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사표
한국은 9월 5일 첫 라운드 경기에 쉬게 되었다. 다섯 팀이 한 조를 이루다 보니 매 라운드 한 팀이 쉬게 된다.
"승리를 의심하는 분은 없을 겁니다. 단순한 승리가 아닌 국민 여러분에게 즐거움을 드리고 희망을 드리는 경기를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상대할 팀은 미얀마지만 경기는 필리핀에서 치른다. 미얀마에 FIFA 규정에 부합하는 구장이 없기 때문이다. 잔디도 불합격이고 안전 문제도 불합격이다. 태국 혹은 필리핀에서 홈 경기를 치르는데 태국이 같은 조여서 필리핀으로 정했다.
출발 전 기신은 기자회견에서 구구절절 길게 말하지 않았다. 현재 여론은 기신에게 호의적이다. 대중은 기신의 시원한 발언에 사이다를 거듭 외치고 있다. 그러나 언론은 그 온도 차이가 무척 심했다.
S 그룹과 연결된 언론은 기신을 칭찬하기에 바쁘다. 그렇지 않은 언론은 어떻게든 꼬투리 잡으려 한다. 구단 선수들을 불러다 개인 훈련을 시키는 것을 구단에 간섭하는 게 아니냐며 트집을 잡았다. 왜 일부 구단 선수만 훈련 시켜주냐며 형평성을 따지는 기자도 있다.
그래도 멍청이는 없어 첫 원정이자 월드컵 예선 첫 경기에 나서는 대표팀에 트집을 거는 기자는 없었다. 그저 형식적으로 어떤 전술 사용할 거냐, 점수를 어떻게 예상하냐, 상대 팀에서 위협적인 선수는 누구라 생각하느냐 등으로 가볍게 끝냈다.
필리핀의 공기는 기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시원했다. 막막하게 열대라 습도가 높아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를 생각했는데 바람이 잘 불어서인지 생각처럼 갑갑하지 않았다. 시차도 크지 않아 적응이 딱히 필요 없다.
"여러분,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은 위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출사표를 던졌다. 왜 그랬는지 아는가?"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가 27세의 채운이다. 젊은 선수들 위주라 살짝 긴장한 느낌이 들었다. 팀이 질까 걱정하는 게 아니라, 국가를 대표해 경기한다는 긴장감이다. 일부 선수는 평생 국가대표가 가능하리라 생각도 해보지 않았었다.
"그건 제갈공명의 촉나라가 위나라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이기기 힘든 상대와 싸우려니 사기가 말이 아니지. 그래서 제갈공명이 출사표랍시고 나불나불 한 것이다."
기신은 선수들을 둘러보다가 웃어버렸다. 어린 축에 드는 차범수가 가장 태연하다. 김시웅은 부르지 않았다. 굳이 미얀마를 상대로 김시웅까지 부를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약한 놈들이 주둥이로 출사표를 던진다. 강자는 그저 행동으로 말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목표는 월드컵 우승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내 말에 따르면 죽을 때까지도 할 수 있는 자랑거리를 만들어주겠다."
선수들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풀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지금 풀린 긴장을 다시 조여주면 투지가 되고 자신감이 된다.
"오늘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경기 이기고 있다고, 상대가 약하다고 방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선수는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어야 할 거다. 이상."
말을 마친 기신은 밖으로 나갔다. 감독이 계속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한계가 있다. 남은 건 선수들에게 맡겨야 한다.
"범수야, 너는 감독님 잘 알잖아. 오늘 한 말 도대체 무슨 뜻이야?"
"예전에 노츠 카운티는 수비가 약했어요. 그래서 웬만한 팀은 노츠 카운티를 만나면 득점해 이길 생각을 하죠. 그래서 우리는 매 경기 힘들게 뛰었어요."
채운의 질문에 차범수가 대답했다.
"하루는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강팀의 이미지를 만들자고. 솔직히 약팀이 맨시티나 첼시 상대로 맞공격은 안 하잖아요. 아무튼, 강팀의 이미지를 만들면 경기하기 편하다는 거예요. 죽이려고 덤벼드는 상대보다 죽지 않으려고 버티는 상대가 덜 위험하잖아요."
채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이다.
"감독님 월드컵 우승, 설마 진심인 거야?"
차범수는 모든 선수의 시선이 집중된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입니다. 감독님은 항상 우승을 목표로 해요. 프리미어리그 첫 시즌에도 우승을 목표라 말했죠. 그리고 3년 만에 결국 이루셨어요."
"범수야, 그 공민훈이라는 애 어때?"
오른쪽 풀백 이진철이다. 자신의 위치 경쟁자인 공민훈이 궁금했다. 뭘 감추는 성격이 아니라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대놓고 물었다.
"민훈이 대단하죠. 내년쯤이면 팀에서 주전을 뛸 수도 있어요. 지금은 경기 경험이 부족해서 2부리그로 임대 갔어요."
"동근이는 어때?"
골키퍼 한웅진이다. 지금 일본에서 뛰고 있는 선수로 도쿄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이다. 25세의 골키퍼를 주전으로 내세워 언론의 반발을 크게 샀다.
"동근이 걔는 천재예요. 다만 우리 팀 키퍼가 괴물이라서 아마 이적할 것 같아요. 도르트문트랑 유벤투스가 이적 문의를 했어요. 지금은 민훈이랑 같은 팀에 임대 가서 주전 뛰고 있어요."
황동근은 이제 스물이다. 그런데 벌써 챔피언십에서 주전을 뛰고 있다. 임대 조항에 출전 보장이 있기도 하지만 황동근의 기술이 경험 부족을 무시할 정도로 뛰어난 것도 있다.
"이거 똥꼬가 저려서 앉아있지 못하겠네. 다른 감독님이면 설마 어린 선수를 기용할까 하겠지만 지금 감독님은 방심할 수 없잖아."
한웅진의 너스레에 선수들은 가볍게 웃었다. 긴장이 풀리고 투지는 거세게 타올랐다. 프로 선수라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호승심이 제대로 불붙었다.
"범수 형님, 오늘 잘 부탁해."
"그래, 맏형인 네가 고생 좀 해라."
"범수 형만 믿고 따라갈 테니 오늘 우리 햇병아리들을 잘 보살펴줘."
함께 올림픽 경기를 뛰었던 선수들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국가대표로 경기를 많이 뛰어 팀 화합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기신이 차출한 선수 태반이 국대 경험이 없는 초짜다. 거기에 팀 분위기를 좌우할 베테랑도 없으니 다 함께 노력해야 한다.
"감독님 말에 잘 따르면 결국 잘 될 거예요. 6년 전에 4부리그에서 강등을 걱정하던 노츠 카운티가 챔스 우승도 했잖아요."
차범수의 말에 선수들은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월드컵 우승이 아니라 4강이라도 들면 모두 영웅이 되는 것이다. 2002년 선배들처럼 평생 사람들의 존경과 호의를 받을 수 있다.
국가가 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투지가 넘치는 한국팀과는 달리 미얀마팀은 도살장에 끌려 나온 양 같았다.
골키퍼는 한웅진이 맡았다. 능력치 45로 기신의 눈에 차지 않는다. 한국은 늘 골키퍼가 말썽이었다. 평소 잘하다가 월드컵만 가면 엉망이다. 한웅진은 나이보다 경험이 많고 안정감이 있다. 나이가 어려 반응 속도도 빨라 그나마 괜찮았다.
오른쪽 풀백은 이진철이 맡고 왼쪽 풀백은 현정수가 맡았다. 중앙 수비수는 정경수와 박동춘, 리그에서도 콤비인 둘이 맡았다. 수비형 미드필더는 채운과 차범수가 맡았다. 채운은 제주의 주전으로 처음 국가대표가 되었다.
왼쪽 윙은 독일 2부리그에서 뛰는 황희, 오른쪽 윙은 프랑스 1부리그에서 뛰는 박요환이 출전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한 유재범, 공격수로 출전한 박정현까지 하면 2020년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 중 총 일곱 명이 출전했다. 한웅진, 차범수 그리고 현정수까지다.
미얀마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가 시작하자 선수들은 앞으로 뛰쳐나갔다. 채운은 공을 잡은 미얀마 선수와 강하게 충돌했다. 심판은 채운의 반칙을 불었지만 경고는 하지 않았다.
"채운, 너는 시작하자마자 강하게 몸싸움을 해. 네가 주심의 판정 수위를 빨리 알아낼수록 우리가 더 유리해진다."
채운은 기신이 경기 전에 했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능력치 47인 채운은 몸싸움에 비교해 드리블이나 패스가 부족하다. 그러나 기신은 채운의 투지와 영리함이 마음에 들었다. 카드를 받을 정도가 아닌 반칙으로 상대의 흐름을 자주 끊는다.
채운은 영리하게 몸싸움의 수위를 천천히 높여갔다. 선수들은 채운의 몸싸움을 보며 오늘 심판이 넉넉하다는 사실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강한 몸싸움으로 더욱 쉽게 우위를 점해 나갔다.
상대가 강팀이든 약팀이든 심판의 판정 기준을 빠르게 알아내서 나쁠 게 없다. 이런 면에서 채운은 유용한 선수다. 몸싸움 기술이 차범수나 김시웅보다 못하지만 반칙하는 타이밍은 예술이다. 리그에서 반칙 2위임에도 불구하고 카드는 적게 받았다.
공을 잡은 황희가 미얀마 수비수 둘을 연속으로 돌파한 후 크로스를 올렸다. 그러나 이미 미얀마의 골문 앞에는 많은 선수가 엉켜 있었다. 기신은 수첩에 황희에 대한 평가를 빠르게 적었다.
'얼리 크로스를 못 올리고 골라인 근처까지 돌파해야만 크로스를 올리는구나. 발목 유연성이 부족함.'
능력치 55인 황희가 독일 2부리그를 뛰는 이유다. 골라인까지 돌파해야 위협적인 크로스를 올릴 수 있다. 컷인 플레이도 안 되니 공격 수단이 단조롭기 그지없다.
황희의 공은 골키퍼에게 잡혔다. 비록 골키퍼의 키가 박정현보다 작지만 팔 길이까지 합치면 박정현이 불리하다. 박정현은 황희에게 엄지손가락을 빼 들었다.
기신은 차범수에게 공격을 오른쪽에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약팀을 상대할 때 빠르게 득점해야 한다. 수비에 거듭 성공하면 사기가 오른다. 흥분한 상태에서 한 번의 반격으로 득점할 수도 있다.
박요환은 능력치 55로 황희와 같다. 속도가 좀 느리고 수비 가담이 적은 게 흠이다. 차범수가 찔러주는 공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크로스를 올렸다.
박정현은 낚싯바늘을 터는 물고기처럼 몸을 털었다. 수비수가 유니폼을 꽉 잡고 있어 털어내려는 몸부림이다. 몸이 조금 가벼워진 듯 하여지자 힘껏 점프했다. 유니폼을 잡고 누르는 수비수를 떨쳐내느라 점프가 조금 늦었다.
헤딩슛을 포기한 박정현은 아크 지역으로 공을 보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한 유재범이 강슛을 날렸다. 미얀마 수비수의 몸에 맞은 공은 더 멀리 튕겨 나왔다.
"비켜."
차범수는 돌아서서 공을 쫓는 유재범에게 소리쳤다. 차범수가 이미 슈팅 준비를 마친 것을 보고 유재범은 황급히 몸을 바닥으로 던졌다. 차범수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슈팅을 완성했다.
사람 키 두 배 정도 높이로 뜬 공은 전혀 회전이 없다. 미얀마 골키퍼의 눈이 빠르게 흔들렸다. 골대까지 온 공이 갑자기 하강하면서 좌우로 흔들리기까지 했다. 몸을 던져야 할 타이밍을 잡기 힘들다.
미얀마 골키퍼는 결국 끝까지 몸을 던질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공이 골문에 들어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꽉 잡힌 듯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골키퍼의 몸이 살짝 굳자 미얀마의 문전에는 위기가 거듭됐다. 골키퍼 실수, 수비수 실수로 한국은 손쉽게 득점했다. 전반전에만 5골을 몰아넣은 한국팀은 15분의 휴식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후반전에는 채운이 내리고 종수가 출전한다. 전반전보다 더 많은 골을 넣기 바란다."
수비형 미드필더 채운을 내리고 공격형 미드필더 이종수를 올렸다. 5:0의 점수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기신은 여전히 공격 욕심을 부렸다.
"후반전 범수는 수비에 더 집중해. 그리고 황희는 반격할 때 크로스를 올리지 말고 종수나 재범이에게 패스한 다음 공격수처럼 페널티 구역 안으로 침투해. 황희 자리는 정수가 잡고. 정수에게 다시 줘서 크로스를 올려도 되고 황희한테 침투 패스를 찔러줘도 돼."
왼쪽 풀백 현정수에게 적극적인 공격 가담도 지시했다. 황희는 공을 잡으면 돌파를 하고 크로스를 올리기만 한다. 다른 선수에게 잘 패스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기신은 특별히 지시를 내렸다.
- 작가의말
지난 편 수정이 있습니다. 40개 팀이 8개 조로 나뉘는데 2위까지 3단계 예선 직행, 3위들은 점수에 따라 둘씩 단판 경기를 치러 이긴 4팀이 예선 3단계로 갑니다.
3단계는 20개 팀이 4개 조로 나뉘어 2위까지 월드컵 직행, 점수가 가장 높은 3위 둘이 홈 원정으로 0.5의 쿼터를 다툽니다.
제가 어제 컨디션이 안 좋아서 둘 다 잘못 적었습니다. 간단한 계산에 틀렸네요. 굳이 다시 안 보셔도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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