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 어른이 되다
섬까지 타고 갈 배는 이순신 호보다 조금은 작은 배인데 구식으로 만들어져서 먼 바다로 나가기 힘들어 보였다. 물론 신기의 판단이 아니라 장보고의 판단이다. 목적지로 한 섬이 멀지 않고 그 경로에 괴수가 없기 때문에 섬에 가는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신기와 함께 온 선원들이 배를 운용하고 바이올라를 비롯한 일곱의 독립군 전사들은 신기를 호위했다. 목표로 한 섬은 크기가 작지 않았다. 세 명의 선원을 남겨 배를 지키게 하고 남은 사람들은 전부 신물을 수색하는데 동원되었다. 바이올라와 독립군 전사들은 수색에 참여한 신기를 호위했다.
"각자 흩어져서 수색을 해요. 마법사님은 제가 호위할게요."
바이올라의 말에 남은 여섯 전사들은 순순히 따랐다. 둘만 남은 상황에서 신기는 불편함을 느꼈다. 바이올라가 수색은 건성으로 하며 신기를 자꾸 힐끗거렸기 때문이다.
"수색에 집중해 주었으면 좋겠다."
"원하는 것을 찾으면 마법사님은 여길 떠나실 건가요?"
"그래, 돌아가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저도 데리고 가면 안 돼요?"
신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바이올라가 신기를 뒤에서 꼭 안아주었다. 바이올라는 여자치고 키가 큰 편이지만 신기 역시 키가 큰 편이다. 바이올라는 발뒤꿈치를 들고 신기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근처에 사람이 없어요."
황량한 섬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지만 여기저기 돌무더기들이 엄청 많아서 시야를 많이 가리는 편이다. 바이올라의 입김이 귀를 간지럽히고 발뒤꿈치를 들면서 등에 부드러운 압박감을 선사하자 신기의 머리는 사고를 멈췄다.
바이올라의 왼손이 등 뒤로부터 뻗어 나와 신기의 앞섶을 헤쳤다. 두 번째 단추와 세 번째 단추의 사이로 바이올라의 손이 파고들어왔다. 보드라워 보이는 손등과는 달리 바이올라의 손바닥은 다소 거칠었다. 하지만 바이올라의 거친 손이 살갗에 닿자 신기는 호흡이 급박해졌다.
'기신에게 어른이 되는 방법을 자세히 배웠어야 했는데. 쓸데없는 정치에 관한 조언들만 들었어.'
신기는 몸을 돌리고 싶었지만 바이올라의 포옹의 힘이 예상외로 강했다. 남자 체면에 힘을 풀라고 할 수도 없어 손을 뒤로 뻗어 바이올라의 엉덩이를 만졌다. 그때 바이올라의 몸이 신기의 몸에서 조금 멀어지면서 신기의 손이 바이올라의 엉덩이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신기는 다시 손을 뻗어 바이올라의 엉덩이를 만질 수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신기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바이올라가 짧은 뼈칼로 신기의 허리를 찌른 것이다. 신기는 일단 바이올라를 제압하고 보자는 생각에 얼음의 상자 마법을 외쳤다. 하지만 마법은 발현되지 않았다.
"더러운 마법사 새끼. 이건 대주술사들이 힘을 합쳐서 만든 마나를 동결시키는 저주의 칼이다. 마법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놈이 지금까지 잘난척하는 꼴을 봐주느라 배알이 꼴렸는데 이제야 속이 시원하구나."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많이 도왔는데, 은혜도 모르는 짐승 같은 년."
"대한민국의 삼 왕자님이 화가 나셨네. 이거 무서워서 어쩌나?"
"이유나 알자. 그리고 날 어떻게 할 생각이야?"
"우리 언니는 너 같은 마법사 새끼들한테 잡혀가서 인체실험을 당했어. 나도 이동문을 통해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언니와 똑같이 비참하게 죽었을 거야. 이 세상에서 마법사라는 악마들을 전부 없애버리는 것이 내 소원이야."
"너 마나변이자였구나."
신기는 기신의 조언을 새겨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비에올라는 대영제국에서 헌터라 부르는 마나변이자였다.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었지만 신기는 왜 변이자를 헌터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궁금해졌다. 상황만 보면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인데 말이다.
"나는 내 언니가 시체로 변해서 밖에 버려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어. 그리고 수십 구의 시체와 함께 불에 타는 것도 직접 보았지. 그래서 세상의 마법사들을 전부 죽여버리려고 결심했어."
"네 언니를 잡아간 자들 전부 남자였지?"
"그래. 그런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지?"
"그냥 추측한 거야. 그럼 바로 돌아가서 남자를 전부 죽여. 남자들이 네 언니를 해쳤잖아. 그러니 남자는 전부 죽여야지. 그리고 그 남자들과 같은 머리색을 한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같은 눈 색깔을 한 자들을 전부 죽여. 그래야 네 언니 복수를 제대로 하는 거야."
신기의 말에 바이올라는 화가 더 크게 났다. 논리적으로 신기의 말을 반박하기 어렵자 악독한 말로 괴롭히고 싶어졌다.
"사실 예전에 대한민국과 연락이 닿았어. 네 생존을 알렸더니 그쪽 왕세자가 네 머리를 잘라서 보내주면 무기 5만 정에 탄약 300만 발을 지원해 주겠다고 하더라고. 왕세자가 네 형이 아니었어? 친인에게도 버림받은 멍청한 마법사 새끼야."
신기는 킬킬 웃었다. 마나가 동결되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마법사의 직관력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이 평온하다는 것은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소리이다. 비록 머리는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말이다.
"알겠다. 내 존재를 알리고 나를 보내주는 조건으로 뭔가 받아내려 했는데 그쪽에서 나를 죽이라고 조건을 내걸었구나. 하지만 내가 필요하니까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가 이젠 없어도 되겠다 싶으니 행동에 옮긴 것이구나."
"몇몇 대부족들도 참여한 게 틀림없구나. 억센 부리 부족이 만든 뼈 감옥을 거센 파도 부족이 금방 따라 했을 때 알았어야 했는데. 역시 나는 너무 게으른 것이 흠이야."
충분한 정보가 없지만 직관력이 날뛰면서 작은 사실로부터 진실을 유추해내기 시작했다. 기신의 논리적 사고로 유추해낸 결론은 검증이 필요하지만 신기의 직관력이 내린 결론은 진실에 가깝다. 가깝다고 표현하는 것은 신기의 주관적인 생각이 조금씩 가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둥이 주술사들이 갑자기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이구나. 나를 버림받은 자라고 생각해서 하찮게 본 것이구나."
부족에서 버림받은 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다. 이곳의 오래된 전통이다. 그래서 주술사들이 언젠가부터 신기에게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신의 말이 맞았어. 모든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에는 상식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했어. 내가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구나.'
"네가 처음에 엉덩이를 흔든 건 상부의 지시겠군. 너는 계획이 실패해서 나를 처단하고 싶었는데 예상외로 크게 성공하자 나를 멀리했겠지. 네 증오를 더 이상 감출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오늘 나를 직접 처리하려고 나타난 것이로군."
바이올라는 가속 능력자이다. 굳이 몸으로 신기를 유혹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바이올라는 신기에게 더 큰 절망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 일부로 몸으로 유혹했다. 원래는 한참 가지고 놀다가 찌를 생각이었는데 신기가 엉덩이를 만지자 화가 난 김에 찔러버린 것이다.
"사실 이 말이 항상 하고 싶었어. 내게 이런 기회를 주어 바이올라 너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내 몸속의 빙룡이 날뛰려 하고 있어."
얌전하게 자면서 흡수한 힘을 소화하고 있던 빙룡이 신기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자 억지로 잠에서 깨어났다. 바로 처단을 했으면 빙룡도 어찌할 방도가 없지만 신기를 생포해서 신현에게 보여주고 협상을 해야 하기에 죽이지 않았다. 덕분에 신기는 회생의 기회를 얻었다.
빙룡은 나무를 타는 뱀처럼 바이올라의 몸을 휘감았다. 바이올라는 얼어붙었지만 표면에 얼음이 하나도 없었다.
'네 마법이 추구해야 할 경지이다. 네 빈약한 상상력을 좀 많이 키우도록 해라.'
빙룡이 얼음 원소를 손발처럼 사용한다면 신기는 아직 도구처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상상력의 문제이다. 거기에 얼음 원소의 여러 가지 속성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마법을 사용하려는 노력이 없기 때문에 명확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신기가 힘들게 몸을 일으켜보니 허리의 상처는 이미 피가 멈추었다. 약한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신기는 무시하기로 했다. 우선 남은 여섯을 죽여야 한다. 그리고 마법이 회복되면 돌아가서 복수를 할 작정이다.
신기가 아픈 몸을 움직여서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올라의 몸이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극저온에서 결속력이 사라지면서 몸이 가루가 된 상황에서 얼음의 힘으로 형체를 잡아두었는데 얼음의 힘이 사라지자 몸이 분말상태가 되어버렸다.
신기가 느린 걸음으로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 독립군의 전사가 칼을 뽑아들고 빠르게 덮쳐왔다. 하지만 빙룡이 바이올라와 똑같이 얼려버렸다. 허공에서 얼어붙은 전사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고운 가루로 변했다.
"참장님, 무슨 일입니까."
급하게 달려오는 선원을 빙룡이 똑같이 처단했다. 귀밑에 상처 자국이 선명한 선원이다. 방금 전 신기는 바이올라의 몸에서 익숙한 분내를 맡았다. 신분이 낮은 여자들이 분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고 흑인 여자들이 분을 바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주 분내를 풍기던 저 자는 오래전부터 프랑스 독립군과 내통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빙룡이 한 일이었지만 이 장면을 지켜본 모두는 신기가 마법으로 해낸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은 다섯의 전사들과 일부 선원들이 배를 향해 달려갔다. 신기가 빙룡에게 저들을 처단하라고 했지만 빙룡은 신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참장님, 면목이 없습니다. 저들의 배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신기의 곁에는 장보고를 비롯해 일곱 명만 남았다. 일본 유민 출신의 선원 전부와 일부 조선 출신의 선원들이 배신을 했다. 신기의 직관력이 또 한 번 진실을 유추했다.
"대한민국에서 대마도를 수복하고 그곳을 일본 유민들에게 맡기려고 했겠지.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을 독립시킨 것처럼 말이야. 프랑스 독립군은 쪽수가 필요하니 수십만 명이나 되는 일본 유민들이 반가울 것이고. 서로 짝짜꿍이 맞았군."
일본 유민들이 대마도를 수비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프랑스 독립군과 아프리카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예전과 달리 아프리카는 물자와 마력석이 충분하다. 일본 유민들은 아프리카를 위해 마석을 가공하는 기계를 제작할 수 있으며 기술자들을 보내 이곳에 무기공장을 만들 수도 있다.
신기는 모르지만 아프리카의 주술사들이 수천 명 단위로 이동시킬 수 있는 대규모 전송술을 만들어냈다. 대지의 정령을 숭앙하는 주술사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주술로 한 번 사용하면 반 년은 쉬어야 한다. 생명체가 아닌 무기물이면 보름 정도 휴식으로 충분하다.
"그래도 처음에는 사람이 오가고 해야 하니까 분명 배나 다른 수단이 준비되어 있을 거야. 그 수단을 우리가 빼앗아야겠어."
배가 섬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신기는 장보고에게 선원들을 데리고 이상한 물건이 없는지 수색을 하라고 지시했다. 반나절이 지나서 돌아온 장보고 일행은 전부 옷이 젖어있었다.
"참장님, 이상합니다. 여기 바다 밑에도 해초 따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기는 한참 머리를 굴렸다. 더 이상 아이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 기신이 수많은 조언을 해주었으니 그 조언들을 되새기며 지금의 난관을 헤쳐나가야 한다. 성인식이 지나고 삼 년 가까이 지나고 나서야 신기는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되었다.
"이 섬이 괴수의 영역인 것 같구나. 풀 한 포기 없는 것으로 보아 5등급 괴수 활(猾)이 분명하다. 아프리카 말로는 '대지의 저주받은 정령'이라고 부르던가?"
- 작가의말
소제목은 낚시였습니다. 설마 어른의 로맨스를 기대하고 클릭하신 분은 없으시겠죠? 여기 글 읽는 분들 전부 맑고 순수한 영혼이라서 소제목을 보고 이상한 생각 안 하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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