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의 유물
영국은 남극에 새로운 연구기지를 설립한다고 발표하고 곧바로 장비와 물자들을 움직였다. 기존 기지와 28킬로 정도만 떨어졌기에 기존 기지의 폐쇄 혹은 양도여부에 대한 문의가 쇄도했다. 영국은 당분간 두개의 기지를 동시에 운용하다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 원래 기지를 폐쇄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차인영은 특수부대 출신으로 평양에도 몇번이나 침투한 경력이 있는 대단한 군인이다. 민간에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군부대에서는 유명인이다. 그리고 용을 닮은 무언가를 영국이 발굴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세명의 한국인중의 하나이다.
차인영은 얇은 옷들을 겹쳐 입었다. 실제로 방한효과가 더 뛰어난지는 모르겠지만 얇은 옷들을 많이 입는것이 두꺼운 옷 하나 입는것보다 덜 춥다는 느낌이 든다. 밖에 회색옷을 입고 회색 모자를 쓴 차인영은 홀로 기지를 떠나 영국의 발굴현장으로 향했다.
길이가 일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숏스키를 타고 차인영은 움직였다. 날씨가 좋지 않아 시야가 조금 제한되어 있다. 이런 날이야말로 몰래 정찰을 가기 좋은 날이다. 맑은 날에는 영국의 감시를 피할 수 없고 너무 흐리면 정찰이 아예 안되기에 차인영은 석달동안 네번밖에 정찰을 진행하지 못했다.
'진행속도로 보면 요 며칠사이에 용의 시체를 발굴해낼 것 같단 말이야.'
차인영은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기기를 다시한번 확인했다. 단장이 영하 100도까지 문제 없다고 장담했지만 추운 기온에 전자기기들이 고장나는 장면을 여러번 목격했기에 걱정이 줄지 않았다. 게임기였던 이 기기는 자칭 세계 삼대해커의 하나라 자부하는 최세길이 심 하나 추가하는 것으로 영상촬영기능을 확보했다.
영국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위성으로 해당 지역을 감시할 수 없다. 영국이 이번 남극기지 건설에 최신형 내한소재들과 새로운 건축기법을 사용할 것이라고 미리 발표했기에 대부분 나라들은 영국의 행동에 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발굴현장과 십킬로정도 거리가 되자 차인영은 스키를 접어서 등짐에 넣었다. 발굴현장을 관찰하기 가장 불편한 위치를 찾아 움직인 차인영은 촬영기능을 켜놓고 움직임을 멈췄다. 안전제일이 차인영의 좌우명이다. 단장이 약속한 보수가 아니라면 이런 위험한 일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십여분의 시간이 흐른 뒤 게임기의 촬영기능이 꺼지자 배터리를 교체했다. 게임기 자체는 신소재를 이용하여 추운 기온에서도 작동하게 만들었지만 최세길도 미처 배터리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촬영하는 내내 배터리를 갈아줘야 한다.
발굴현장에서 환호소리가 들리자 차인영의 손이 더욱 다급해졌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작은 배터리를 교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장갑을 벗었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으니 어떻게든 장갑을 낀 채로 배터리 교체를 해야 한다.
다시 촬영을 시작한 차인영은 두눈에 힘주고 발굴현장을 쳐다보았다. 영국의 발굴단들이 서로 손뼉을 마주치며 기뻐하는 것을 보니 발굴이 큰 진전을 보인 듯 했다.
적지 않은 숫자의 밧줄들이 밑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니 아마 얼음을 다 깨고 용의 시체를 끌어올리려는 듯했다. 차인영은 조금 움직여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충동을 꾹 눌렀다. 공을 탐해 모험을 하는것은 군인의 자세가 아니다.
기중기들이 부릉거리며 육중한 무언가를 끌어올렸다. 올려진 커다란 얼음덩이를 보고 차인영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발굴단은 용의 시체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얼음덩이채로 끄집어냈다. 아마 이제부터 기계가 아닌 사람들이 직접 얼음을 제거할 것이다.
차인영은 촬영을 하면서 천천히 뒤로 움직였다. 이곳에서 얼음을 깰 지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겨갈지 아직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일단 충분한 거리를 유지해야 상대의 어떤 선택에도 안전하게 반응할 수 있다.
얼음덩이속에 용의 형태를 한 무언가가 명확하게 보였다. 햇빛이 비출때는 흰색으로 보이고 해가 구름뒤에 숨으면 그저 얼음속에 얼음이 있는것처럼 느껴졌다. 차인영은 땅속에 묻히면 화석이 되는 것처럼 얼음속에 묻히면 얼음이 되는건가 라는 의문을 떠올렸다.
뭔가 잠깐 고성이 오가더니 몇몇이 사진기를 들고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개나 되는 촬영기로 다각도 영상촬영을 시작했다. 손에 드릴과 망치를 든 자들이 매우 조심스럽게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배터리를 교체하던 차인영은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을 받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영국 발굴단의 초병들이 전부 얼음을 깨고 있는 사람들한테 집중하고 있음을 확인한 차인영은 배터리 교체를 완수하고 다시 촬영을 재개했다. 손바닥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화면으로 촬영이 제대로 되는지 확인하던 차인영의 몸은 흠칫했다.
얼음속에 갇힌 용으로 추정되는 생물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매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차인영은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작은 화면을 통해서 볼때와는 전혀 다른 위압감이 전해져 왔다. 평양의 주석궁에도 혼자 침투한 적이 있는 차인영이기에 세상 무서운 것이 없었는데 단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저 가까운 곳에서 얼음을 깨는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는데 왜 나만 이렇지? 혹시 얼음속에서 나오고 싶어서 자신을 돕는 사람은 가만 냅두는건가?'
얼음을 깨지 말라고, 용이 살아있다고 소리지르고 싶지만 차인영은 미동도 할 수 없었다. 용의 눈알이 디룩디룩 움직이고 있는데 영국 발굴단의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기로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대면서도 왜 발견을 못하는지 차인영은 답답하기만 했다.
배터리가 다 나가고 촬영기능이 멈췄다. 차인영은 미동도 못하고 눈을 뜬 채로 용을 가둔 얼음이 점점 부서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얼음의 두께가 얇아지면서 용의 몸이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차인영의 눈에는 용의 수염이 흔들거리는 것까지 똑똑히 보였다.
원래 얼음을 깨는것이 이렇게 쉬운 일이었는지 두시간도 안되어 커다란 얼음이 거의 다 제거되었다. 영국 발굴단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망치질에 전념했고 옆에서 지켜보는 자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흥분을 금치 못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늦게나마 느꼈지만 차인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퍼석 하는 소리가 삼백미터는 떨어져있을 차인영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얼음속에서 빠져나온 용이 고개를 세우고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영국 발굴단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서로 손뼉을 마주치며 기뻐하기만 했다. 사진으로 볼 때는 뿔이 없는듯 했는데 이마 중간에 흐릿한 형태의 곧은 뿔 하나가 자라 있었다.
머리를 곧게 세운 용은 입속에서 둥근 구슬을 뱉어냈다. 그 구슬은 차인영을 향해 곧게 날아왔다.
'가라. 인연자에게 인도해다오.'
차인영은 게임기를 빠르게 분해했다. 두터운 장갑을 껴서 배터리 가는 것마저 힘들었는데 그것보다 더 어려운 작업인 게임기의 분해는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해냈다. 게임기의 CPU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둥근 구슬을 넣은 차인영은 게임기를 다시 조합한 후 곧바로 스키를 타고 한국의 남극기지로 움직였다.
'더 빨리 움직여라. 나도 오래 버티기 힘들다.'
부탁인지 명령인지 구분되지 않는 소리가 차인영의 머릿속에 울렸다. 차인영은 온 힘을 다해 속도를 냈다. 몇분 지난 후 등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리며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기운이 하늘로 치솟았다. 정신없이 달리던 차인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두다리의 동작을 멈추자 그대로 눈위로 뒹굴었다.
발굴현장에서는 흰색 가루가 공중을 향해 솟구치고 있었다. 저 가루가 다시 땅에 내려오면 큰일날 것 같은 느낌이 든 차인영은 생각을 멈추고 다시 남극기지의 방향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십킬로도 달리지 못하고 하늘에서 넓게 퍼진 냉기가 땅으로 내려오자 달리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 나는야 우울한 분계선 ###
- 마지막 소식입니다. 남극에서 갑작스런 한파가 발생하여 수백의 생명이 사라졌습니다. 그중 대한민국 남극임시고찰기지의 십여명이 포함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 새로운 기지를 건설한다고 발표했던 영국은 기지건설이 아니라 거대한 무언가를 발굴하고 있었음이 폭로되어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질문에도 영국 정부는 발굴목표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 백여킬로미터이내의 모든 생명체가 갑작스러운 한파에 동시에 사망했습니다. 이들의 시계는 한국시간으로 2012년 4월 13일 오전 8시 35분에 멈춰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 남극기지의 조난자들의 유체가 23일 오늘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국가를 위해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서 혹한의 남극에서 고생하신 분들, 조국과 가족들의 품에서 따뜻하게 잠들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체와 유품들을 인계받는 자리는 유가족들과 관계자들의 통곡과 눈물로 가득했습니다. 바로 현장으로 연결하겠습니다.
### 나는야 우울한 분계선 ###
차인영의 부인 박금난은 중고장터 까페에 가입했다. 남편의 유품 중에 게임기가 있는데 팔아서 살림에 보태려는 것이다. 아들의 말로는 게임기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래도 재료값이 있으니 십만원 정도는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십만원의 가격으로 올려놓은 게임기는 사람들의 비웃음만 샀다.
- 이거 가짜임. 지금 VR 게임기 나온지 얼마 안되어 최소 백만원은 함.
- 고장났다고 하는데 수리비만 수십만원 깨질 듯. 차라리 새거 사고 말지.
- 사실 이거 기술개발비 때문에 비싼거지 재료값 만원도 안 함.
댓글창을 살펴보고 있는데 쪽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소리가 들려왔다. 쪽지를 클릭해보니 구매의사를 밝혀온 사람이 있었다.
- 안녕하세요. 게임기를 찾던 중에 중고로 내놓으신거 보고 연락 드렸습니다. 게임기 재료값 제대로 쳐드리겠습니다. 언제 거래 가능하십니까. 전화번호 남겨드리니 이 번호로 연락 바랍니다.
박금난은 곧바로 전화를 해서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지인의 충고대로 파출소와 가까운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게임기를 들고 나간 자리에서 인상이 선한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S대 다니는데 재료공학과 복수전공이라 게임기 재료가 무엇으로 되었는지 확인 가능합니다. 확인하고 값 제대로 쳐드리겠습니다."
청년은 박금난에게 양해를 구하고 게임기를 해체했다. 다 확인한 청년은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거 재료비만 해도 백만원 훨씬 넘는데요. 중고라는 점을 감안해서 백만원에 넘겨주실 수 있나요?"
박금난은 다급히 대답했다.
"십만원 정도 생각했는데 백만원이라면 제가 감사하죠."
"제가 현금을 많이 가지고 오지 않아서 근처 ATM 가서 이체해 드릴게요. 현금으로 드리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청년은 박금난을 데리고 은행에 가서 백만원을 이체해 주고 제대로 입금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게임기를 들고 떠났다. 박금난은 생각했던 금액보다 열배나 되는 금액으로 판매가 되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귀인을 만났네, 귀인을 만났어."
금액 백만원, 입금자 기신. 박금난은 이 고마운 청년의 이름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기숙사로 걸어가던 기신이 머리를 긁적였다.
"삼십만 정도만 드리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백만원 말해버렸네. 내 양심이 아직 털나지는 않았나 보구나."
- 작가의말
글 올리기 전에 네번 읽어봅니다. 글 한편한편 정성스럽게 쓰는 습관을 키우려 합니다. 글이 궤도에 오르면 삼연참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장담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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