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국가대표
기신과 광고 촬영을 마친 후 차범수와 김시웅은 올림픽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다. 차범수도 그렇고 김시웅도 국내에서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어서 대표팀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부에 몸담았기에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아직 스물이 안 된 둘은 대표팀에서 가장 어린 두 선수다.
시차 적응이 필요 없기 때문에 국내에서 한 달간 훈련하고 올림픽 개막 일주일 전에 도쿄로 향한다. 대부분 선수가 이미 K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에 전술 훈련과 경기를 병행하고 있다. 거의 이틀에 한 번씩 대학팀들과 경기를 했다.
"제기랄, 꼬맹이 둘은 도대체 왜 데려온 거야? 우리랑 별다를 게 없잖아."
"그래 말이다. 영유하고 승철이 참 아깝게 됐어."
"예선전 내내 팀과 함께 고생했던 애들을 쏙 빼고 다음 올림픽에 내보내도 될 꼬맹이 둘을 들인다는 게 참 이해가 안 되네."
대학팀들과의 경기에서 차범수나 김시웅은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팀의 전술에 적응하지 못한 것도 있고 몸싸움에 대해 심판이 엄격한 것도 있어서 둘의 장점이 완전히 발휘되지 못한 것이다. 프리킥 기회도 전부 다른 선수들 차지여서 차범수는 활약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수비는 괜찮더라."
"괜찮기는 개뿔. 쩍하면 반칙을 하더구먼. 영국에서 축구를 하다 보니 애들이 기술이 없어요. 그저 몸으로 하는 축구밖에 몰라."
경기를 뛰다 보면 쉽게 흥분하고 동작이 커진다. 지금에 와서 누군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심판들이 몸싸움에 엄격했다. 그래서 차범수나 김시웅의 다소 과격한 몸싸움은 자주 반칙 선언을 받았다.
같이 고생하던 선수 두 명이 빠졌다. 그 때문에 대부분 선수들은 불만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차범수나 김시웅이 반년 전부터 들어왔다면 괜찮았을 테지만, 올림픽 개막이 40일도 안 되는 상황에서 불쑥 비집고 들어오니 좋은 소리를 듣기 어렵다.
"걔들 리그는 5월 초에 끝났는데 휴식이 필요하다고 6월 중순에야 불렀어. 우리도 시즌 중인데 사람 너무 차별하는 거 아냐?"
불만은 있지만, 굳이 그 불만을 차범수와 김시웅에게 직접 표현하는 선수는 없었다. 그저 거리를 두고 둘과 가까워지지 않을 뿐이다. 일부 코치들도 차범수와 김시웅의 능력에 의문을 표했다.
"감독님, 이 자식들 진짜 물건입니다."
김혁권은 전력분석관이다. 다만 다른 팀의 전력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팀 선수들의 기량과 컨디션 및 심리상태를 분석한다. 훈련과 경기 영상을 찍어서 보기 좋게 편집하고 유의미한 데이터를 뽑아서 정리한다.
"차범수 패스 성공률 96%, 김시웅 패스 성공률 88%, 다른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뛰어주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성공률입니다."
특히 차범수는 중장거리 패스도 적지 않게 했다. 주로 반대편 윙에게 찔러주는 긴 패스다. 다만 차범수가 화려한 드리블이나 연속 돌파와 같은 멋진 장면을 연출하지 않아 활약이 밋밋해 보인다.
"김시웅은 수비가 만점이고 공격 상황에서 올라가는 타이밍이 예술입니다."
경기의 치열함이 부족하니 김시웅도 여유가 생겨서 적절한 타이밍에 오버래핑도 시도했다. 크로스도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주 공격 루트로 삼기에는 위협적이지 않다. 어떻게든 크로스를 올린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한다.
"스파이는 뭐래?"
차범수와 김시웅에 대한 김혁권의 평가를 지켜보던 심 감독이 입을 열었다. 지금 머릿속에 고민이 가득하다. 차범수를 핵으로 하고 새로운 전술을 짜야 할지 아니면 원래 전술에 둘이 적응하게 할지 결정해야 할 중요한 시기이다.
"선수들이 불만이 많다고 합니다. 아직 애들이잖아요."
심 감독은 굳이 둘을 합류시키려 하지 않았다. 김혁권이 강하게 권유했고, 협회에서도 큰 압력을 행사하여 둘을 합류시켰다. S 그룹의 축구 장학생 신분으로 유럽에 가서 축구를 한 둘이기에 S 그룹이 협회를 통해 압박을 가한 것이다.
그래도 국내 애들보다는 좀 낫겠지 하는 생각으로 둘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영상으로 보던 것과는 달리 둘은 진짜였다. 특히 차범수는 심 감독을 놀라게 했다. 선배들이라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자 차범수는 김시웅과 함께 적절하게 움직이면서 수비에 생긴 구멍을 최대한으로 막아냈다.
"내일 경기에 둘을 선발로 내보내자. 경기 결과를 보고 최종 결정을 내리자고."
차범수를 출전시키면 수비형 미드필더를 굳이 2명을 쓸 필요가 없다. 4-2-3-1의 진형이 4-1-4-1로 변한다. 수비는 그대로인데 공격력이 강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강한 상대가 없어서 진형이 큰 의미가 없었다. 내일 붙어야 할 아르헨티나 올림픽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차범수와 김시웅을 출전시킨 후 효과를 보며 결정하기로 했다.
### 나는야 진지한 분계선 ###
유승진은 경기에 완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경기 전 감독의 폭탄 발언 때문이다.
"오늘 선발진은 이렇고, 수비 지휘는 범수가, 공격 지휘는 청수가 한다."
유승진은 차범수와 함께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경기 초반에는 아르헨티나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몇 분이 지나자 이상함이 느껴졌다. 자신이 팀에서 혼자 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수비가 안정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을 제외하고 수비 시 모두 차범수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좌측 수비수로 출전한 손현민 선배마저 차범수가 지정하는 위치를 잡고 있었다. 와일드카드를 소모하며 들어온 손현민 선배이고 국가대표 주전인데도 차범수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랐다.
"시웅아, 2번"
차범수의 지시에 김시웅의 상체가 교묘하게 움직였다. 김시웅의 무게중심이 움직이자 상대 선수는 반대편으로 드리블했다. 하지만 곧바로 중앙수비수와 김시웅, 차범수에게 포위되었다. 패스 경로도 전부 차단하여 의미 없는 드리블만 하다가 결국 차범수에게 공을 빼앗겼다.
유승진은 소름이 쫙 돋았다. 어깨로 상대를 잡아두고 엉덩이 힘으로 상대의 중심을 흔든 후 공만 빼내는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공을 빼앗은 차범수는 길게 드리블하지 않고 앞으로 길게 패스했다. 유승진은 앞으로 향하는 공이 아닌 김시웅을 바라봤다. 차범수가 공을 빼내자 차범수와 아르헨티나 선수 사이에 끼어들어서 차범수가 방해를 받지 않고 편하게 패스하도록 엄호했다.
'레벨이 다르구나.'
대학팀들과 경기할 때는 평범해 보였다. 사실 지금 모습도 평범하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여서 평범한 모습을 보이는 선수가 몇 명 없었다. 상대의 레벨이 올라가자 자신을 비롯한 몇몇은 쩔쩔매는데 차범수와 김시웅은 대학팀을 상대할 때와 똑같이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차범수의 공을 받은 이청수는 작은 동작으로 페이크를 넣은 후 차고 달렸다. 아르헨티나 수비수가 반응이 살짝 느려 몸을 돌리는 것이 늦었다. 돌파를 허용하면 위험할 수도 있기에 이청수의 팔을 잡았다.
"범수, 네가 차라."
이청수 역시 국가대표 주전이며 와일드카드로 합류했다. 경기 전 심 감독은 이청수가 차기 애매한 프리킥은 차범수에게 양보하라고 당부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위치가 아녀서 차범수에게 양보했다.
댕 하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절묘한 코스에 키퍼는 아예 반응이 없었다. 골대에 맞은 공이 다시 튕겨 나왔고 아르헨티나 수비수가 급하게 골라인으로 차 냈다. 코너킥 상황이 되었다.
양발잡이인 손현민이 코너킥을 찼다. 손현민의 공은 가까운 포스트로 향했다. 키가 작아서 상대적으로 홀대당하던 차범수가 빠르게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레이와는 다르게 차범수는 가까운 포스트를 향해 헤딩으로 슛했다.
키가 작아서 헤딩할 기회가 적다. 그래서 차범수의 헤딩 실력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헤딩 기회를 잡는 실력과는 별개로, 차범수의 헤딩 수치는 10이다. 다만 키가 자라지 않고 175에 멈추는 바람에 그 훌륭한 수치를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있었다.
코너킥을 실점한 후 맹공을 했지만, 아르헨티나는 차범수가 펼친 수비선을 제대로 뚫지 못했다. 후반전이 되어 많은 선수를 교체했다. 하지만 차범수와 김시웅은 끝까지 남아 있었고 심 감독은 후반전에 수비에 집중하라고 일렀다. 아르헨티나가 선수 교체와 전술 교체로 한국의 수비선을 두드렸지만 차범수와 김시웅의 활약, 중요한 수비 위치를 미리 선점하는 한국 수비수들 때문에 결국 경기는 1:0으로 끝났다.
### 나는야 진지한 분계선 ###
"재범이, 요환이, 재우, 너희 셋 훈련이나 팀 경기에서 차범수에게 패스를 안 하더라."
"아닙니다. 선배님."
"아니긴,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지만 너희 셋이 가장 심해."
셋은 평소 자신들을 귀여워해 주던 이청수가 부르자 또 뭘 사주려나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청수는 전에 없는 진지한 얼굴로 셋을 질책했다.
"너희들 지금 만으로 22살이잖아. 아직 어른 대접을 받기 이른 나이이긴 해. 하지만 우리는 축구 선수야. 실력으로 대접받지 나이로 대접받는 게 아니야."
"내가 코치님들과 친해서 미리 들은 건데, 팀 전술을 새로 짠다고 한다. 차범수를 핵으로 해서 수비를 굳건히 하고 반격에 5명을 투입하는 전술이다."
아직 어리다면 어린 셋은 이청수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선수야. 그런 나의 눈에도 너희 셋이 차범수에게 패스를 하지 않는 게 눈에 보일 정도야. 그럼 감독님이나 코치님들이 모르고 있을까?"
셋은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제야 이청수의 말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너희 셋이 계속 이대로 가면 주전 자리에서 밀릴 거야. 내가 차범수를 위해 이런 말을 하는 줄 알아? 국내에서 적수로나마 부대끼는 너희들을 위해서 해주는 거지. 결국, 차범수와 발이 잘 맞는, 차범수의 지휘에 잘 따르는 선수가 주전이 될 것이다."
이청수의 말은 이해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승복한 것은 아니다. 세상이 이런 이치로 돌아간다는 것은 알지만, 어린 치기에 반발심이 생겼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직업이 뭔지 알아? 유치원 선생님이야. 세상의 중심이 자긴 줄 아는 애새끼들을 어르고 달래느라 얼마나 힘드시겠어."
"차범수와 김시웅, 챔피언스리그도 뛰던 애들이야. 레알하고 3:3 비기는 경기 안 봤어? 바르셀로나에서 앞으로 10년 동안 수비를 책임질 선수라는 호세를 인터뷰한 내용 안 봤어? 노츠 카운티에 있을 때 차범수의 지휘에 따라 수비했다잖아. 무슨 뜻이냐고? 최소 10년, 길면 15년 동안 한국 국가대표의 수비 핵심은 차범수라는 말이야."
매섭게 살아난 현실감각이 셋의 치기를 박살 냈다.
"니들 차범수랑 케미가 안 좋으면 국가대표도 되기 힘들어. 어제 실력 안 봤어? 아르헨티나 애들이 차범수 앞에서 초딩되는 걸? 공 빼앗기고 심판 찾아가서 반칙이라고 징징대는 걸 못 봤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여기 와서 처음 보는 차범수를 위해서 이런 얘기 하겠냐? 다 너희를 생각해서 하는 거야. 그러니 차범수랑 가깝게 지내. 최소 경기장에서는 말이야. 내가 너희들한테만 해주는 얘기야."
와일드카드 선수 손현민과 한웅진도 몇몇 선수를 불러다 이청수와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팀의 분위기가 서서히 변해서 심 감독은 차범수를 핵으로 하는 4-1-4-1 전술로 방향을 선회했다.
허리가 강해지니 뒤가 든든해지고 앞으로 강하게 힘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 지지 않는 경기를 할 자신감이 생겼다. 심 감독은 페널티킥 훈련을 매일 반 시간 이상 진행했다. 목표로 하던 메달의 색이 슬며시 바뀌었다.
- 작가의말
다른 축구 소설들을 보면서, 선수들이 너무 과하게 유치하게 구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려서부터 축구부에서 단체 생활을 한 아이들이고, 집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삐뚤어지고 철없이 행동하는 게 이해가 안 되더군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상황을 한 번 그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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