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 안 반갑다
32강 경기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한국은 3:0의 안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두 번째 경기에서 포르투갈에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공격하던 것과 반대로 세 골을 넣은 후 한국팀은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영했다.
기신과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 진짜 월드컵 우승을 염두에 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기신이 항상 우승을 입에 담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월드컵 4강 이탈리아에 승리하며 자신감을 얻고, 포르투갈 경기에서 황희를 교체한 후 선수들은 우승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소리를 쳐도 메아리조차 없었다. 그런데 팀 내에서 우승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기신은 마음이 편해졌다. 포르투갈 경기에서 스페인을 만날까 걱정되어 공격에 공격을 거듭했다. 포르투갈의 공격을 공격으로 제압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경기 마지막까지 공격한 것은 정상적인 운영이 아니다.
첫 경기 이탈리아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두 번째 경기 포르투갈은 아주 우악스럽게 운영했다. 기신의 심경이 반영된 경기 운영이다. 마음이 편해진 세 번째 경기에서는 안정적인 운영을 보여주었다. 경우의 수를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제부터는 이기기만 하면 된다.
한국을 피한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2:2 무승부를 내고 페널티킥에서 패했다. 이탈리아도 페널티킥으로 많이 패한 팀이다. 94년 미국 월드컵에서 결승전에 브라질과 0:0으로 비기고 페널티킥으로 패했다.
스페인 역시 페널티킥을 잘하는 팀은 아니다. 둘의 페널티킥은 수많은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94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는 1승 1무 1패 4점으로 조 3위를 했다. 24팀이 참가한 월드컵이라서 3위임에도 불구하고 16강에 진출했고 결국 결승까지 갔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이탈리아가 결승까지 갈 수 있을지 많은 언론이 주목했다. 이탈리아가 결승까지 가는 경우 대부분 조별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조별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일 때는 토너먼트에서 쉽게 탈락했다.
"주술사, 오늘은 주술 안 쓸 거죠?"
16강에서 영국을 만났다. 헌터와 나이스가 대표팀에 소환되었는데 나이스는 벤치다. 헌터는 해리 케인에게 벤치의 푹신한 자리를 양보했다. 그레이와 블랙은 안정성이 부족해 대표팀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차범수가 없으면 블랙이나 그레이는 큰 실수를 드물지 않게 한다. 그래도 출중한 능력이 아까워 대표팀에 부를 만도 한데 이번 월드컵은 32강부터 토너먼트다. 결승까지 단판 승부를 5경기나 벌여야 한다. 한 번의 실수가 패배로 이어질 수 있기에 블랙과 그레이는 TV로 월드컵을 관람할 수밖에 없다.
"헌터, 오늘은 슈팅 안 할거지?"
헌터의 반가운 인사에 기신은 웃으며 농담으로 응대했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기술형 선수는 크게 두렵지 않다. 팀 수비로 활동 반경을 제한하고 슈팅 경로를 제한하면 된다. 그러나 헌터같은 공격수를 막으려면 크로스와 패스도 제한해야 한다. 헤딩뿐 아니라 슈팅도 어마어마한 선수가 되었다.
"주술사, 월드컵 끝나면 노츠 카운티로 올 건가요?"
"우승하면."
헌터는 경기에서 해트트릭했다. 길서준은 아예 헌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황동근이 거의 터너급의 활약을 했고 한윤과 공민훈이 영국 두 윙백이 멋대로 활약하지 못하게 제한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헌터가 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창조한 한 경기 5골의 기록을 깰 뻔했다.
황희와 현기철 그리고 길서준의 골로 3:3 무승부를 내고 페널티킥을 했다. 한국은 길서준이 공을 날렸고 영국은 두 선수가 공을 날렸다. 두 골키퍼는 하나의 페널티킥도 막아내지 못했다. 황동근은 페널티킥 수비에서 전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기신에게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그리고 8강에서 사상 최악의 우루과이를 만났다. 월드컵에 새로운 역사를 쓴 우루과이다. 조별 경기 둘 다 0:0 무승부를 내고 조 2위로 32강에 진출했다. 32강에서 0:0 무승부를 내고 페널티킥에 승리해 16강에 들었다.
16강에서 벨기에를 만나 0:0 무승부를 이루고 페널티킥으로 8강에 안착했다. 득점 하나도 없이 8강에 진출한 우루과이는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팀으로 평가받았다.
FIFA를 질책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참가팀을 48팀으로 늘렸다. 그러나 UEFA를 위수로 하는 적지 않은 협회의 반대로 경기 일정까지 늘리지 못했다. 월드컵의 수익도 가관이지만 유럽 빅리그의 상업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일정은 예전과 같은 한 달로 잡으면서 16개 조로 나누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런데 우루과이처럼 수비만 하며 8강에 진출한 팀이 생기자 FIFA는 지구 멸망 후까지 존재할 수 있는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한국팀에는 호재다. FIFA는 어떻게든 우루과이를 4강에 진출시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심판들은 한국팀에 호의적일 것이고 중립 팬들도 한국팀을 응원할 것이다. 그리고 경기의 양상도 기신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루과이는 헌터의 해트트릭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한 경기도 출전한 적이 없는 키가 큰 공격수를 앞세웠다. 그러나 영국팀과는 달리 양질의 크로스를 받지 못한 공격수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우루과이도 어차피 혹시나 해서 장신의 공격수를 출전시켰을 뿐 효과를 보지 못했음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수비에 집중했다.
기신은 우루과이의 수비를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몸싸움할 때 항상 부가적인 동작이 있다. 강한 타격은 아니지만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를 지속해서 가격했다. 경험이 부족한 선수는 몸싸움을 벌일 때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 수 있다.
그렇게 중요한 수비 지역에서 일대일의 우위를 점한다. 협력 수비도 훌륭하고 상대의 슈팅 앞에 과감히 머리를 포함한 모든 신체 부위를 들이밀 정도로 무모하게 몸을 던졌다. 수비에 참여하는 선수들이 쉴 새 없이 뭐라고 외치며 교류를 했다.
후반전이 되자 기신은 유재범을 내리고 채운을 출전시켰다. 얼핏 보면 수비를 강화하는 교체지만 채운과 김시웅이 수비를 책임지고 차범수를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로 올렸다. 공간을 빠르게 보는 차범수의 재능이 공격에서 빛을 발했다.
현기철은 차범수가 찔러준 공을 어떠한 교정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슛했다. 현기철이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위치에서 수비수의 방해 없이 편한 발로 슈팅했다. 아주 정확하게 날린 공은 수비수의 양손에 잡혔다.
그렇다. 골키퍼가 아닌 수비수의 양손에 잡혔다. 주심이 카드를 꺼내기 전에 우루과이 수비수는 알아서 경기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내려가면서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동료들을 격려했다.
아마 최소 석 달, 길면 일 년의 출장정지 처분을 받을 것이다. 기신은 현장 정보가 알려준 선수들의 컨디션을 비교하며 누가 페널티킥을 차는 게 좋을지 가늠했다.
"동춘이가 차게 해."
심리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박동춘에게 페널티킥을 맡겼다. 차범수는 최근 프리킥뿐 아니라 중거리 슈팅 수치도 보이지 않는다. 팀의 핵심 선수로서 뭔가를 하려는 부담에 슈팅 안정성이 떨어진 듯하다. 심리적인 문제인 듯해서 기신도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쁜 쪽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박동춘은 개인 능력이 그렇게 뛰어난 수비수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고 누구와 함께 출전해도 좋은 모습을 보인다. 차범수가 없을 때 길서준이 수비를 지휘하지만, 수비진의 안정을 지키는 건 박동춘이다.
박동춘은 기신이 자신을 지목한 이유를 고민했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기신이 지금 선수들의 상태를 초월적인 힘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기신이 어떤 이유로 자신을 낙점했는지 알 방도가 없다.
'뭐,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어떤 결과를 원하는지는 뻔하지.'
왜인지는 모르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페널티킥에 성공하면 된다. 그 이유는 나중에 상황이 허락할 때 물어보면 된다. 박동춘은 모든 정신을 골키퍼에게 집중했다.
바닥에 놓은 공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상대 골키퍼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박동춘의 숨겨진 재주가 발휘되었다.
한발 한발 공을 향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움직이면서 박동춘은 계속 골키퍼만 바라보았다. 굳이 공을 보지 않아도 정확하게 찰 수 있다. 공과의 거리, 자신의 보폭에 대한 계산이 끝났다. 마지막 슈팅을 하는 순간 고개를 숙여 확인하면 된다.
상대와의 수비 간격을 가늠하다 발견한 재주다. 박동춘은 계산에 능했다. 공부는 그럭저럭인데 생각 밖으로 계산이 빠르고 정확했다. 그래서 박동춘은 균등한 기회에서 공 다툼을 할 때 늘 우위를 차지했다. 수비에서 안정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다. 빠른 계산을 통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에 무모한 실수가 적다.
박동춘의 공은 골키퍼가 몸을 날린 반대 방향으로 골대에 들어갔다. 심지어 빠르거나 각이 예리한 공도 아니다. 골키퍼가 왼쪽을 선택할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이 오른쪽으로 공을 밀었다.
우루과이는 선수 한 명이 퇴장했지만 어쩔 수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한국은 수비 라인을 적당히 내리고 반격을 시작했다. 우루과이가 포르투갈처럼 공격이 강한 팀이 아니기에 수비 라인을 내렸다.
우루과이 장신 공격수와 헤딩 경합을 한 길서준이 쓰러져서 일어나지 않았다. 의료팀이 급하게 투입되었다. 의식을 잃은 길서준은 곧바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 길서준을 팔꿈치로 가격한 우루과이 공격수는 붉은 카드로 퇴장당했다.
2명이나 퇴장당한 우루과이를 상대로 기신은 박정현을 올렸다. 김시웅이 적당히 뒤로 처져서 중앙수비수 역할을 했다. 박정현은 미드필더 자리에 서서 제공권을 장악하는 역할을 맡았다.
우루과이의 거듭된 반칙에도 꾹 참고 있던 선수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선수들은 그 분노를 끊임없는 공격으로 분출했다. 박정현의 헤딩과 황희의 슈팅으로 골 2개 더 넣은 한국은 우루과이를 3:0으로 이기고 4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길서준이 병원에서도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행기로 급하게 뉴욕으로 이송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최고의 의료진이 길서준을 진단하고 치료할 것이다.
"다들 서준이 몫까지 열심히 하자. 꼭 우승해서 서준이를 월드컵 우승 멤버로 만들어주자."
기신은 최악의 경우 길서준과 함께 노팅엄에 갈 생각이다. 만약 생명이 위급하다면 퀘스트고 나발이고 길서준부터 구해야 한다. 하루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뉴욕에서 어떤 진단을 내리는지 확인하고 결정할 생각이다.
4강전을 위해 캐나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소식을 들었다. 여전히 깨어나지는 못했지만 생명의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기신은 월드컵이 끝나면 길서준을 데리고 노팅엄에 가서 치료해 주기로 했다.
4강전 상대는 이탈리아다. 4강에서 한국과 이탈리아가 대결하고 독일과 아르헨티나가 대결한다. 남미의 유럽팀이라 불리며 늘 수비를 강조하던 아르헨티나, 무장점이자 무결점의 팀으로 불리는 독일이 붙게 되었다. 수비는 세계 최강을 논할 수 있는 이탈리아는 첫 경기 한국에게 패한 후 승승장구했다.
첫 경기는 연기하며 이탈리아의 방심을 유도했다. 득점 기회를 세 번 만들었고 한 번 성공했다. 유재범의 골은 득점 기회가 아니다. 운으로 얻어걸린 골이라 할 수도 있고 유재범이 개인 능력으로 만든 골이라 할 수도 있다.
다시 만난 이탈리아는 무시무시할 것이다.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려 숨 막히는 수비와 묵직한 공격으로 한국을 압박할 것이다. 기신은 불안해지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았다.
- 작가의말
역시, 늘려 쓰기를 안 하니 글이 매끄럽게 써집니다. 그래도 남은 두 경기는 좀 길게 써야겠죠. 제가 그래도 꼬리는 항상 용 꼬리로 장식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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