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마전
30만 일본 정벌군이 제주도에 모였다. 이들에게는 7등급 괴수를 토벌한다는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이미 마붕탄에 의해 7등급 괴수의 기운이 6등급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을 여러 경로로 들었고, 직접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30만 군대가 전부 후지산으로 향하는 것은, 괜히 꼬투리 잡힐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몇십 년 혹은 백여 년 후에 서로 분쟁이나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 이번 정벌에 소극적이었다는 일을 구실로 삼을지도 모른다.
힘 앞에서 명분은 창백하지만, 명분이 없는 힘 역시 단단함이 부족해진다. 이 자리에 온 대부분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자들이기에 흠 잡힐 일을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 그리고 쓸모있는 협력자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사교의 장이 열리고 있다.
"이 청년이 바로 내 외손이오. 우리가 탑승할 배를 내 외손의 수하들이 장악했으니 다들 걱정 없으셔도 되오."
"제가 비록 대한민국의 왕자이기는 합니다만, 마음은 언제나 대한제국과 함께했습니다. 변방에서 지내기보다 세계의 중심에서 여러분과 같은 고명한 인사들과 술 한잔 나누면서 풍류를 즐기는 게 더 의미 있다 생각합니다."
신현은 감히 왕세자 자리를 되찾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외교관으로 대한제국에 파견되고 싶을 뿐이다. 지금 대한제국에 파견된 외교관은 공주인 신요와 혼인한 부마 김회국이다. 강원도에서 감시를 받으며 평생 사는 것보다 외가의 후광으로 대한제국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게 훨씬 낫다.
거기에 대한제국의 고관들과 친하게 지내면, 신무에게 일이 생기거나 할 때 왕의 자리를 넘볼 수도 있다. 그래서 신현은 아부를 열심히 했다. 다들 웃는 낯으로 대해주자 자신의 아부가 잘 먹혔다고 속으로 기뻐했다. 속에 구렁이 몇 가족씩 키우는 귀족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다.
외조부의 눈짓에 신현은 수하들을 단속하고 거북선을 점검해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가는 신현의 옷 뒷자락에는 등껍질에 동그란 점이 박힌 벌레 한 마리가 붙어있었지만, 누구도 주의하지 않았다.
"내가 맏이에게 너무 무심했구나. 이 신씨 가문에 어찌 저런 고양이가 생겨났을까?"
무당벌레를 통해 신현을 도청하던 신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자리한 신무와 김원견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신무가 왕세자가 된 후 김원견은 대놓고 왕당파가 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
"유럽 연맹이나 대만에 세워질 새 일본에 외교관으로 보내죠."
오랜 침묵이 견디기 어려웠는지 신무가 말을 꺼냈다. 신도는 신무의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으로 보내자. 그래도 핏줄이니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내도록 해주자."
신현은 운명이 이미 결정된 줄도 모르고 즐거운 미래를 그리며 자신에게 배정된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신현이 떠난 후 공작은 작은 꽃 한 송이를 꺼낸 후 꽃에 물을 주었다.
통천초(通泉草)라는 풀의 꽃으로, 꽃말이 침묵이다. 술법사가 법보로 가공하여 물을 주면 시들기까지 일정 범위 안의 대화가 밖으로 새지 않는다. 시들해 있던 통천초의 꽃잎이 생생해지자 귀족들은 통천초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7등급 괴수를 제압하면 곧바로 수도에 잠복시킨 검사들이 황실을 공격할 것이오. 소식은 이 종이 비둘기로 전하면 되오. 만약을 대비해 3개를 준비했는데 가지고 있을 사람을 뽑아야겠소."
주술 종이로 만든 노란 비둘기가 있다. 사용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정해진 암호를 말하면 비둘기가 알아서 목적지로 날아가 미리 기억된 말을 전한다.
"대공께서 하나 가지시고, 남은 두 개는 자원하는 분이 맡는 게 낫겠소."
이제 이 자리의 모두는 역모에 가담한 것이 되었다. 비둘기를 가지는 자들은 암묵적인 우두머리가 된다. 귀족은 누구나 숨겨둔 전력이 있다. 지금은 그 숨겨둔 전력을 꺼내 산동의 공작을 제외한 남은 두 우두머리를 뽑는 시간이다.
"술법사 여덟을 키우고 있소. 물론 전부 상급이오."
"상급 검사 스물여섯."
"특급 검사 하나."
"마력석 칠백만 개."
이들은 이미 연합체이다. 여기에서 더 숨기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다. 초반에 정해진 서열이 한동안 이어질 것이다. 마력석을 보유한 귀족과 특급 검사를 보유한 귀족이 비둘기를 하나씩 가져갔다.
러시아의 세 계파는 서로 사이가 서먹하다. 유한한 자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맨날 서로 칼을 맞대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셋이 모여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대영제국의 귀족들이 대한제국 군부에 로비하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대영제국 놈들은 평소에는 명예 어쩌고 고상한 척을 떨더니, 지금은 대한제국 앞에 꼬리를 흔드느라 정신이 없군."
"좋은 벌이 하나 있는데, 목장 두 개면 내가 알려주지."
세 계파의 부두목들이 책임자로 이곳에 왔다. 그중 영어를 아는 부두목은 하나밖에 없다. 좋은 정보를 얻은 이자는 이 기회에 개인 재산을 늘리기로 했다.
"말해 봐. 값어치를 하는 정보면 대가를 지급하지."
"대한제국에 무공 평가 시스템이 있는 거 알지? 최근에 대형계산기 성능이 갑자기 제고되면서 나온 거야. 그걸 이용해 매일 무공을 매기고 무공장을 준다는군."
"그 정보는 우리도 알고 있는데?"
"대영제국의 가식쟁이들이 그 무공장을 사겠다는군. 모아놓고 경매를 하면 한몫 톡톡히 챙길 수 있을 거야."
"목장 두 개는 좀 그렇고, 내게 규모가 큰 목장이 하나 있어. 그걸 넘겨주지."
자원이 항상 부족한 러시아는 경매 문화가 매우 발달했다. 희귀한 물건은 본래 가치의 몇 배로 판매되는 건 다반사다. 크게 이득이 되는 게 없는 일본 정벌에 억지로 발길을 했는데 예상외의 소득이 생기게 되자 러시아의 진영에는 갑자기 활기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대영제국의 진영도 다르지 않았다. 대한제국 군부에 뇌물을 건네고 러시아에서 무공장을 사들일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서로 모여서 작당을 하는 세력도 있다.
"이번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합니다. 능력이 많고 욕심이 많은 자가 높이 올라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꼭대기로 올라간 자들이 이 좋은 기회를 양보하다니 말이 안 됩니다."
"맹수가 사냥하지 않는 건, 배가 부르기 때문이라 생각하오."
"지금 밖에서 뛰어다니는 멍청이들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대영제국과 부대끼는 사이에 숨죽이고 힘을 키우죠."
"흩어지면 각개격파를 당할 뿐이오. 우리는 일단 러시아와 관계를 잘 맺어야 하오. 대한제국은 거리가 멀어 영향력이 없으니 러시아만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대영제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힘을 키울 수 있소."
"차라리 유럽 연맹에 가입한 후, 러시아도 끌어들이는 게 어떻습니까?"
"연맹을 새로 만들고 기존 유럽 연맹과는 동맹 관계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 많은 나라가 한목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건 멍청한 짓이오."
"대영제국도 우리 연맹에 끌어들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대영제국의 격이 한 단계 떨어집니다."
"이렇게 합시다. 우리 연맹의 국가는 화폐를 통일하고 무역할 때 세금을 면제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나라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허락합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돈을 벌면, 그 세금의 절반을 그 사람의 국가에 주는 것입니다."
"오, 그렇게 되면 각 국가의 전문화가 이루어지면서도 재부가 한곳으로 몰릴 일이 없겠군. 아주 좋은 생각이오. 난 찬성을 표하오."
"좋은 생각이오. 구체적인 것은 법학자와 경제학자들을 모아서 더 고민해보기로 하고 오늘은 대원칙을 먼저 정합시다. 경제적으로 연맹이고 군사적으로 동맹이오."
"매년 한 번씩 모여서 협동으로 군사 훈련을 합시다. 올림픽처럼 항목을 정해서 등수를 매기는 것이죠. 군대도 전문화가 필요합니다."
회의는 중구난방으로 진행되었지만 결국 중의를 모아 결론을 내렸다. 경제적으로는 한 나라처럼, 군사적으로는 독자적으로 군대를 보유하고 동맹을 맺기로 했다. 다른 나라에 군사를 요청하게 되면 요청을 한 국가에서 비용의 절반을, 연맹에서 남은 비용을 부담하기로 초보적으로 합의했다.
"우리 연맹을 자유 연맹이라 하는 게 어떻소?"
"민주 연맹이라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평민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오."
"독립 연맹도 괜찮소. 민족주의가 심해서 독립이라는 말이 흡인력이 있소."
결국, 연맹의 이름은 민주독립 연맹으로 결정되었다. 각 국가는 왕정이지만 연맹은 공화제를 모방했다. 소속된 국가들은 연맹에 세금을 내야 하고, 세금은 중대한 프로젝트의 추진을 위해 사용된다.
마지막 손님인 대한제국의 군부도 회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번 작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각자 의견을 기탄없이 말해라."
"굳이 30만이 필요 없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겉으로 드러난 목적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숨겨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 분명하다."
대한제국 군부는 효율을 위해 회의에서 존칭을 생략한다. 계급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발언 기회를 얻는다. 황실과 귀족들의 암투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이 최강의 군대를 자랑할 수 있는 이유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보가 부족한 우리가 무언가를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저 우리 식으로 대비를 해야 한다."
군부는 최대한으로 술법사와 마법사를 배제했다. 군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귀족 계층이나 황실이 아닌 국가에 충성한다. 황실과 귀족과 대등한 새로운 계층이 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새로운 계층이 될 가능성이 충분한 술법사와 마법사를 억눌렀다.
"황실이나 군벌들이 자체로 보유한 병력을 합치면 군부의 몇 배가 된다. 물론 질은 우리가 훨씬 낫지만 말이다. 우리 군부가 오랜 시간 중립을 유지하며 괴수와의 싸움에 커다란 공헌을 했지만, 이들은 항상 우리를 의심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우리는 군대다. 우리가 저들과 같아지는 순간 정체성이 사라진다. 명심해라.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우리는 국가에 충성해야 하는 군대다. 황실이나 군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한낱 군벌로 전락하는 순간, 군부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인간과의 전투는 별로 없었지만, 우리는 수많은 병법서를 읽었다. 우리가 가장 약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가 아니다. 우리가 방심할 때 가장 위험하다. 우리가 방심할 때는 7등급 괴수를 쓰러뜨렸을 때와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황실이 숨겨둔 마붕탄으로 30만을 전부 소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거북선에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한다."
"왕도 아니고 왕세자도 아닌 폐세자가 파견되었다. 이게 장안법(障眼法 - 눈속임)은 아닐까?"
거북선에 주의를 끌어놓고 다른 수작을 벌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군부는 판단했다. 하지만 확실한 정보가 없는 이들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저 다양한 상황을 가정하고 그에 대해 대비를 최대한으로 하는 것뿐이다.
마(魔)를 제압하러 일본으로 향하는 연합군은 사실상 복마전(伏魔殿)이었다. 인류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괴수가 아닌 인류 자체일지도 모른다. 밤이 깊어갔지만, 제주도의 곳곳에는 이익을 좇는 무리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 작가의말
세상 모든 사건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건 너무 작위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나오지 않으면 지루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난 글 천마에서 많은 지적을 받았죠. 그래서 이번에는 주인공이 없는 상황을 최소한으로 줄였습니다. 압축했는데도 다음 편까지 이어지네요. 그래도 예전 글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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