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 DPP를 사용하다
"DPP를 하나 사용한다."
신기의 말이 끝나고 3초 후 게임기가 응답했다. 밀매꾼이 고급이라고 한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음성인식의 속도가 몹시 빨랐다.
- DPP 1을 소모 하였습니다. 간섭력이 100%가 됩니다. 캐릭터의 운명을 간섭할 절대의 문장을 말씀해 주십시오. 의미가 명확해야 하고 열 글자로 제한이 됩니다.
"감독 되어 영국으로 가라"
- 마지막으로 확인합니다. '감독 되어 영국으로 가라' 가능합니다. 이것으로 결정 하시겠습니까?
"결정"
- 운명의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간섭자께서는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볼 수 있습니다.
신기는 게임기를 통해 캐릭터 기신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기신의 소속이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으로 적혀 있는 것이다. 대영제국 놈들이 대한제국을 비하하기 위한 수작 같아서 기분이 나빠졌다.
### 나는야 진지한 분계선 ###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 때문에 신기는 게임기를 끄고 외출했다. 장 과장이 간단히 술 한잔 하자고 불러낸 것이다.
"우리 운영기획실에서 지금 대형프로젝트를 시작할라 하고 있어. 너 프로그램 좀 만져?"
"네, 과장님. 재학중에도 단기 프로젝트에 몇번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한두달안에 마스터 할 자신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상무님 라인이야. 누가 너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면 바로 나를 찾아.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 스타트 잘 떼면 너 내년에 대리가 될 수 있어."
여러가지 신변잡기들을 이야기 하며 둘은 친분을 쌓아갔다. 장 과장은 눈치 빠르게 라인을 잘타는 인물이 아니라 능력이 있어서 김 상무의 눈에 든 사람이다. 김 상무가 전무가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번에 프로젝트 하나 기획하고 있다. 대화를 통해 기신이 쓸만해 보이자 내심 김 상무의 안목이 살아있음을 감탄했다.
이튿날 기신은 인사과에 가서 사인 몇개를 하는 것으로 부서이전을 마쳤다. 운영기획실에 도착하니 정 과장이 곧바로 프로젝트 관련 문서들을 뭉터기로 건네주었다. 그것들을 검토하는데만 삼일은 족히 걸렸다.
"과장님, 제 기획안 입니다. 한번 검토 부탁드립니다."
부서를 옮기고 보름정도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기신은 완벽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만큼 새 부서에 적응했다. 장 과장은 큰 기대가 없이 기신의 기획안을 보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런 경험도 없는 애송이 주제에 이정도 퀄리티의 기획안을 만들어 낸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기 사원, 매우 좋아. 경험이 부족해서 여기저기 보완할 부분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뼈대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군. 여기에 경험자들이 살만 붙이면 되겠어. 자자, 다들 주목. 기 사원이 기획안 초고를 완성해 버리는 바람에 프로젝트 일정이 넉넉해졌다. 그래서 오늘 저녁 부서회식을 하기로 결정했으니 다들 기 사원에게 감사하도록."
다들 회식 소식에 반가움을 표했다. 주말이 아니기에 회식이라고 해봤자 맥주 한두잔이다. 술값이 덜 나가는 만큼 비싼 음식점으로 갈 수 있다. 이차 삼차도 생략이니 평소에 먹을 수 없던 비싼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늦지 않게 귀가할 수 있다. 음식을 따로 시켜 포장해가면 가족들도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야말로 환상의 회식이 아닐 수 없다.
"동생, 주말에는 뭐해? 우리 부서랑 옆에 생산관리 부서랑 함께 팀을 구성해서 주말마다 야구 하는데 생각 없어?"
회식자리에서 갓 대리를 단 삼년차 창현이 질문하자 기신은 입안의 음식을 빠르게 삼켰다. 학교를 일년 빨리 다닌 기신과 달리 재수를 한 창현은 나이가 기신보다 다섯살이 더 많다.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자격증 다 따면 그때 형님이랑 함께 운동을 하죠."
기신도 조금 의아스러운 것이 얼마전 갑자기 축구 지도자 자격증을 따겠다고 결심했다. 그만둘까 라고 생각할 때마다 축구 지도자 자격증을 따야 할 이유 수천개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은 예전부터 축구를 좋아했던 것 같다.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서라지만 축구경기를 꾸준히 관람했고 군대에 있을 때도 팀의 에이스였다.
기신의 기획안 덕분에 프로젝트는 여유있게 진행되었다. 부서의 선배들은 기신을 복덩이라고 몹시 귀여워했다. 기신이 라인을 탄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칭찬을 하는 선배들도 있지만 창현처럼 그저 기신을 좋아하는 선배도 있다.
"형님, 지금 기획안 다 끝났는데 왜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않는 겁니까?"
커피를 싫어하는 기신은 따뜻하게 데운 코코아를 들고 창현과 함께 휴게실에서 휴식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부서의 모두가 한가하게 지내자 기신은 창현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물어보았다.
"너 아직 순수하구나. 너 빼고 다 무슨 이유인지 알고 있을걸. 잘 들어봐. 지금 이 프로젝트는 상무님이 총괄이야. 목적은 상무님 전무 되기거든. 그러니 인사고과가 있기 전에 임팩트 있게 터뜨려야 해. 그래야 상무님이 전무가 될 수 있거든. 만약 이번에 안된다 해도 내년 일년동안 이 프로젝트로 성과를 쭉쭉 내면 다음해에는 무조건 성공이야."
"지금 시작해서 바로 성과를 내면 안됩니까?"
창현은 기신의 머리를 헝클었다.
"자신감은 좋은데 인사고과 전까지 반드시 성과를 낸다는 보장이 없어. 괜히 프로젝트 가동하고 성과가 나지 않으면 역습을 당할 수 있거든. 상무님이 신경써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올해 전무 못되면 내년에 모든 힘을 이 프로젝트에 쏟아부을거야. 그러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우리들도 편하게 일을 할 수 있고."
창현과의 대화를 끝내고 기신은 생각에 잠겼다. '어른'들의 세계는 참으로 복잡한 것 같다. 아무 생각없이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되는 지금의 자신은 참 복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 '생존' 하려면 자신도 어른들의 세계를 배워야 한다.
"과장님, 프로그램 설계안입니다."
눈밑이 거뭇거뭇한 기신의 얼굴과 프로그램 설계안을 번갈아 보며 장 과장은 헛웃음이 나왔다. 이 순수한 청년은 주변 상황은 개의치 않고 자기 갈길을 묵묵히 가고 있었다. 자신도 처음에는 저런 열정을 가졌는데 과장이 되고난 다음부터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다. 피곤한 얼굴과 달리 열정으로 불타는 기신의 눈을 보니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피곤해서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있는데 과장님이 자신을 째려본다 오해하면 어떡하지?'
기신이 고민끝에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올해 인사고과전에 성과를 내면 된다. 자신은 눈치가 빠른것도 아니고 아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능력으로 그 모든 '부족함'을 채워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장 과장과 김 상무가 원래대로 연말에 프로젝트 발표를 하더라도 자신은 프로그램 설계안을 통해 두 사람에게 능력을 어필할 수 있다.
"나랑 같이 상무님 만나러 가자."
김 상무의 사무실로 찾아간 장 과장은 입에 침을 튕겼다.
"상무님, 제가 목을 걸겠습니다. 저까지 프로그램 제작에 투입되면 두달안에 프로그램을 끝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실전에 투입해서 보름안에 파라미터 조절을 끝내고 두번째 달부터 성과를 내겠습니다."
김 상무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리듬있게 두드리며 고민에 잠겼다. 올해 전무가 되는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다. 올해 전무가 되면 전자쪽 사장이 교체되기 전에 그쪽으로 옮겨갈 수 있다. 그러면 전자의 사장이 될 가능성이 있다. 김 상무의 평생 소원이 S전자의 사장이 되는 것이다. 내년에 전무가 된다면 사장이 교체되고 나서 전자쪽으로 옮길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평생 전무로 지내야 한다.
올해안에는 성과를 내는게 힘들다는 생각에 연말로 프로젝트 공개를 미루었다. 물론 회사 내부에는 이미 소문이 자자하게 났지만 말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내년 전망이 더 좋다면 올해 전무가 되는 일은 회장님이 직접 방해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성공한다.
"저기,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김 상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아부를 잘하는 자들은 한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라고 한다. 장 과장과 마찬가지로 기신 역시 아부를 잘 모르는 자로 보인다. 과장 주제에 목을 걸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는 장 과장과 같은 유형의 사람인 것이다.
"사실 프로그램은 이미 다 짜놓았습니다. 설계안은 프로그램을 만든 뒤 자동으로 추출한 것입니다."
장 과장의 입이 딱 벌어졌다. 사실 기획안을 올린 후 기신은 혼자서 프로그램의 제작에 돌입했다. 회사 규정 때문에 주말에 출근을 하지 못하지만 대부분 직원들은 주말에 집에서 일을 한다. 경험이 적은 자신은 프로젝트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미리 프로그램의 제작을 시작한 것이다. 보통 이런 프로그램은 외주를 준다는 것을 모르는 기신의 실수였다.
며칠간 기신의 프로그램을 검토한 뒤 수정과 보완을 거쳐 보름도 안되어 프로그램이 초보적으로 완성 되었다. 생산관리 부서의 김 상무 라인을 탄 과장이 몰래 데이터를 제공하여 시뮬레이터를 돌렸다. 프로그램이 유의미한 데이터들을 출력하는 것을 확인한 장 과장은 기신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굴러들어왔지? 너 전무님 줄 꽉 잡고 있어. 최소 상무까지는 보장된다."
김 상무의 이름으로 발표된 운영기획실의 프로젝트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프로젝트가 출범한 두번째 달부터 생산비용 0.3%의 절감을 가져왔다. 삼년안에 지금 생산비용의 10% 절감이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예측도 있다.
프로젝트가 승승장구로 나가자 김 상무의 앞에 아무런 장애도 남아있지 않았다. 해가 바뀌면서 김 전무가 되었고 기신은 입사 이년차에 대리 직함을 달게 되었다. 기신이 이번 프로젝트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을 했는지 모르는 다른 부서의 직원들은 기신이 라인을 제대로 탔다고 생각하며 친분을 다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격조 있는 남자 기신은 그들에게 전혀 틈을 주지 않았다. 축구 지도자 C급 자격증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 대리, 혹시 골프는 배웠나?"
김 전무는 장 과장과 기신만 불러 셋이서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식사 도중 김 전무의 질문에 기신은 곧바로 대답했다.
"아직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자격증 따느라 입사한 후 아무 운동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무슨 자격증 따고 있는데?"
기신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부끄러운 상황이다.
"축구 지도자 자격증을 따고 있습니다."
김 전무는 두말않고 전화기를 들었다. 상대가 바로 받는것을 보니 갑과 을의 위치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 회장, 날세. 주말에 라운드 한번 뛸려고 하는데 혹시 생각이 있나해서 말이야. H그룹의 현 사장 그리고 L그룹 박 전무가 나오지. 시간과 장소는 이따 내가 문자로 보내줄께. 그리고 말이야, 우리 회사에 내가 아끼는 청년 한명이 있는데 말이야, 지금 축구 지도자 자격증을 따고 있어. 그러니 이 회장이 좀 편의를 봐줘. 이름하고 기타 사항은 따로 문자 보내줄께."
C급을 따고 B급을 따는데 2년의 유예기간이 있다. 하지만 강사추천을 받으면 그 기간을 1년으로 줄일 수 있다.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은 기신은 김 전무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이 자식, 대리로 승진 시켜줬을 때보다 더 고마워하네. 하여튼 이상한 녀석이야.'
- 작가의말
글이 술술 쓰이는걸 보니 이 진행이 나은것 같습니다. 이후 더 많이 고민하여 이번처럼 다시 쓰는 일을 최대한 피면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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