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달린 방패
후반전이 되자 기신은 미지의 불안을 느꼈다. 갑자기 공기가 싸늘해진 느낌이다. 물론 비수가 날아와 꽂히지는 않았다. 기신은 이 불안이 현장지휘의 경고라고 생각했다. 부족한 전술 이해 수치로 현장지휘가 조언하지 못하고 경고만 하는 것이다.
유벤투스의 흑인 중앙수비수는 이름이 라니다. 프로필 키가 2미터인 이 선수가 후반전에 공격수로 자리를 바꿨다. 유벤투스는 4-4-2 진형이 되었다. 진형을 바꾸고 중앙수비수를 공격수로 올렸지만, 유벤투스는 라인을 올리지는 않았다. 전반전과 마찬가지로 수비진과 공격진의 거리가 꽤 멀었다.
유벤투스 감독이 먼저 주사위를 던졌다. 호넨의 크로스는 위치 선정이 좋고 더 먼저 점프할 수 있는 헌터가 더 많이 헤딩한다. 그리고 라니의 수비도 절대적이지 않다. 헌터는 가끔 몸싸움에서 라니를 이기고 헤딩에 성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반쪽짜리 수비 제공권을 포기하는 대신 라니를 공격수로 역할 변경하여 공격 시 제공권을 잡기로 했다. 터너의 약점은 공중볼과 출격이다. 출격을 싫어해서 수비 범위가 일반 키퍼들보다 작다.
기신은 팀 아일츠를 벤치에 앉히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혹시나 해서 아일츠를 벤치에 앉혔다. 결국 아일츠의 골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아틀레티코가 경기를 보수적으로 운영했기에 운 좋게 기신의 결정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아일츠가 있다면 중앙수비수로 올려 라니와 제공권 싸움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일츠가 벤치에 앉아 있으면 유벤투스 감독이 이런 위험한 도박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젠장, 나는 왜 맨날 배우는 처지야.'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기고만장까지는 아니지만 기신은 자신감이 넘쳤다. 세계 최고의 리그로 평가받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일위 다툼을 하고 있었기에 이해가 안 갈 일도 아니다. 그러나 올해 리그 컵, FA컵, 리그 우승에 챔피언스리그도 결승에 가면서 오히려 위축되었다.
부단한 노력으로 수준이 높아지면서 보는 눈도 달라진 것이다.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상대의 묘수를 이젠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하룻강아지가 그만 성견이 되면서 겁을 알게 됐다.
후반 55분 기신은 엑토르를 내리고 보나비치를 출전시켰다. 엑토르가 지친 것도 있지만 기신이 늦게나마 실수를 깨달은 것이다.
"후안과 호넨을 중앙으로 집중하라고 해. 그리고 블랙과 김시웅에게 가끔 공격에 가담하라고 지시해."
라니가 공격수로 역할을 바꾸자 헌터가 제공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헌터에게는 직접 헤딩과 엑토르에게 패스하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공격이 단조로워지니 유벤투스가 마음 놓고 공격에 임할 수 있다.
전반전에도 공격이 단조로웠지만 그때의 유벤투스는 이빨이 없었다. 그래서 공격에 실패해도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라니가 공격 시 제공권을 장악하며 실점의 위기가 있다. 그래서 공격을 더욱 위협적이게 할 필요가 생겼다.
'아틀레티코도 그렇지만 유벤투스도 쉬운 상대가 아니다. 난 진짜 지금까지 운빨로 우승을 따낸 거였어.'
사실 3부리그 시절 따낸 유로파리그에 대해 기신은 큰 자부심이 있었다. 비록 선수 능력치를 보고 현장지휘의 도움을 받았지만 스쿼드도 형편없었다. 초월적인 힘의 어드밴티지를 스쿼드의 페널티로 상쇄하면 실력으로 따낸 우승컵이라 생각했다.
'딱 지금의 블랙과 같았지. 좋을 때다.'
블랙은 현재 유벤투스가 주는 압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평소 훈련하던 때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물론 예전의 기신에게도 딱 맞는 말이다.
'이런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얼마나 더 느껴야 순수한 실력으로 인정받을까.'
후안과 호넨이 중앙으로 가고 블랙과 김시웅이 오버래핑을 하자 노츠 카운티의 공격은 더 위력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기신은 여전히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선수 교체를 유벤투스보다 먼저 했기에 유벤투스의 변화에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유벤투스는 미드필더 한 명 내리고 공격수를 출전시켰다. 4-3-3으로 진형이 바뀐 것이다. 유벤투스가 공격을 강화하자 블랙과 김시웅은 공격 가담을 하지 못했다.
'완전 배 째라네. 이럴 땐 진짜 배를 째 버려야 하는데.'
살벌한 생각을 하며 기신은 끊임없이 고민했다.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괜찮은 생각을 떠올리면 좋은 기분이 든다. 현장지휘의 미약한 도움이다. 순수한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지만, 그건 일단 오늘 경기에서 이기고 나서 할 생각이다. 우선은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낀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유벤투스의 오른쪽 윙백은 오늘 많이 힘들다. 후안에게 연신 돌파를 당했고 블랙이 득점 하나에 도움 하나를 기록했다. 전부 자신의 수비 지역에서 발생한 일이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후반전 이를 악물고 뛰었다.
블랙의 어이없는 크로스는 유벤투스 골키퍼의 품에 들어갔다. 윙백은 머리를 감싸 쥐고 후회하는 블랙을 두고 빠르게 위로 달렸다. 골키퍼가 팔심으로 던진 공이 정확하게 윙백의 발밑에 배달되었다.
산시스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툭 차고 가속하는 것으로 돌파했다. 이미 카드 한 장을 받은 산시스는 감히 반칙하지 못했다. 산시스는 좌우로 이동하는 능력이 강하지만 몸을 돌리는 속도가 약점이다. 중앙에 있을 때는 괜찮은데 블랙 대신 수비를 할 때는 쉽게 돌파당했다.
돌파에 성공한 후 고개를 힐끗 들어 라니의 위치를 확인했다. 아직 헤딩하기 좋은 위치를 잡지 못하고 있다. 토마스와 거의 씨름을 방불케 하는 육탄전을 벌이고 있다. 다른 선수들도 빠르게 공격에 투입되고 있지만 노츠 카운티도 수비에 가담하는 선수가 늘고 있다.
이 상황에 반격당하면 안 된다. 나이스가 수비하러 나오자 윙백은 더 끌지 않고 크로스를 올렸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다리가 살짝 풀리면서 공이 빗맞았다.
크로스가 슈팅이 되었다. 터너가 몸을 날렸지만 공을 건드리지 못했다. 골대를 맞힌 공은 멀리 튕겨 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삐끗하면서 공에 힘이 실리지 않아 속도만 빠른 공이 되었다.
라니가 왼팔로 토마스를 밀치며 몸을 날렸다. 날렵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느리지 않았다. 터너가 미처 몸을 일으키기 전에 라니의 정강이에 맞은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유벤투스는 곧바로 오른쪽 윙백을 교체했다. 슈팅이 된 크로스를 올리고 난 후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다리 근육이 찢어진 듯 보였다.
기신은 산시스를 내리고 그레이를 출전시켰다. 그리고 블랙과 김시웅에게 수비에만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기세가 오른 유벤투스를 상대로 잠시 수비를 해야 한다. 이후 몇 분 동안 유벤투스의 전투력이 15% 정도 상승할 것이다.
유벤투스가 노츠 카운티를 향해 맹공을 펼쳤다. 헌터를 비롯한 공격수들은 중앙선에 자리 잡았다. 유벤투스의 수비진은 이들과 5미터 정도 거리를 두었다. 절대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이다. 기신처럼 근본 없는 감독을 만나 유벤투스 감독이 고생하고 있다. 수비 상황에서 공격수 세 명을 중앙선에 대기시키는 감독은 근래 보기 힘들다.
차범수의 적절한 지시로 노츠 카운티는 유벤투스의 공격을 버텨냈다. 상대가 실수로 흘린 공을 잡은 차범수는 헌터에게 패스했다. 헌터는 드리블이 안 되어 곧바로 패스하려 했지만 후안이나 호넨은 수비수를 떨쳐내지 못했다.
블랙과 그레이가 빠르게 헌터에게 접근했다. 헌터는 그레이에게 공을 패스했다. 그러나 상대 수비수가 패스하는 순간 몸으로 가볍게 부딪혀오는 바람에 패스의 방향이 어긋났다.
공을 잡은 유벤투스 선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교체로 올라온 오른쪽 윙백에게 패스했다. 블랙이 미처 돌아오지 못해 무방비가 된 윙백은 크로스를 올렸다. 높게 뛰어오른 라니가 윙백의 공을 헤딩했다.
라니의 공은 잔디에 한 번 부딪힌 후 골대 안에 들어갔다. 반응이 빠른 터너도 이런 공에는 속수무책이다. 노츠 카운티의 선수들은 주심에게 라니의 반칙을 강하게 어필했다.
토마스는 얼굴을 감싸 쥐고 일어나지 못했다. 자리싸움하는 와중에 라니가 팔꿈치로 얼굴을 가격했다. 그러나 주심도 부심도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팀닥터가 토마스의 상태를 체크한 후 교체 신호를 보냈다.
고민을 거듭한 기신은 토마스 대신 카스퍼를 출전시켰다. 블랙이 중앙수비수로 자리를 옮기고 카스퍼가 왼쪽 풀백에 자리했다. 2:2 동점 상황에서 블랙에게 왼쪽 수비와 공격을 맡길 수 없다. 전반전에 복권의 당첨 확률이 너무 높아 후반전에 벌을 받는 듯하다.
카스퍼는 영리한 선수다. 공격 가담은 항상 차범수의 지시에 따랐다. 자신이 전체적인 형세를 읽는 능력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결정권을 차범수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중앙수비수로 돌아온 블랙은 많이 차분해졌다. 본인 성격에 맞지 않는 위치지만 익숙한 위치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확히 알고 있다. 블랙은 풀백 자리에서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했다.
"나이스, 네가 앞으로 가. 내가 마지막 수비를 책임질게."
나이스는 블랙에게 환한 미소로 답했다. 블랙은 토마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모든 집중력을 수비에 쏟았다. 빠른 속도와 출중한 순발력, 점프도 잘하고 헤딩도 괜찮다. 일대일 마크는 수준급이고 집중력은 전에 없이 높다. 블랙은 중앙수비수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라니의 팔꿈치에 가격당한 블랙은 누워있지 않고 곧바로 일어났다. 일어나서 라니에게 고함을 질렀다. 아픈 척 누워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일어나서 자신이 건재함을 동료들에게 알리고 라니를 도발해야 한다.
주심도 이번에는 지켜보고 있었는지 라니에게 노란 카드 한 장 주었다. 블랙이 지속해서 도발했지만 라니는 블랙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2:2 상황이 되자 국면이 또 한 번 바뀌었다. 배 째라던 유벤투스가 슬며시 옷깃을 여몄다. 미드필더들도 수비에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이미 모든 교체를 끝낸 기신은 손을 놓았다. 모든 것을 차범수에게 맡겨버렸다.
유벤투스는 아직 교체 기회가 한 번 남아있다. 유벤투스 감독의 머리도 복잡하게 돌아갔다. 아껴서 연장전에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90분 안에 승부를 볼 것인지 머리가 복잡한 것이다.
그때 유벤투스의 공격 기회가 왔다. 간결한 패스워크로 아크 지역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러나 노츠 카운티의 수비진도 흔들리지 않고 정확한 수비 위치를 잡고 있었다. 공을 잡은 선수는 정신을 집중하여 슈팅했다.
터너는 왼손으로 공을 힘겹게 막아냈다. 손목이 공의 힘을 버티지 못해 뒤로 꺾이는 바람에 공이 멀리 가지 않았다. 유벤투스의 공격수가 빠르게 달려가 슈팅을 했다. 바닥에 갓 떨어진 터너는 미처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나이스가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공격수가 슈팅한 공은 나이스의 머리에 스치며 골라인 밖으로 나가 코너킥이 되었다. 그런데 공격수가 슈팅하느라 휘두른 발이 나이스의 머리를 걷어찼다. 심판은 급히 경기를 중단하고 팀닥터를 불렀다.
잠시 후 팀닥터가 두 팔을 교차하여 엑스자 표시를 했다. 더는 경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그때 나이스가 피를 줄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나이스의 유니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기신의 눈에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이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 작가의말
왜 결승 상대가 유벤투스냐면, 유벤투스의 유니폼이 노츠 카운티를 따라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몰락한 원조와 잘나가는 모조품의 대결이죠. 양심적으로 누가 이기는 게 맞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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