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전
국가가 울렸다. 선수들은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몇몇은 국가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선수들의 얼굴을 한 번씩 비춘 후 화면은 벤치로 넘어갔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기신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었다.
"김철범 선수가 선발로 출전했습니다. 이번 월드컵 첫 출전이기도 하죠."
주심이 동전을 던지고 선수들이 자리를 잡는 사이 해설자가 김철범을 언급했다.
"김철범 선수의 출전은 독일이 결승에 진출한 순간 결정된 거라고 합니다. 아마 미리 준비한 전술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한국의 선축이다. 김철범은 공을 강하게 차서 길서준에게 패스했다. 길서준은 공을 박동춘에게 주었다. 박동춘은 두리번거리는 척하다 앞으로 강하게 찼다. 김철범이 공을 잡고 돌파를 시도했다.
"반칙입니다. 한국팀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었습니다."
"차범수 선수와 황희 선수 그리고 공민훈 선수가 공 앞에 섰습니다. 위치상 황희 선수가 찰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왼발 선수에게 유리한 위치입니다."
차범수는 공을 돌려서 마음에 드는 문양이 위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뒤로 성큼성큼 물러섰다. 주심이 호루라기를 불자 곧바로 앞으로 달렸다.
왼 다리로 체중을 든든하게 버텨냈다. 빠른 속도로 오른발을 휘두르다 마지막 임팩트 순간 숨을 멈췄다. 차범수의 발을 떠난 공은 곧고 빨랐다. 먼 포스트를 염두에 두고 있던 독일 골키퍼는 미처 공에 반응하지 못했다.
"놀랍습니다. 경기 1분도 채 안 되어 차범수 선수의 직접 프리킥으로 한국이 앞서갑니다. 화면에 기 감독 얼굴이 비칩니다. 침착한 표정입니다.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입니다. 골 넣은 차범수 선수도 흥분한 표정은 아닙니다."
차범수는 워드의 말대로 프리킥을 차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점점 프리킥의 위력이 떨어졌다. 많은 고민을 하면서 프리킥 훈련을 했지만 점점 혼란에 빠졌다.
"자연스럽게 해. 숨을 쉬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자연스러운 게 중요한 거지."
결승전 전날 기신이 차범수에게 건넨 말이다. 차범수는 워드의 프리킥 동영상을 찾아서 다시 확인했다. 마지막 임팩트 순간 워드도 숨을 멈추는 듯하다. 아마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숨을 자연스럽게 쉰다고 생각한 것 같다.
임팩트 순간에만 숨을 멈춰 공에 더 많은 힘이 정확하게 실리게 한다. 이것이 워드의 프리킥 비밀이다. 계속 숨을 쉬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임팩트 순간에 숨을 멈추니 훨씬 빠르고 위력적인 슈팅이 되었다.
월드컵 본선 여섯 경기에서 프리킥을 찬 횟수가 몇 번 안 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형편없는 킥을 했다. 덕분에 독일 골키퍼는 황희가 먼 포스트로 찰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대비했다. 차범수가 차더라도 느린 공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독일은 강팀입니다. 전혀 조급해하지 않네요."
그때 한국팀 벤치에서 선수들이 일어나 몸을 풀었다. 다른 팀이면 상대를 흔들기 위한 작전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기신이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독일의 윙백 베노가 크로스를 올립니다. 길서준 선수가 헤딩으로 걷어냈습니다. 길서준 선수가 걷어낸 공을 김시웅 선수가 잡았습니다. 두 선수의 압박에도 잘 지켜내고 있습니다."
"박동춘 선수에게 패스합니다. 박동춘 선수 황희 선수에게 공을 찔러줍니다. 황희 선수 드리블."
황희는 드리블하다 공을 차범수에게 넘겼다. 차범수는 공을 잡고 오른쪽의 공민훈을 쳐다보았다. 공민훈이 위로 달리자 베노가 공민훈을 따라갔다.
차범수의 발을 떠난 공은 빠르고 강하게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낙구 지점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는 김철범이 있었다. 키에 비해 엄청 굵은 허벅지를 자랑하며 빠르게 달렸다.
"김철범 선수 공을 잡고 드리블합니다. 차범수 선수의 프리킥 때문에 쉽게 반칙하지 못합니다. 김철범 유재범에게 패스."
유재범에게 패스한 김철범은 곧바로 안으로 침투했다. 유재범의 리턴 패스는 아주 정확하게 김철범의 앞에 떨어졌다. 김철범의 왼쪽 무릎이 살짝 굽혀졌다.
왼쪽 발목이 강하게 버티면서 몸을 멈춰 세웠다. 허벅지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상체를 든든하게 지탱했다. 김철범은 의자에 앉은 듯 편하게 몸의 균형을 잡고 오른발로 슈팅했다.
경기가 중단되었다. 김철범의 슈팅은 가까운 포스트를 노렸다. 거기에 정확한 슈팅으로 크로스바를 향해 공을 날렸다. 유럽에서도 정상급 수준으로 평가받을 슈팅이다.
독일 골키퍼는 몸을 날려 김철범의 공을 막아냈다. 그러나 공과 크로스바 사이에 손이 끼면서 손가락을 다쳤다. 손목이 공에 실린 힘에 밀리면서 작은 상처를 입었다. 거기에 떨어질 때 골대와도 살짝 충돌했다.
"자자, 몸이 식지 않게 계속 움직여주세요."
김시웅이 소리 질렀다. 여름이라 움직이지 않는다고 몸이 식지는 않는다. 하지만 컨디션이 하락할 가능성은 있다. 특히 경기 초반 컨디션을 빠르게 끌어올린 선수들은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다.
골키퍼의 치료가 끝나고 코너킥을 차게 되었다. 독일팀 키퍼 기준으로 왼손 편에서 차는 코너킥이다. 한국팀 선수들은 대부분 먼 포스트에 몰렸다. 방금 골키퍼가 다친 손이 오른손이다.
독일 선수들도 한국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수비의 중심을 먼 포스트에 두었다. 길서준과 박동춘을 제외하면 한국팀에서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선수가 없다. 평균 신장이 거의 10센티는 차이 난다.
공민훈의 코너킥은 낮고 빨랐다. 아크 지역에 있는 차범수를 향해 날아갔다. 독일 수비수가 빠르게 차범수에게 접근했다. 그때 김철범이 공의 경로에 불쑥 나타났다. 김철범은 이를 악물고 빠른 공을 향해 오른발을 휘둘렀다.
훈련할 때 50번 시도해서 공을 맞히는 데 세 번 성공했다. 그리고 셋 다 골대를 벗어나는 어이없는 슈팅이 되었다. 슈팅이라기보다 수비수의 걷어내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차범수에게 신호를 받았을 때 조마조마했다. 공민훈이 킥을 하는 타이밍을 헤아렸다. 빠르게 달려도 안 되고 늦게 달려도 안 된다. 김철범은 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집중했다.
공민훈이 공을 차는 순간 김철범은 앞으로 달렸다. 김철범을 주시하던 독일 선수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빠르게 앞으로 달려간 김철범은 숨을 멈추고 슈팅했다. 방금 아깝게 골키퍼에게 막혔던 슈팅과 흡사한 슈팅이 터졌다.
크로스바에 맞은 공은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 밖으로 튕겨 나왔다. 김철범은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슈팅한 후 공이 골대 안으로 날아 들어가는 장면이 집중한 김철범에게 보였다. 공이 완전히 선을 넘은 것을 확실하게 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난 후 주심이 골을 선언했다. VAR 심판이 확실한 골이라고 알려왔다. 전반 10분도 안 되어 한국팀은 두 번째 득점에 성공했다. 김철범은 매우 흥분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크게 벌름거리는 콧구멍이 김철범을 배신했다.
한국팀 벤치에서 선수들이 일어나 두 번째로 몸을 풀었다. 심리전이다. 일부러 독일 선수들 약 올리는 것이다. 유치한 수작이지만 유치하기에 잘 먹히는 수작이다. 얄팍해서 더 얄미운 수작이다.
"깊이 반성합니다. 기 감독이 우승을 언급할 때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습니다. 결승에 진출하고 경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계속 의심했습니다. 이후에는 기 감독이 메주로 콩을 쑨다고 해도 믿겠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건, 선수들이 크게 흥분한 모습이 아닙니다. 미리 준비한 전술이라는 뜻이죠. 독일의 수비를 찢을 준비를 이렇게 확실하게 했는데 독일의 공격을 막을 준비를 못 했을 리 없습니다."
기신은 평소와 다르게 손짓 발짓에 고함을 지르며 선수들을 지휘했다.
"길수, 위치 잘못 잡았다. 조금 더 안쪽으로 움직여. 황희는 너무 뒤로 들어갔다. 다른 선수랑 수비가 겹치잖아. 앞으로 올라가."
수비에서 공격으로 바뀌자 기신은 또 고함을 질렀다.
"왼쪽 올라가는 속도가 느리다. 오른쪽이랑 보조를 맞춰. 서준이 너무 빠르게 올라간다. 좀 천천히 움직여."
기신의 말은 차범수와 김시응을 통해 거리가 먼 선수들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경기하면서도 기신의 지휘에 집중할 수 있는 선수가 둘밖에 없다. 다른 선수들에게는 자신의 지휘를 무시하고 차범수와 김시웅의 말만 들으라 미리 말해두었다.
김철범이 돌파를 하다 공을 차단당했다. 기술적인 돌파는 불가능해 속도와 순발력과 결합한 돌파를 주로 연습했다. 그러나 돌파 타이밍을 들켜 노련한 독일 수비수에게 공을 빼앗겼다.
"중원으로 집중."
기신이 외치기도 전에 차범수의 지시에 한국팀 선수들이 거리를 압축하며 중원에 집중했다. 독일의 유일한 약점으로 뽑히는 건 속도가 빠른 공격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전체적인 실력이 막강해 딱히 약점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전술이 운용 가능한 팀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공을 빼앗긴 김철범은 다시 공을 빼앗으려고 노력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신체 능력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만약 발목과 허벅지 그리고 활배근을 키우지 않았으면 몸이 서로 닿는 순간 김철범은 쓰러졌을 것이다.
그래도 김철범이 귀찮게 해서 수비수들은 공을 빠르게 처리했다. 김철범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강제로 독일팀의 템포가 빨라지게 했다. 패스가 빨라지며 갑자기 템포가 바뀌자 독일팀의 패스 정확도가 내려갔다.
독일의 수비형 미드필더는 공을 잡은 후 드리블하며 템포를 다시 늦추려 했다. 템포는 천천히 끌어올려야 한다. 지금처럼 급하게 끌어올리면 누군가 실수를 하게 된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작은 실수가 승패를 결정 지을 수 있다.
지금은 실수로 실점을 걱정하는 것보다 실수로 득점에 실패할 것을 경계하고 있다. 도르트문트에서 축구하는 황동근은 독일 선수들에게 익숙하다. 골킥이 부족하나 높은 공에 강점을 보인다. 일대일 수비도 괜찮고 안정적인 골키퍼다.
수비에는 특별한 약점이 없는 골키퍼다. 그런 골키퍼가 도르트문트에 계속 있다는 건, 특별한 장점도 없다는 뜻이다. 무난한 골키퍼다. 컨디션이 좋으면 주전이고 컨디션이 나쁘면 벤치에 앉아야 한다.
문제는 황동근의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는 것이다. 만약 공격에 거듭 실패하면 감정 기복이 강한 편인 황동근의 컨디션은 더 좋아진다. 그리고 몇몇 젊은 선수들이 조급해하고 있다. 실점 2개는 잊고 예정대로 경기를 진행해야 한다. 독일의 호흡대로 경기를 진행하면 최소 3개의 득점을 올릴 수 있다.
차범수가 공을 잡은 독일의 수비형 미드필더에게 다가가 몸싸움을 걸었다. 주장 대 주장의 대결이다. 여기에서 도망을 가거나 지면 팀의 사기가 더 떨어진다. 신장 175인 차범수의 도전을 독일의 주장은 자신만만하게 받아들였다.
독일 주장은 엉덩이 싸움에서 밀렸다. 체중은 10킬로 이상 더 나가지만 힘은 비슷했다. 거기에 어릴 때부터 실전 무술을 배운 차범수의 몸싸움 기술이 얹어지며 결국 승리했다. 공을 빼낸 차범수는 왼손으로 다가오는 독일 주장을 견제하며 앞으로 침투 패스를 찔렀다.
수비를 위해 빠르게 달리고 휴식을 취하던 김철범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김철범보다 늦게 달리기 시작한 수비수는 따라잡을 것을 포기하고 부심을 쳐다봤다. 부심의 깃발은 들리지 않았다.
김철범은 눈앞이 캄캄했다. 발에 착착 달라붙는 공만 보였다. 소리도 잘 들리지 않고 골대의 위치와 골키퍼의 위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믿을 건 감밖에 없다. 눈물을 흘리면서 수없이 했던 슈팅 훈련을 생각하며 김철범은 공을 강하게 걷어찼다.
- 작가의말
오늘 글이 빨리 써집니다. 예전에는 글 마무리할 때 막 슬프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덜합니다. 눙물을 닦고 다음 편은 조금 늦게 올리겠습니다.
Comment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