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 퀘스트를 받다
덩치가 코끼리 정도인 소 수만 마리가 정면에서 달려오면 어떤 기분일지 신기는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답을 알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에 놓였지만 그 기회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 소를 닮은 1등급 괴수 대무와 2등급과 3등급의 흑대풍 수만 마리가 괴수 토벌대를 향해 뿔을 세우고 달려오고 있다.
대무는 폭군이라 불리고 흑대풍은 대무와 똑같이 생겼지만 뿔이 검은색이어서 검은폭군이라고 불린다. 방향을 한번 정하면 막힐 때까지 달리는 무식한 놈들로 신기가 살던 한반도를 잘 찾지 않는 괴수이다. 대신 서안과 낙양 근처에 엄청 많이 서식한다고 한다. 기신은 제주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제주도에 가본 적이 없는 신기는 이번에 첫 대면이다.
수만 마리에 달하는 괴수들의 질주에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달리면서 서로 박자를 맞추는지 땅의 울림이 점점 강해졌다. 신기는 놀라고 당황한 것과는 별도로 머릿속에서 무슨 마법이 가장 효과적일지 끊임없어 고민했다. 마법이해 수치가 6밖에 안 되기 때문에 곧바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괴수들은 가속이 끝났는지 속도가 더 빨라지지 않았다. 그제야 주술사들이 지팡이를 땅에 꽂고 주술을 외우기 시작했다. 괴수들의 속도가 계속 빨라져서 계산이 어려웠던 것이다. 잠시 후 땅에서 넝쿨들이 솟아서 괴수들의 발목을 잡았다. 힘으로 넝쿨을 뿌리치는 괴수들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은 달리는 속도를 주체 못 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괴수들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지만 동료애가 없다는 것은 예전에 연구로 밝혀졌다. 일부 괴수들은 바닥에 넘어져서 걸리적거리는 다른 괴수를 뿔로 받아버렸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 비명이나 울부짖음이 전혀 없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때 전사 한 명이 철로 된 창을 들고 앞으로 돌진했다. 너무 무서워서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다. 괴수의 바위 같은 가슴근육에 철창을 꽂아 넣었지만 곧 수많은 괴수들의 발굽에 짓이겨져 고기 반죽이 되어버렸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속도로 달리고 있지만 이들은 콧김도 없고 거친 숨소리도 없이 조용히 달렸다. 네 발굽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만 아니었으면 암살자라 칭해도 전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주술사들이 계속 주술로 괴수들의 전진을 방해했다. 전진을 못하게 막는 것이 아니라 괴수들을 조금이라도 더 모으려는 목적이다. 속도가 조금씩 주춤해지면서 뒤의 괴수들과 앞의 괴수들의 간격이 점점 좁아졌다.
주술사들의 대표 중 하나가 신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를 받은 신기는 두 팔을 넓게 펼쳤다. 굳이 안 해도 되는데 멋을 부리기 위해서이다.
"얼음의 울타리"
두껍고도 견고한 얼음의 울타리가 괴수들의 발길을 멈춰세웠다. 반원형의 울타리는 대만에서 사용했던 울타리보다 2배는 더 컸지만 소모된 마력은 그때와 비슷하다. 신기가 복수를 다짐하며 마나 수련을 엄청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괴수들의 돌진이 멈추어지자 신기는 한시름을 놓았다. 사실 얼음의 울타리가 괴수들의 돌진을 막아낼 수 있을지 신기도 가늠이 불가능했다. 정찰을 한 넙적 꼬리 부족이 수천 마리의 괴수라고 해서 가볍게 생각하고 왔는데 수만 마리 규모여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원래 계획대로 시행을 했는데 다행히 신기의 마법이 효과를 보았다.
"빙풍폭설"
무영창의 경지이기 때문에 마법의 이름만 외치면 된다. 무슨 영문인지 블리자드라 외치면 안 되고 빙풍폭설이라 외쳐야만 마법이 발동된다. 신기가 마법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졸업까지 마법학에 대해 공부했으면 그 영문을 알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신기는 그 영문을 아예 모르고 있다.
얼음의 울타리나 얼음의 상자와는 다르게 블리자드는 지속적으로 마력을 주입함으로써 마법의 지속시간을 늘릴 수 있다. 신기는 마력을 전부 소진하면 숙련도가 오르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안다. 그래서 마력이 전부 소진될 때까지 빙풍폭설을 유지했다.
신기의 마법이 끝나자 전투 주술사와 전사들이 괴수의 무리를 향해 뛰쳐나갔다. 전투 주술사는 강령술사라고도 하는데 신기가 보기에는 그저 다중인격자가 전투적인 인격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다행히 눈이 돌아가 자기편을 공격하는 경우는 없지만 입가로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은 충분한 혐오감을 준다.
나이가 든 전사들은 코로 각성제를 흡입했다. 각성제의 효력으로 몸에 뜨거운 피가 빠르게 순환하기 시작하자 조금 늦게 전장에 투입되었다. 6등급 괴수 성성이의 꼬리를 가공하여 만든 각성제는 인간 본연의 수십 배의 힘을 내게 하며 아무런 부작용도 없다. 하지만 그 정도로 대단한 각성제는 대한제국이나 대영제국과 같은 나라가 아니면 보유하기 힘들 것이다.
블리자드는 방사형 마법이다. 그래서 괴수 무리의 중심에 위치한 괴수들은 마법의 발원지와 가까운 관계로 대부분 얼어 죽었다. 전사들은 블리자드 때문에 전투력이 하락한 외곽의 괴수들을 손쉽게 처단했다. 3등급의 흑대풍마저 연수가 필요 없이 상급 전사 혼자서 처리했다. 처단한 괴수의 시체는 바로바로 뒤로 던졌고 아이와 늙은이 그리고 건장한 여인들이 마석을 채취했다.
채취한 마석을 신기는 마력석으로 가공했다. 본인의 마력을 넣었다 뺐다 하기 때문에 마니친화력이 10인 신기는 거의 마력의 소모가 없어서 쉬지 않고 마력석을 가공했다. 마석에 비해 효율이 2배에서 5배까지 더 높아지지만 주술사들이 마력석을 가공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 마석으로만 사용했다.
"돌아가면 넙적 꼬리 부족에게 죄를 물어야겠다. 일부러 괴수의 규모를 속인 것 같다."
"동의한다. 녹지를 차지하기 위해 어설픈 꾀를 부렸다."
마력석이 충분해지면 다시 라어들을 잡아서 다른 곳에도 녹지를 조성할 생각이다. 그리고 다시 괴수를 토벌해 마석을 채취하고 라어를 잡은 후 마력석으로 녹지를 만든다. 이렇게 무수히 반복을 하면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 충분한 녹지가 생겨서 결국에는 사막을 정복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국가를 이룰 수 있고 국가를 이루면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용골 산맥의 괴수가 침입을 못하는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에 충분히 천만 명 이상의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 대영제국의 인구가 2천만 명이 안 된다는 점과 아프리카는 전사와 주술사의 비율이 높다는 점을 따져보면 대단한 세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눈앞의 이익마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넙적 꼬리 부족이 바로 그러했다. 대부족이라기엔 규모가 부족한 넙적 꼬리 부족은 녹지가 아무리 많아져도 대부족들이 다 차지하리라는 생각에 수만 마리 규모의 괴수 무리를 수천 마리라고 속여서 토벌 부대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이다.
"넙적 꼬리 부족장 바보 아니다."
"정찰한다. 더 있을 수 있다."
수만 마리의 괴수는 이미 전부 죽었다. 증발하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마석을 채취해야 한다. 다행히 주술사들은 마석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내는 주술이 있어 헛수고를 많이 덜었다. 토벌대의 규모가 천명도 되지 않지만 시체가 증발하기 전에 모든 마석을 채취했다.
신기는 왼손과 오른손에 마석 하나씩 들고 마력석을 제작하다가 아예 바닥에 누워서 마석들을 몸에 올려놓고 마력석으로 가공했다. 굳이 손이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공이 끝난 마력석은 염력으로 옮겼다. 염력은 실전에서 큰 효과가 없다. 생명체나 괴수나 염력에 대한 저항력이 기본적으로 있기 때문에 무기물에나 효과가 있다. 하지만 염력이 강해지면 마법의 위력이 더 강해지기 때문에 고위 마법사부터는 염력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저기 가시 소 수십 마리가 있다."
가시 소는 궁기를 말하는 것이다. 4등급 괴수인 궁기는 소를 닮았는데 주둥이고 튀어나오지 않고 평평하다. 몸에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가득 나 있는데 그 가시를 쏘아내기도 한다. 성격이 흉포해서 자신이 죽인 생명체는 그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울음소리는 늑대와 비슷하다고 한다.
- 특이상황을 감지했습니다. 궁기는 무리를 짓지 않는 괴수입니다. 이들이 수십 마리씩 무리를 지은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원인을 밝혀내면 보상이 있습니다.
'제길, 퀘스트구나. 도움말이나 퀘스트 상세정보는 기신밖에 못 보는데. 그나저나 그 뒤로는 꿈에 만난 적이 한 번도 없구나. 무슨 특별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되는 거지?'
4등급의 괴수들부터는 마석이 없다. 마법 학자들과 괴수 연구가들의 결론은 마석이 저등급 괴수들을 제어하는 핵이라는 것이다. 즉 4등급부터 독립된 개체이고 3등급까지는 명령에 따르는 만들어진 괴뢰(傀儡)라는 말이다.
궁기의 가시를 잘 다듬으면 좋은 창을 만들 수 있다. 대영제국이나 대한제국에서는 마법 회로를 만드는데 가장 많이 쓰이는 구리가 철보다 더 비싸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단단한 철이 더 귀하다. 그 철보다 더 단단한 것이 궁기의 가시이다.
신기는 궁기의 전투 방식을 떠올리며 어떻게 싸워야 할지 고민했다. 수비형 마법에는 얼음 방패도 있고 얼음 갑옷도 있는데 얼음 방패는 마법 공격을 막는데 사용되고 얼음 갑옷은 일반 공격을 방어한다. 다만 신기는 마법의 방어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고 있고 동시에 궁기의 공격력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고 있다.
"마법사 필요 없다. 우리 주술사들 가시 소 처단한다."
주술사들의 대표 중 하나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신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도 동하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신기는 마력석의 가공을 중단하고 주술사들을 따라갔다. 작은 언덕 주위에 사십이 조금 안되는 수의 궁기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마른 풀을 꼬아서 만든 붉은색 인형들이 주술사의 조종에 의해 궁기들을 향해 걸어갔다. 궁기들의 주위로 걸어갔지만 생명체가 아니어서인지 궁기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백 개가 넘는 인형들을 보낸 주술사들이 제각각 주문을 외웠다.
인형들이 얇은 얼음이 강한 태양빛에 녹듯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인형이 다 녹아 사라지자 그곳에는 붉은 연기만 남았다. 인형이 주술의 힘으로 잡아두고 있던 붉은 연기는 인형이 사라지자 가까운 궁기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주술사들의 동작이 점점 커지고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뒤 궁기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줄로 도열했다. 상급 이상의 전사들이 무기로 궁기들의 목을 하나하나 베어버렸다. 목을 베이고 계속 서있는 궁기는 해체하다시피 했다.
"4등급 쉽다. 1등급 쉽다. 그리고 다 어렵다."
전사가 많기에 1등급은 쉽다. 마나를 사용하는 전사들이 1등급 괴수보다 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4등급은 약점이 많아서 주술로 쉽게 잡을 수 있다. 하지만 2등급이나 3등급은 전사들과 비슷하거나 더 강하기 때문에 전사와 주술사의 협력이 필수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여러 부족들이 협동한 적이 없어서 어렵게 느껴진 것이다.
5등급은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가지고 있어 쉽게 함정에 걸려들지 않는다. 쫓아내는 것은 가능한데 죽이는 것은 어렵다. 대한제국이나 대영제국과 달리 체계적인 연구가 없었기에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신기는 궁기들이 모여있던 언덕으로 걸어갔다. 마음이 끌리는 대로 걸어가 보니 언덕 위에 검은색의 송곳니들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있었다. 신기는 목걸이를 집어서 품속에 넣었다.
- 작가의말
저 목걸이는 신기(神器)입니다. 소제목 신기 퀘스트를 받다는 신기가 퀘스트를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신기에 관련된 퀘스트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신기(申奇) 가 신기(神器)로 신기(神技 - 신의 경지의 기술)를 부리는 신기(神奇)한 모습을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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