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퀘스트는 헬 난이도?
"최종 퀘스트 정보 좀 알려줘."
신기의 얼굴은 다소 피곤해 보였다. 육체적으로 피곤할 리는 없으니 당연히 정신적인 피곤일 것이다.
"남극의 등급외 괴수를 처단하고 모든 용과 정령의 힘을 소멸하라."
최종 퀘스트에 대한 정보는 달랑 한마디이다. 그리고 실패한 후속 퀘스트에 대한 정보는 가득 있었다.
"원래 오룡신기 퀘스트가 끝나면 후지산의 구미호를 소멸하고 후지산을 봉인하는 퀘스트가 있었어. 그런데 연합군이 퀘스트를 망쳐버렸어."
마지막 순간 구미호는 꼬리 아홉 개를 전부 버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후지산은 신기의 얼음 마법으로 봉인해야 한다. 술법사들이 결계를 치고 봉마술(封魔術)로 봉인하는 것이 아니다. 괴수가 전체적으로 인간에게 적대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신(神)이나 마(魔)가 아닌 변이된 정령이다.
"구미호를 죽이고 후지산을 봉인했다면 인간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남극의 등급외 괴수를 상대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도망친 구미호가 술법으로 남극에 이동했기에 등급외 괴수의 행동이 더 빨라졌어."
원래 후지산의 괴수들이 널리 퍼진 후, 구미호가 탐보라산, 세인트헬렌스산, 루이즈 화산, 니라공고산, 베수비오산 등 화산을 활성화해야 한다. 하지만 구미호가 후지산 근처에 묶이면서 다른 화산을 활성화하지 못했다.
덕분에 인류는 괴수를 연구하고 적응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우연과 필연으로 괴수를 완전히 물리칠 희망이 생겼다. 물론 그 희망은 신기다. 하지만 여러 세력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탐욕이 맞물리고 엇갈리며 다시 오기 힘들 기회를 놓쳐버렸다.
"호주에는 륙이라는 6등급 괴수가 있어."
륙은 북방의 곰들이 동면하는 것처럼 반년씩 수면(水眠)을 한다. 전체적으로 소를 닮았는데 꼬리가 뱀과 흡사하고 박쥐와 비슷한 피막의 날개가 있다. 무리를 지어 물 혹은 물가에 사는데 반년씩 물속에서 잠을 잔다.
륙의 날개로 비행 신발을 만들면 성공 확률이 무척 높다. 특히 마나만 주입하면 비행 마법을 쓸 수 있는 이 신발은 다른 괴수들과 달리 파괴되지만 않으면 계속 사용할 수 있다. 실전에는 쓸모가 없지만, 귀족들의 사치품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
"내가 얼음 마법으로 물속에 있는 놈들을 전부 얼려버렸지."
교와 활 그리고 비유에 이어 신기는 또 하나의 괴수를 멸종시켰다. 5등급부터 개체로 생활하는 괴수들은 세계 각지에 널리 퍼져있지만, 무리 생활을 하는 괴수는 한 곳에 몰려있다. 생물체처럼 알을 낳고 새끼를 낳으며 번식하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그런데 붉은 수염의 멍청이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하는 것이야. 그러면서 괴수 한 무리만 더 처리해 달라고 떼를 쓰더라."
기신은 신기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었다.
"기신 너도 가끔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해. 우리에게 두 세상의 운명이 걸려있어. 내 직감인데 너는 조연이 아니야."
신기는 사람이 한 번 얕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다. 억지를 부리는 붉은 수염과 그 수하들을 고통 없이 얼려 죽였다. 서리 파도로 순식간에 얼려버려서 아마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말고.
"고인의 시체를 훼손하는 게 도리가 아닌 건 알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섬세하지 못해 팔찌를 시체에서 분리하며 붉은 수염의 팔목을 분질러버렸지."
신기는 자신이 절대 고의가 아님을 기신에게 주장했다.
"지금 호주에서 나는 왕이나 다름없어. 내겐 독도 통하지 않고 원거리에서 저격해도 얼음 방패와 얼음 갑옷이 알아서 다 막아줘. 그리고 심판의 검이 나를 해치려는 자들을 알아서 베어버리지."
신기는 폭군이 되었다.
"문신 다섯 개를 전부 흡수하고 빙룡이 깨어나면 남극으로 향할 거야. 가서 등급외 괴수와 신사적으로 담판을 해야지."
그러고 보니 신기의 문신이 예전보다 매우 흐릿해졌다. 퀘스트를 완성해서 그런 건지 정령 열매의 덕분인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새 능력이 생겼어. 괴수가 멸종되면 나는 알게 돼. 땅 파기 좋아하는 리력이 멸종되었어."
대영제국은 섬 하나에 높은 건축물을 지어 리력을 유인했다. 리력들이 바다 밑으로 땅을 파고 전부 섬에 모이자 봉인 마법으로 결계를 쳤다. 리력들이 섬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결계를 친 후 대한제국으로부터 비싼 값으로 구매한 마붕탄 하나를 섬의 중심에 떨구었다.
"문신이 옅어질수록 내가 점점 신기가 되어가는 것 같아."
신기가 말한 신기는 신기(神器)다. 신기급 병기인 심판의 검처럼 신기 본인이 병기가 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노력이 아닌 누군가의 안배로 강한 힘을 얻으며 신기는 점점 불안감을 느꼈다. 비극적인 결말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걱정 마. 나도 최선을 다할게. 이르면 다음 시즌, 늦어도 기한 안에 꼭 퀘스트를 완성한다."
기신의 격려에 신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 지금 엄청 무서워. 가만히 있어도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자꾸 깨닫게 돼. 하지만 너에게 말할 수 없어."
신기가 너무 거대한 진실 앞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자 기신도 마음이 무거웠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기신은 이번 시즌 있었던 경기를 최대한 자세히 말해주었다. 신기도 선수들의 발전과 노츠 카운티의 선전을 경청하며 우울함을 잠시나마 잊어버렸다.
### 나는야 몽롱한 분계선 ###
아침에 일어난 기신은 꼬물거리는 강아지 신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구나, 나랑 신기를 만나게 하는 전령사가."
기신에게 있어 광고 촬영은 힘들었다. 한복을 입어야 했고 일본 복장, 중국 복장을 비롯해 수많은 옷을 입어야 했다. 크기가 맞지 않는 경우 수선을 해야 했다. 다행히 4명이 단독으로 광고 촬영을 하기에 시간이 지체되거나 하지 않았다.
헌터가 예상외로 부끄러움을 많이 탔고 그레이가 광고 촬영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가끔 상의를 탈의하고 찍어야 하는 사진도 있었지만 그레이는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다. 엑토르는 얌전하게 시키는 대로 자세를 취했다.
"잘 부탁합니다."
벨기에 국적을 가진 모델이 기신에게 말을 걸었다. 까르띠에와 계약한 모델들이 광고 촬영에 참여했다. 헌터와 엑토르는 큰 키로 문제가 없지만 그레이와 기신이 조금 문제가 되었다. 그레이는 182이고 기신은 177이어서 모델들이 힐을 신으면 조금 이상했다.
잠깐의 협상을 거쳐 모델들이 힐에서 내려오기로 했다. 15센티의 힐에서 내려오자 실제로 기신보다 키가 작았다. 보석으로 치장한 대신 살결을 많이 드러낸 모델과 함께 사진을 찍어야 하기에 기신은 두 눈의 관리에 신경을 썼다. 괜히 이상한 짤이 인터넷에 돌아다니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분, 여자 허리를 다정하게 그러안으세요. 몸에서 긴장을 풀고요. 여자분이 식인종이 아닌 걸 제가 보증합니다."
그레이와 엑토르는 자연스러웠지만 기신과 헌터는 너무 뻣뻣했다. 기신은 헌터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도 초짜냐고 묻는 듯한 헌터의 눈빛에 기신은 부정의 대답을 보내주었다. 학교 때 나름대로 인기가 있었다. 졸업하고 나서 연애 한 번 못 해봤지만 말이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려고 하니 기회가 없는 거지. 그저 즐길 생각만 했다면 달랐을 거야.'
기신과 헌터 때문에 광고 촬영이 한 시간 반 연장되었다. 촬영을 마친 후 저녁을 간단히 먹고 각자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몸과 정신은 피로하지만 기신은 잠들 수 없었다. 어제 신기의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걸렸다.
초인종이 울리자 기신은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그레이나 엑토르는 얌전하게 자기 방에 있지만 헌터는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 좋아했다. 어제저녁에도 찾아와서 주술을 가르쳐달라고 조르다 떠났다.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겠죠?"
오후에 함께 촬영한 모델이 와인 한 병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예상외의 인물에 잠깐 경직되었던 기신은 상대를 밖에 세워두는 것이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오늘 저 때문에 촬영이 길어져서 미안합니다."
여자는 자기 방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와인 잔 두 개를 가져다가 물로 헹군 후 종이로 물기를 닦았다.
"와인 좋아하세요?"
"아니요. 시고 떫어서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이해 못 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저도 와인을 잘 몰라서 눈에 띄는 거 하나 들고 왔거든요."
기신은 말을 아꼈다. 와인을 즐기지 않지만 와인을 천천히 마셔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입안이 말라와서 와인을 자꾸 홀짝이게 되었다.
"감독님도 바쁘신 분이고, 저도 바쁜 몸입니다. 키가 좀 작기는 하지만 지금 유럽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모델이거든요."
기신은 키 173인 여성의 입에서 본인이 작은 키라는 말이 나오자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아마 후안이 저 말을 들었으면 손찌검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감독님과 빠르게 친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어요. 혹시 백인 여성을 싫어하는 취향은 아니시죠?"
이미 와인은 절반이 사라졌다. 기신이 꾸역꾸역 물 대신 마셨기 때문이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기신이라 부담 없이 마셨지만, 상대에게는 다르게 비친 모양이다.
"문화의 차이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여성분과 친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의 차이는 인정합니다. 그 차이를 이쪽으로 좁힐 생각은 없으세요? 저도 돈을 잘 벌고 돈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닙니다. 당신에게 흥미를 느꼈을 뿐입니다."
기신이 일어서자 여자도 일어섰다. 기신은 다가가서 여자의 허리를 그러안았다. 광고 촬영 때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곧 부드러운 키스가 시작되었다. 키스는 점점 격렬해졌고 더위를 느낀 둘은 에어컨의 온도를 조절하는 대신 옷을 제거하기로 합의했다.
이튿날 헌터가 여전히 버벅댔지만 기신은 촬영을 순조롭게 끝냈다. 세 팀은 촬영을 끝내고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하듯 헌터를 구경했다.
"기신입니다. 제 명함이고요."
기신이 명함을 건네자 여자는 기신을 빤히 쳐다보다가 명함을 받아서 핸드백에 넣었다.
"버지니아 파비안입니다. 현재 파리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습니다.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죠."
기신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여자의 이름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유럽 문화가 참 마음에 듭니다."
파비안은 기신의 농담에 소리 내 깔깔거렸다. 진한 화장 때문에 몰랐었는데 아침에 확인한 민낯은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절도죄에 대한 죄책감과 조금 이상한 정복감이 뒤섞여 오묘한 기분이 되었다.
"제 전화번호예요. 아주 보고 싶을 때만 연락 주세요."
기신은 파비안에게 이름의 스펠링을 물어서 저장을 완료했다. 헌터의 촬영이 끝난 후 파비안의 안내로 제대로 된 현지 음식을 맛보았다. 그리고 기신과 파비안은 더 뜨거운 밤을 보냈다. 몇 년 동안 건조되기만 했던 마른 장작이 활활 타올랐다.
파비안은 핸드폰을 꺼내서 강아지 사진을 잔뜩 찍어갔다. 혹시 새끼를 분양받을 수 없냐는 질문에 기신은 중성화를 했다고 거짓말했다. 파비안은 당신과 동거를 결심한다면 강아지 때문으로 알라고 농담했다.
"시키, 네가 보고 싶어서라도 영국에 가야겠어."
파비안과는 호텔에서 작별했다. 신기 때문에 마음이 아주 무거웠는데 파비안 덕분에 많이 풀렸다. 비행기가 런던 공항에 착륙할 때 기신은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빠르게 퀘스트를 완성하고 최종 퀘스트를 확인해야 한다. 기신의 최종 퀘스트를 확인하면 신기에게 도움이 분명히 될 것이다.
- 작가의말
이번 에피소드는 제 경험에서 우러러나온 상상입니다. 물론 소설, 영화, 드라마를 통한 간접 경험입니다.
륙은 두음 법칙을 사용해 육이라고 하면, 고기와 같은 느낌이 들어서 륙이라고 적었습니다. 오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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