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조선기술
- 블루 드래곤의 심장이 깨어납니다.
- 괴수를 쫓아내려는 블루 드래곤의 심장과 괴수를 잡아두려는 부러진 검이 충돌합니다.
- 정령의 힘을 가진 효천이 부러진 검과 힘을 합칩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메시지에 기신은 정신을 집중해서 부러진 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눈에 힘을 주어도 부러진 검은 얌전히 그대로 있었고 효천 역시 기신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기신은 부러진 검을 건드려볼까 고민하다 그대로 기다리기로 했다.
- 놀랍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블루 드래곤의 심장이 다시 잠에 듭니다.
- 부러진 검이 효천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효천과 영혼으로 연결된 플레이어 기신에게 역시 호감을 느낍니다.
- 부러진 검을 수습하십시오. 하지만 섣불리 손뼈와 칼자루를 분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부러진 검의 의지가 예상외로 강하여 플레이어가 손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드래곤의 심장과의 겨룸에서 부러진 검이 승리하자 메시지에 변화가 생겼다. 기신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존재가 신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정보를 전달하는 인공지능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무언가를 발견하면 관련된 정보를 검색해서 알려주는 아웃풋 정보 단말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에 손뼈를 칼자루에서 분리하는 것을 그렇게 가볍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위병이 대신 부러진 검을 잡으려 했지만 기신은 제지하고 자신이 직접 잡았다. 수백 년의 시간이면 뼈가 부서질 만도 한데 칼자루에 연결된 손뼈는 여전히 굳건했다. 부러진 검이니 검자루겠지만 30센티가 넘는 길이와 메시지 때문에 칼자루처럼 느껴졌다.
"뼈도 전부 수습해라. 이순신 장군님의 유해일 가능성이 몹시 크다. 이 부러진 검은 이순신 장군님의 것이 분명하다."
뼛조각 하나 흘릴세라 수습했고 주변의 땅을 완전히 뒤집어서 인간의 뼈로 추정되는 것들을 전부 모았다. 일본 유민 중 도자기 장인이 섬세한 손길로 직접 그 뼈들을 다시 붙였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있었지만 키가 2미터에 가까운 거한의 뼈가 다시 원래 형태로 맞춰졌다.
도자기 장인이 칼자루를 잡은 손뼈를 요구하자 기신은 고개를 저었다.
"해골이 되어서도 칼을 놓으려 하시지 않는다. 부족한 부분은 도자기로 보충해라."
도자기 장인은 뼈의 손실된 부분들을 도자기로 모양을 만든 뒤 정성을 기울여 구웠다. 모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든든하기까지 한 도자기들로 부족한 부분을 채운 후 단향목으로 만든 관에 넣었다. 그 과정이 일주일이나 걸렸고 그 사이 수많은 일본 유민들과 조선의 후손들이 찾아와서 이순신 장군님의 유해에 절을 올렸다.
일주일 동안 메시지가 몇 번 울렸다. 그 메시지들을 통해 기신은 이번 일의 연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부러진 검을 가까이에 두고 시간이 흐르면서 메시지가 점점 더 상세한 정보를 기신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부러진 검은 괴수들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실제로 당기는 그런 힘이 아니라 괴수들을 자극하는 힘이다. 부러진 검의 자극에 괴수들은 제주도로 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똑같은 자극에 괴수들이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 제주도를 떠나 원래 가려고 했던 곳으로 향한다.
효천은 기신과 영혼으로 연결되면서 기신이 삼킨 정령 구슬의 영향을 받았다. 괴수들은 정령을 선조 중의 하나로 두고 있지만 정령력이 매우 미약하다. 정령력이 약하기 때문에 정령력과 상극인 드래곤의 힘이 지키는 영국섬을 피해 간 것이다. 하지만 효천은 정령 구슬을 삼킨 신기의 육체와 항상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정령력이 매우 높아졌다.
효천이 이번 잠에서 깨며 정령력이 충분해져 부러진 검의 위치를 찾아낸 것이다. 기신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등장만을 기다린 시나리오처럼 느껴졌지만 더 이상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최선을 다하다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바로 돌아가면 된다. 돌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마지막까지 후회가 없이 살 생각이다.
두 번째 회의는 새로운 상황 때문에 제주도에서 열리게 되었다. 불러 모은 귀족들이 독립에 관한 일을 상의하는 사이 신도와 김원견 그리고 기신은 따로 회의를 열었다. 신도가 마법 물품으로 차단막을 만들어서 도청을 방지했다.
"부러진 검이 이순신 장군님이 사용했던 무기이고 거기에 깃든 의지가 괴수들을 끌어모은다는 말이구나. 확실한 것이냐?"
"확실합니다."
"손뼈와 칼자루가 분리되면 괴수들이 더 이상 제주도로 몰려들지 않는다는 뜻이구나."
"하지만 손뼈를 분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의지가 대단하여 인간 중에 그만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후작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기신과 신도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김원견이 입을 열었다.
"만약 그 칼자루의 위치를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까?"
말투로 보아서는 기신 자신에게 한 질문이다.
"괴수들이 그곳으로 몰려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설마 이 칼자루를 대한제국의 영토에 묻어두려는 것입니까?"
기신의 질문에 김원견은 고개를 저었다.
"순망치한이다. 대한제국이 망하면 우리 역시 망한다. 지금 대한제국이 허락한 우리의 땅만으로는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인구가 알아서 조절되고 자급자족이 되겠지만 그 시기가 오기 전에 우리가 패망해 버릴 수도 있다."
김원견의 말을 듣던 신도가 입을 열었다.
"후작 각하께서 고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고견이라고 할 것은 없고 명나라에 해남도라고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묻으면 어떨까 고민 중입니다."
대한제국은 아직 황하와 장강 사이의 지역들도 일부만 복구했다. 그래서 대한제국이라 하지 않고 명이라고 한 것이다. 확실히 괜찮은 생각이었지만 기신은 찜찜함을 느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괴수들이 반응하지 않으면 어쩝니까?"
기신의 질문에 김원견도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는지 고민에 잠긴 모습이었다.
"차라리 대만이 어떻습니까. 거기면 일본하고도 적당히 가깝습니다."
"대만이 어딘가?"
김원견의 질문에 기신은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한국역사도 제대로 모르는 기신이 중국의 대만이 옛날에 무슨 이름으로 불렸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지도를 가져온 기신은 대충 대만이다 싶은 위치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책에서 봤는데 이곳에 해남도보다 더 큰 섬이 있습니다. 복주랑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세상이라서 대만섬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복건성에 묻어도 된다. 굳이 더 남쪽을 고집하는 것은 절강이나 강소 같은 곳에 버리면 제주도가 괴수들의 이동경로에 놓일까 걱정되어서이다. 정확한 지도가 없어 판단을 내리기 힘들기에 최대한 남쪽으로 보내려는 것이다.
"그런데 원거리 항해가 가능한 배가 있습니까?"
기신의 질문에 김원견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북극해를 통해 대영제국에 이른 배가 바로 우리가 만든 것이네. 조선의 조선기술은 현재 세계 최강이지. 석 달이면 속도가 아주 빠른 중형선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다네."
"가는 길에 괴수들을 만나면 어떡합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네. 가시거북을 만든 기술로 거북선을 만들면 괴수들의 주의를 최소한으로 끌 수 있다네."
기신은 김원견이 자기 세계에만 빠져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우리가 부러진 검을 가지고 움직이는데요. 당연히 괴수들이 자극을 받아서 쫓아오겠죠."
한 대만 만드는 데는 석 달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함대 단위로 만들려면 석 달로 부족하다. 기신의 말에 김원견도 고민에 빠졌다. 그때 신도가 입을 열었다.
"간단하다. 이동문을 하나 가지고 그곳으로 간다. 이동문을 설치한 뒤 활성화시키고 누군가 부러진 검을 들고 그곳으로 간다."
"저 칼자루를 잡을 수 있는 건 저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잡으면 생명이 위험할 것입니다."
"자네는 중요한 사람이네. 자네 대신 칼자루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우선 확인해 보자고."
독립에 맞춰 이 계획을 성공시키면 조선은 점점 강성해질 수 있다. 제주도는 예전에 비해 훨씬 적은 괴수들이 찾아올 것이고 대한제국은 더 큰 압박을 받을 것이다. 대한제국이 갑자기 바뀐 괴수들의 패턴에 적응 못하고 있을 때 조선은 미리 준비를 하고 대비할 수 있다.
칼자루를 아무나 가져갈 수 있다면 누가 가져가든 큰 공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신기로 알고 있는 기신만 가능하다면 그 공은 신씨 가문의 차지이다. 그러면 독립한 나라의 왕이 누가 되어야 하는지는 이미 결론이 난 것이다. 김원견은 걱정하는 척 말을 했지만 사실은 그 말의 진위를 가리려는 속셈이다.
죄수 세 명의 목숨을 대가로 기신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신도와 김원견은 세부사항을 상의하기 위해 계속 대담을 했고 귀족들의 수작질에 지친 기신은 발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효천은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곁에 붙어있기에 기신은 어느새 그 존재를 크게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한참 걸어가니 일본 유민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충무비 밑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충무비는 수하가 죽기 전에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적은 비석으로 이 비석이 아니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묻혀버렸을 수도 있다.
기신이 다가오자 황급히 인사를 올린 일본 유민들이 기신에게 누구의 말이 맞는지 판정을 해주기를 원했다.
"사즉생 생즉사, 이건 죽으려고 목숨을 걸면 살고 살려고 도망치면 죽는다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님은 우리가 죽어 저들을 살리자라고 했습니다. 분명 우리가 죽어야 백성들이 살고 우리가 살면 백성들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둘의 의견은 팽팽했다. 둘 다 어느 정도 도리가 있기에 지지자들도 큰 소리로 자신이 지지하는 자를 위해 변호했다.
'일본 사람들이 조용하고 배려심이 강하다고 누가 그랬지?'
"내 생각은 이렇다."
기신이 입을 열자 모두 조용히 기신의 말을 기다렸다.
"만약 그때 장군님이 수하들과 함께 살려고 도망쳤으면 그건 죽은 거나 다름이 없다. 살아있을 의미를 잃은 자들은 죽은 자들이나 마찬가지다. 군인은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존재인데 백성들의 죽음을 외면하는 순간 군인으로서의 그들은 죽은 것이다."
"하지만 장군님은 도망을 주장하는 자들을 참수하고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는 비록 죽었지만 지금까지 수백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계시다. 내가 생각하는 사즉생 생즉사의 의미다."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특히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순신 장군의 손뼈가 칼자루를 놓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의 존경심은 더 커졌다.
"물론 내 말이 정답이라는 것이 아니다. 같은 글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누가 맞는지 틀리는지 다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며 살 거라."
말을 마친 기신은 빠른 걸음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뭔가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하드웨어에 관한 것, 프로그래밍 기법에 관한 것, 통계학에 관한 것, 이 세상에서 아직 쓰이지 않는 수학공식들 등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자신 때문에 이 세상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게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은 주도적으로 이 세상에 좋은 변화를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 세상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강한 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대한 이 세상에 도움이 될만한 일들을 해서 자신이 나쁜 영향을 끼치더라도 그것을 최소화하고 싶었다.
- 작가의말
제 글은 항상 무언가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답을 서술하는 것보다 질문을 던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나름 개그코드인데 제가 직접 언급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기가 기신의 세상에 오면서 마법사의 직관력 덕분에 매우 자연스럽게 행동합니다. 마법사의 직관력 = 무당의 신기입니다. 신기의 이름의 유래이기도 합니다. 기신은 신기를 거꾸로 해서 기신이 된 거고요. 깔깔깔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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