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신, 영국으로
기신은 C급 자격증을 손쉽게 따낸 후 일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강사추천으로 B급 자격증에 도전할 수 있다. 감독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축구에 한층 재미를 붙인 기신은 주말시간에 인터넷으로 축구경기 동영상과 외국 유명감독과 은퇴선수들이 전술분석을 하는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그 와중에 중국에 몇 년째 거주중인 절친 최영호가 국제전화로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양친을 잃고 큰아버지의 손에서 자란 영호와 계모의 손에서 자라다 부모님의 이혼후 아버지와 단둘이 생활한 기신은 어릴때부터 서로 의지하는 친밀한 사이다.
프로젝트 덕분에 받은 상여금과 은행 대출로 5억을 마련해서 친구에게 보내주었다. 주머니가 쪼들리게 변한 관계로 기신은 선배들의 소개팅 제안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대기업의 전도유망한 후배라고 여자에게 소개했을 텐데 자신이 궁색한 모습을 보이면 폐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장 과장이 선두지휘하는 프로젝트는 아무런 장애도 없이 예정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었고 기신의 회사생활도 역시 순풍을 타고 쾌속항진 했다.
자격증 시험에서도 김 전무의 파워는 기신의 상상밖이었다. 일년여 전의 부탁인데도 상대는 잊지 않고 기신의 편의를 봐주었다. B급 자격증을 따낸 후 A급 자격증에도 도전할 생각이라는 말에 협회의 관계자는 기신에게 초등학교 감독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회사원이기 때문에 주말밖에 참여할 수 없지만 무보수로 일하겠다는 말에 학교측에서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다 작년에 영호에게 송금하기 위해 만들어둔 중국은행의 계좌로 거금이 들어왔다. 깜짝 놀라 영호에게 전화를 하니 기신을 투자자 신분으로 해서 15% 지분을 가진 제삼주주로 등록했다는 것이다. 영호가 30% 지분을 가졌고 중국 고위간부의 친척이 55%의 지분을 가졌다고 한다.
"놀고 먹는 사람에게 55% 주는게 손해인거 같아도 그 사람 아니면 우리 사업은 성공이 불가능해. 한달 걸릴 수속이 일주일에 끝나거든. 그리고 면세대상으로 선정되어서 첫 3년은 세금 면제, 4년부터 10년까지는 절반 면제야."
대출을 전부 갚고도 돈이 남았다. 주머니가 넉넉해진 기신은 선배들의 소개팅을 기대했지만 그간 너무 많이 튕겨서 철벽이라 소문이 난 기신에게 누구도 소개팅을 주선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주말의 낮은 초등학교 축구부의 훈련을 돕는 것으로 때우고 밤에는 이마가 점점 시원해지는 코치 형님과 술잔을 기울이며 보냈다.
일년의 시간이 또 흘러 A급 자격증까지 땄다. P급 자격증을 따려면 5년의 경력이 필요하다. P급에 도전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던 기신은 자신이 왜 축구감독 자격증을 따려고 했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래, 어릴적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지. 영국에 가서 축구감독이 되는 꿈.'
그런데 몇달전에 구매한 집이 갑자기 마음에 걸렸다. 영국으로 떠난다는 놈이 왜 집을 구매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귀신 들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냐, 급처분 하는 집이라서 반값에 산 거니까 잘 한거야. 한국을 떠난다면 부동산에 맡겨두면 되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 나는야 쾌활한 분계선 ###
"장 과장, 내년이면 자네는 부장이 될 거야. 과장 자리는 누구에게 물려줄 생각인가?"
"전무님, 능력으로 보면 기신인데 이제 4년차 입니다. 해가 바뀌어도 5년차인데 과장은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창현이는 두루두루 괜찮은데 마음이 많이 여립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지 아니면 망칠지 걱정됩니다."
"기 대리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나? 창현이가 과장이 된다면 속에 불만을 품고 그럴까?"
"그렇지는 않을겁니다. 보통 엘리트 코스가 6년에 과장이거든요. 해가 바뀌어도 사년밖에 되지 않는데 과장자리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기신의 능력이 너무 출중해서 창현이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될 뿐입니다."
"이 일은 장 과장이 알아서 잘 정리하게. 내가 여기를 떠나더라도 남은 사람들이 잘 버틸 수 있어야 하네. 전자에 가서 사장이 되기 전에는 자네들 누구도 부르지 않을 것일세. 침몰하더라도 나 혼자 침몰해야지."
김 전무는 자신을 믿고 따라온 자들에게 기반을 튼튼하게 닦아준 뒤 전자로 넘어가서 고군분투를 할 생각이다. 어차피 자신의 라인은 능력위주라 정치에 능한 사람이 드물다. 전자쪽은 정치판이라 이들을 데리고 가면 정치꾼들에서 오히려 약점으로 뜯길 수 있다.
김 전무와 작별한 장 과장은 창현과 기신을 찾아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병을 열었다. 빈병이 여섯개 정도로 늘었을 때 장 과장이 입을 열었다.
"창현이, 그리고 신이, 너희들도 소문 정도는 들었을 것이다. 내년이 되면 나는 부장으로 승진한다. 내가 떠난 자리를 너희 둘 중에서 메꿔야 하는데 걱정이구나. 둘다 내가 너무 아끼는 동생이라서 누구도 섭섭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형님, 신이가 일 잘하고 능력도 좋으니 신이가 하면 되죠. 저는 섭섭한게 없습니다."
"아닙니다. 창현 형님이 능력이 되고 연차도 있는데 당연히 형님이 과장 되셔야죠. 저는 아직 젊은놈 아닙니까. 서른도 안 되었는데 과장이 웬 말입니까."
장 과장과 창현은 입을 딱 벌렸다. 이제 보니 기신은 아직 이십대였던 것이다. 가끔 사흘씩 밤새서 일하는 걸 보면서 젊고 싱싱한 놈임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능력이 출중하다 보니 나이를 까먹게 된다.
"그리고 저는 연말쯤 퇴사하고 제 꿈을 좇을 생각입니다. 형님이 과장이 되셔서 부서를 잘 이끌어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네 꿈이 뭔지 모르지만 지금 이대로 가면 넌 상무까지도 가능한 놈이야. 이번에 과장이 되면 삼십대 중반에 부장이 되고 사십대에 상무가 가능해. 지금처럼 일을 잘 한다면 사장이 가능할지도 몰라. 보장된 미래를 버릴 정도로 간절한 꿈이냐?"
장 과장의 두 눈은 취기가 싹 가셨다. 자신도 과장이 되기전에 퇴사하고 창업할까 고민한 적이 있다. 그때 잡아준 사람이 김 상무다. 그때 남기로 결정한 일이 지금보면 아주 잘한 일이다. 상무는 전무가 되었고 대리였던 자신은 내년에 부장이 된다.
기신의 술을 마시고 하얗게 변했던 얼굴색이 순식간에 빨갛게 변했다. 술기운이 부끄러움에 진 것이다. 속으로 창피하지 않다를 되뇌이며 기신은 용기를 내 대답했다.
"영국 가서 축구감독 될려구요."
고요한 정적이 맴돌았다. 정적은 원래 고요하다는 뜻인데 왜 고요한 정적인지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이상한 생각이 마구 떠오르며 기신을 괴롭혔다. 술기운이 갑자기 머리로 치고 올라온 느낌이다.
"와, 멋진 녀석!"
창현이 내뱉은 작은 탄성이 침묵을 깨뜨렸다. 고요한 정적이 아니라 고요한 침묵이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기신은 두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술기운이 조금 물러가는 기분이 든다. 자신이 술에 취했는지 부끄러움에 멍해졌는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자신 있어?"
장 과장의 짧은 질문에 기신은 주저리주저리 대답했다.
"지금 A급 자격증까지 땄구요. P급 따려면 5년의 경력이 있어야 된대요. 일단 영국에 가서 그쪽 자격증을 따고 하부리그 팀 감독이 되어 경력을 쌓아야죠. 친구가 중국에서 사업이 대박 났는데 저에게 배당금이 와요. 먹고 사는 걱정은 없죠. 아직 젊으니까 실패해도 다른 일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구요. 제가 좋아하는 일이고 어릴적부터 꿈이라 결과와 상관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장 과장은 소주를 한모금에 넘겨버렸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김 전무라면 몰라도 자신이 품고 가기에 기신의 능력이 너무 대단하다. 안도하는 한편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기신이 자신에게도 위협이 될까 걱정되어 속으로는 창현을 후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 강해지는 게 아니라 점점 비겁해지는 것 같다.
"그럼 창현이 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라. 그리고 기신이 너 이 자식, 오늘 두다리로 걸어가는 사람 있으면 내가 고추 뜯어버리겠다. 죽을 때까지 마시자."
술의 절반은 옷에 쏟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장 과장 덕분에 창현과 기신은 오히려 점점 머리가 맑아졌다. 끝내 인사불성이 된 장 과장을 집까지 데려다 준 둘은 찜질방에 가서 잠을 잤다. 기신은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고 창현은 마누라가 있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기 때문이다.
### 나는야 쾌활한 분계선 ###
연말이 가까워질 때 기신은 부서의 사람들과 송별회를 했다. 퇴사수속을 마쳤고 며칠뒤에 영국으로 가는 표를 예매했으며 영국에서 지낼 집도 영호의 도움을 받아 이미 찾아두었다. 기신이 걱정했던 집은 영호가 기신으로부터 구매해서 큰아버지에게 새해선물로 드릴 계획이다.
"기신, 너 될놈이야. 만약 그쪽에 가서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돌아와. 우리 그룹에 구단이 몇개인데. 일자리 하나 알아봐주는거 일도 아니다."
김 전무는 며칠동안 술에 절어서 살았는지 맥주 몇잔 마시고 곧바로 취했다.
"내가 말이야, 눈이 아주 독한 사람이야. 지금까지 내 눈에 들어서 잘 되지 않은 사람이 없거든. 넌 뭘 해도 성공할 거야. 그러니 가서 기죽지 말고 열심히 해서 코쟁이 놈들 코를 납작하게 해줘."
김 전무가 빨리 취한 덕분에 술자리도 빨리 끝났다. 송별회를 끝내고 기신은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밤거리를 배회했다. 화려한 불빛 아래 온갖 인간군상이 술에 취해 자신을 여과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총각, 와서 점 한번 보게. 틀리면 돈 안 받겠네."
흰머리가 검은머리보다 많은 할머니가 기신에게 손짓했다. 기신이 다가가서 쪼그리고 앉자 할머니는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이름 하고 생년월일, 태어난 시간까지 말해봐."
"1988년 5월 1일 8시 12분에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기신이라고 합니다."
"음력으로 3월 16일 이구만. 기운이 너무 센데."
할머니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무언가 계산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기운이 너무 강해. 무진년 병진월 병진일 무진시에 태어났어. 진이 용이니까 팔자에 용만 넷이야. 오행으로는 전부 토와 화밖에 없어.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할 수 있는 운명인데 이상하게 몇년전에 변했구만. 주변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팔자가 되어버렸어."
기신은 오만원짜리 한장을 꺼내 할머니에게 건넸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였고 그 탓에 태어난 시간까지 기억한다. 후에 아버지는 계모와 이혼을 했고 기신과 친하게 지내던 영호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었다. 기신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탔고 그뒤로 가끔 편지로만 연락이 왔다. 그것도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끊겼다.
하지만 취직한 후에는 모든것이 순조로웠다. 김 상무는 전무가 되었고 장 과장은 곧 부장이 될 것이며 창현은 과장이 될 것이다. 영호는 중국에서 사업을 성공시켰고 지금도 규모를 늘려가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바꾼건 무엇일까? 취직인가 아니면 회사에서 귀인을 만난 것인가? 여러가지로 고민하던 기신은 문득 게임기가 생각났다. CPU 정보가 없고 메모리가 1테라로 표시되는 게임기. 게임 하나 다운받은 후 까맣게 잊고 있던 게임기. 택시를 불러 집으로 향한 기신은 게임기를 찾아서 가동시켰다.
- 작가의말
2012년 4월 13일 8시 35분, 임진년 갑진월 갑진일 무진시 입니다.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의 2시간이 진시입니다. 용이 네개 들어가서 용의 힘이 가장 강성한 시간이라는 설정입니다. 2편에서 사람들이 냉기에 죽은 시간입니다.
기운이 세서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한다는 건 제가 소설을 위해 꾸며낸 말입니다. 혹시라도 팔자중에 진이 네개 들아간 분들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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