주었다.
하나하나는 별것이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의 염원이 하나로 뭉칠 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노츠 카운티는 자리한 모두의 신앙이다. 용의 마나를 이용할 수단이 기신이 특성으로 받은 치유술밖에 없었다. 하지만 순수한 신앙의 힘이 용의 마나를 움직였다.
기신의 짧은 연설을 끝으로 광란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광장의 분수는 물 대신 맥주가 흘러나왔다. 이 분수를 설치하기 위해 큰 공사를 벌였다고 한다. 광장 한편에는 가수들의 공연도 있었다. 공연은 축제에 알맞은 랩과 록의 향연이었다. 몇몇 용감한 젊은 선수들이 팬들의 축제 현장으로 돌진했다가 힘들게 도망쳐 나왔다.
노팅엄시의 곳곳에 있는 모든 대형화면에서 한국 방송국과 노팅엄 현지 방송국이 공동으로 제작한 노츠 카운티의 다큐멘터리를 반복적으로 방송했다. 다큐멘터리의 시작은 누군가 핸드폰으로 찍은 짤막한 영상이었다. 기신이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노츠 카운티에 면접하러 온 장면이었다.
터너와 헌터 그리고 그레이가 트라이 아웃에 참가한 영상도 있었다. 화질이나 각도로 보면 팬들이 찍은 것이 분명했다. 트라이 아웃에서 그다지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 그레이와 헌터였다. 둘이 패스도 제대로 못 하는 모습이 화면으로 방출되었다.
그리고 점수들이 빠르게 지나가며 노츠 카운티는 모든 경기에서 이겨나갔다. 원정에서 터너의 선방으로 맨시티를 페널티킥으로 도태시키고 결승에 진출하는 장면에 이어 아스널을 꺾고 리그 컵 우승을 하는 장면이 짧지만 강렬하게 편집되었다.
FA컵 결승에서 입을 꾹 다물고 긴장한 표정을 한 기신의 모습도 비쳤다. 캡틴인 칼 딕슨의 우스꽝스러운 동점 골도 보여주었다. 터너가 토미에게서 오래된 스카프를 받고 펼치는 장면은 조금 길게 나왔다.
터너가 페널티킥을 막아내고 우승컵을 노츠 카운티의 손에 들려주었다. 눈물을 흘리는 터너의 얼굴이 확대되고 자막이 붙었다.
- MORE THAN A HERO -
곧 시즌이 바뀌어서 유로파리그 첫 원정에서 편파적인 판정을 받았다. 팬들의 울분에 찬 인터뷰들이 지나갔고 선수들의 낙심한 표정도 스쳤다. 하지만 홈에서의 시원한 복수, 많이 이긴 상황에서도 계속 공격을 요구하는 기신의 손짓이 다큐멘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조별전에서 진출한 후 운 좋게 첫 상대를 쉽게 이겼지만, 그 뒤로는 힘든 경기의 연속이었다. 힘들게 결승까지 간 후 유로파리그의 제왕을 만났다. 후반전에 노츠 카운티가 실점했을 때 기신의 퍼포먼스가 나왔다. 두 팔을 힘껏 벌리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선수들을 안심시키는 그 장면이었다.
- MORE THAN A FAITH -
다큐멘터리의 끝은 챔피언스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리스본을 압승하는 모습이었다. 그다음으로 구단의 스텝들과 선수들의 인터뷰가 흘러지나갔다. 토미를 비롯한 유명한 팬들의 인터뷰도 들어갔다. 마지막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자막이 나갔다. 흰색과 검은색 줄무늬를 가진, 유벤투스와 뉴캐슬이 따라 한 노츠 카운티 홈 유니폼의 색이 흰색과 검은색이다.
- PREMIER LEAGUE? U CAN SEE IT RIGHT HERE -
선수와 코치들 그리고 구단의 직원들은 호텔 안에서 축제를 벌였다. 젊은 선수들의 장난에 기신은 온몸에 십수 가지 술을 뒤집어썼다. 지난번에 양복의 세탁비가 엄청 나오고 나서 기신은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오늘은 체육복을 입고 온 것이다.
술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지만, 분위기에 취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와서 축하를 건네고 시도 때도 없이 젊은 선수들이 장난을 치는 바람에 지친 기신은 연회장 한쪽 구석으로 가서 휴식을 취했다. 소란한 분위기에서 빠져 방관자가 되니 연회장의 상황이 일목요연했다.
차범수는 김시웅에게 술을 먹이려는 몇몇 선수들의 장난을 필사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한국 방송국의 카메라가 이들을 따라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신 역시 자신을 따라다니던 VJ에게 양해를 구하고 떨궜다. 휴식이 절실했다.
코치들이 한쪽 구석에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사이좋게 술을 마셨다. 다툴 정도로 사이가 나쁘지는 않아도 서로 데면데면했는데, 그간의 모든 모순이 해결되었는지 서로 밝은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딕슨이 한쪽에서 출전기회가 적은 선수들을 모아놓고 다독이고 있었다. 사실 프리미어리그로 가면 딕슨도 출전이 적어질 수밖에 없다. 몸싸움과 헤딩을 제외하면 2부리그에서도 특출난 편이 아니다. 몇몇 팀과의 대결에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열정이 지나친 로만이 시장의 손을 잡고 침을 튀기며 연설을 하고 있었다. 노츠 카운티의 구장인 메도 레인은 이미 지난주에 시공에 들어갔다. 사방으로 확장해서 관객석의 숫자를 32000석까지 늘린다고 한다. 원래라면 8개월은 걸리는 공사인데 새로운 건축기법을 사용해 3개월이면 8천 석을 늘린다고 한다. 남은 4천 석은 경기가 없는 날에만 시공해서 11월 초에 완공시킨다.
로만은 더 많은 땅을 확보해서 최종적으로 56000석까지 늘릴 생각이다. 시장의 건축허가가 필요한 일이라 로만은 시장을 설득하고 있다. 노팅엄에서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열린다면 얼마나 큰 경제효과가 있을지를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는 제작진이었다. 김순애는 화장을 특별히 진하게 했다. 그 모습이 전장을 향하는 장수가 갑옷을 깨끗하게 닦아놓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술이 어느 정도 된 사람들은 인터뷰에 쉽게 응하지 않았다.
기신은 갑자기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을 담당하던 VJ가 제작진에게 뭐라 말하면서 자신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제작진이 곧바로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기신은 살에 찰싹 달라붙은 옷을 몸에서 뗐다. 옷을 떼는 과정에 소름 끼치게 싫은 감각이 전해져왔다.
"기 감독님, 너무 인기인이셔서 이제야 인터뷰 기회를 잡네요."
"네, 남자들한테 줄곧 잡혀있었죠."
기신의 말에 촬영 카메라가 흔들렸다. 기신의 꼴도 꼴이어서 평소라면 웃기지 않았을 농이 제대로 먹혔다.
"묻고 싶은 말은 매우 많습니다만, 시청자와 팬분들이 가장 궁금한 질문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우리 선수들이 주전으로 출전할 수 있을까요?"
"차범수 선수는 언젠가 세계적인 선수가 될 것입니다. 훈련하는 장면을 직접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훈련 내내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훈련 시간이 길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집중력을 가지고 훈련해야 하거든요. 육체적인 부분이 나이를 먹어가며 더 강해지면 많은 팀이 군침을 흘리는 선수가 될 것입니다."
"김시웅 선수는 가장 부족한 것이 경험입니다. 차범수 선수의 수비는 타고났죠. 하지만 김시웅 선수는 많은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훈련을 통해서 경험의 부족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기에 주전 경쟁에 유리할 것입니다. 수비만 따지면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먹힙니다. 다만 팀을 위해 더 많은 롤을 소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스무 살 전에 팀의 주전을 차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신의 인터뷰를 끝으로 촬영을 마쳤다. 기신은 제작진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음식을 추천했다. 한국인들의 입맛에도 맞을만한 음식들이었다. 제작진들이 하나둘 떠나고 기신과 김순애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김순애도 기신도 눈치채지 못하고 음식을 먹고 맛을 평가하는데 정신이 팔렸다.
그리고 제작진은 몰래 카메라를 다시 켜고 멀리서 촬영했다. 잘 차려입고 화장을 한 여신과 푹 젖은 추레한 체육복을 입은 꼴뚜기가 카메라에 담겼다. 서로 음흉한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보니 기사 제목까지 머리에 떠오른 모양이다.
인터넷 댓글 품평가 최영호라면 베스트 댓글을 예언할 수 있을 것이다.
- 남자가 낳냐 여자가 낳냐.
- 작가의말
글이 잘 풀립니다. 그래도 내일을 위해 오늘은 3편만 올리겠습니다. 조금 쉬다가 한 편 더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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