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의미가 있는 전반전
그레이는 전반전에 지친 느낌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거의라고 한 것은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2년 전에 챔피언스리그에서 도르트문트를 상대할 때와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할 때 느껴보았다.
지금 포그바를 마크하며 전반전임에도 지친 느낌을 받았다. 몸은 아직 팔팔한데 정신적으로 피로감이 느껴졌다. 다행히 차범수의 적절한 지원 덕분에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다. 왼쪽 미드필더로 출전한 벤자민과 오른쪽 미드필더로 출전한 보나비치는 거의 공격에 투입되지 못하고 수비에 전념하고 있다.
공격수로 출전한 르노와 엑토르는 공을 몇 번 잡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몇 번 안 되는 기회에 맨유의 선수와 팬들을 놀라게 했다. 무리뉴가 헌터의 출장을 예상하고 스몰링과 필 존스, 두 명의 육체파를 내세웠다.
덕분에 르노와 엑토르 두 명의 드리블이 출중한 선수가 위협적인 장면을 몇 번이나 보여주었다. 하지만 무리뉴의 예측만 빗나간 것이 아니다. 무리뉴가 기신의 예측대로 선발진을 출전시켰다면 노츠 카운티가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리뉴는 4-2-3-1의 진형을 펼쳤다. 포그바와 마티치가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왔고 공격형 선수인 린가드가 예상외로 출전했다. 그리고 공격수는 루카쿠가 아닌 래쉬포드가 출전했다. 블랙은 드리블과 돌파에 능한 래쉬포드를 제대로 마크해내지 못했다.
더구나 산체스와 마샬 및 린가드와 빈번하게 자리바꿈을 하는 바람에 블랙은 누구를 마크해야 할지 몰라 상대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차범수와 베노의 도움으로 근근히 버티고 있다.
'강팀이면 강팀답게 힘으로 당당히 누르란 말이야. 왜 머리를 쓰고 난리야.'
출전시킬 선수가 제한적인 기신에 비교해 무리뉴는 전술 안배에서 많은 여유가 있다. 현재 선발진을 제외하고도 노츠 카운티와 팽팽하게 붙을 수 있는 선발진 하나 더 짤 수 있는 게 맨유의 스쿼드이다.
선발진에서는 비긴 셈이다. 기신은 헌터를 올리지 않은 것으로 맨유의 수비진을 힘들게 했고, 무리뉴도 루카쿠를 내리는 대신 공격형 선수 한 명을 더 투입하여 터너의 유니폼을 더럽히고 있다. 전성기의 데 헤아를 연상케 하는 터너의 반응속도에 무리뉴의 눈에 욕심이 깃들었다.
맨유가 지난 시즌에 영입한 두 윙백은 믿고 쓰는 브라질 산과 투자 성공률이 높은 스페인 산이다. 두 윙백의 끊임없는 공격 가담에 벤자민과 보나비치는 수비에만 몰두했다. 어차피 수비에 치중하라고 안배한 선발진이지만 전혀 반항을 못 하니 화가 났다.
하지만 먼저 선수를 교체하면 계속 피동적인 위치가 된다. 거기에 어설프게 전술을 바꾸어도 틈이 생겨서 상대에게 당할 수 있다. 전술 교정은 휴식하는 15분 동안에 해내야 한다. 전반전은 선수들을 믿을 수밖에 없다.
공을 잡은 산체스는 앞을 가로막는 노츠 카운티의 수비수를 가볍게 제쳤다. 선수 한 명을 제치니 또 한 명의 수비수가 앞을 막았다. 또 제치니 또 수비수가 나타났다. 공을 지켜내며 앞을 살폈지만 패스할 공간이 없다. 자신이 돌파한 두 수비수가 어느새 다른 수비 위치를 메우고 있었다.
노츠 카운티는 단단한 수비가 아닌 끈끈한 수비를 펼치고 있다. 마음을 먹으면 돌파할 수 없는 수비선은 아니지만, 돌파를 해봤자 새로운 수비선이 기다리고 있다. 빈번한 자리바꿈 그리고 드리블과 돌파 및 패스로 교란하려 했지만, 노츠 카운티의 수비진은 출렁이기만 하고 찢어지지 않았다.
산체스는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감으로 패스했다. 누군가가 그 위치에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산체스의 진정한 노룩패스를 받은 린가드는 마샬에게 침투 패스를 찔렀다. 김시웅의 순발력도 나쁘지 않지만, 패스를 예측하지 못해 마샬에게 뒤처졌다.
린가드와 마샬의 공격은 미리 준비된 게 아니라 둘의 임시 합작품이다. 그래서 중간에 호응하는 선수가 부족했다. 마샬은 오른발과 허리에 힘을 준 후 숨을 꾹 참았다. 왼발이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다 공과 부딪히는 순간 몇몇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골대와 3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사각을 노린 강슛이 쏘아졌다.
뎅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이 튕겨 나왔다. 튕겨 나온 공을 차범수가 가슴으로 트래핑한 후 오버헤드 킥으로 터치라인 쪽에 차 냈다. 마샬은 속으로 삼이라는 숫자를 곱씹었다. 이번 기회는 각이 작았지만 일대일 기회가 분명하다. 이미 세 번의 일대일이 저 미친 키퍼에게 막혀버렸다.
마샬의 일대일 기회 세 번, 래시포드도 두 번이나 터너의 선방에 막혔다. 산체스와 린가드의 아크 지역에서 날린 슈팅도 전부 터너에게 막혔다. 스로인으로 다시 맨유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무리뉴가 공격 템포를 빠르게 가져가라고 소리쳤지만 크게 소용이 없었다. 터너의 선방에 자꾸 막히자 맨유 선수들은 더욱 신중하게 공격을 했다.
"포그바, 너는 수비형 미드필더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뛰어다니기 좋아해?"
마티치가 공격을 지원하러 올라간 상황이라 포그바가 뒤에 남아있었다. 그레이는 포그바를 마크하는 임무 때문에 포그바를 따라다녔다. 이런 상황에서 르노가 수비에 참여한다.
"여긴 무대야. 나는 무대를 크게 쓰는 걸 좋아해."
애석하게도 포그바는 그레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물론 그레이에게 등을 한번 보자고 말하면 유니폼 뒤에 있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포그바는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네가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해서 팀이 실점하면 어떡해? 다 네 잘못이잖아."
"내가 위로 올라가서 팀의 공격에 공헌해 팀이 승리할 수도 있잖아. 실수를 걱정해 팬들에게 멋지고 훌륭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게 더 잘못이야."
'이 새끼 엄청 뻔뻔한 놈이다.'
그레이는 포그바의 축구 철학에 주관적인 평가를 했다. 그때 포그바의 몸이 긴장 상태로 바뀌자 그레이는 포그바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고개를 힐끗 돌렸다. 터너가 공을 잡았고 르노가 전방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레이는 포그바에게 다가가던 것을 멈추고 오히려 멀어졌다. 그리고 손을 들어 터너에게 공을 달라고 신호했다. 터너가 힘껏 찬 공은 그레이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역할이 바뀌어 포그바가 그레이를 수비했다.
키는 포그바가 10센티 가깝게 더 크다. 하지만 점프력은 그레이가 나았다. 헤딩 기회를 차지한 그레이는 르노를 향해 공을 배달했다. 착지한 그레이는 드물게 '지시'를 내렸다.
"빨리, 엑토르."
르노가 공을 멈추지도 않고 앞으로 찌르자 그레이는 말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포그바의 팔을 잡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순간 가속으로 두 수비수를 떨쳐낸 엑토르는 골대와 35미터 정도 거리가 되었지만 고민하지 않고 강슛을 날렸다.
앞으로 달려 나오던 데 헤아는 전혀 손이 닿지 않는 경로로 쏘아진 공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골대 밖으로 향하는 듯하던 공이 갑자기 누가 당기기라도 한 듯 밑으로 가라앉았다. 멋진 무회전 슛이 맨유의 골망을 갈랐다.
잠시 고민을 하던 기신은 르노에게 수비를 도우라고 지시했다. 생각 같으면 당장 제레미를 올려 수비를 강화하고 싶다. 무리뉴가 루카쿠를 올리기 전에 스리백을 미리 안정시키고 싶다. 하지만 꺼낼 카드가 많은 무리뉴를 상대로 경거망동할 수 없다.
오늘 경기에 포그바보다 마티치가 공격에 더 많이 투입되었다. 그 이유는 그레이가 포그바를 계속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대인 마크를 요즘 잘 사용하지 않는다. 노츠 카운티는 그레이의 특수성에 의해 이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 약한 자폐증을 앓고 있는 그레이는 너무 복잡한 지시를 이행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산체스의 강슛이 칸투의 다리에 맞아 굴절되었다. 몸을 날리려던 터너는 급히 왼손으로 땅을 한 번 짚으며 균형을 잡은 뒤 다시 몸을 날렸다. 터너의 손끝에 스친 공이 골대에 맞아 나왔다. 블랙은 급급히 골라인으로 공을 처리했다.
코너킥 기회가 되자 두 윙백이 뒤로 돌아가고 스몰링과 존 필스가 노츠 카운티의 진영에 진입했다. 포그바는 그레이가, 마티치는 칸투가 마크했다. 스몰링과 존 필스는 블랙과 베노가 맡았다.
기신은 김시웅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번 경기에 딱 한 번 써먹자고 약조한 전술이다. 김시웅은 차범수의 수비 구역인 아크 지역으로 향했고 산체스를 차범수에게 맡겼다.
마샬이 올린 코너킥은 먼 포스트에서 급격히 하락하는 코너킥이었다. 그리고 공간 감각이 뛰어난 산체스의 머리를 찾았다. 다만 이들이 예상하지 못한 점은, 차범수 역시 공간 감각이 무척 뛰어나다. 점프나 몸싸움 그리고 헤딩도 산체스에게 지지 않는다.
차범수의 헤딩 10의 능력치가 끝내 빛을 발했다. 키가 작고 몸무게 때문에 자리싸움에서 손해를 보다 보니 헤딩 실력을 자랑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차범수의 헤딩은 정확하게 김시웅에게 배달되었다.
김시웅은 공을 잡고 앞으로 드리블을 했다. 두 윙백은 르노와 엑토르를 마크하느라 김시웅의 앞을 막지 못했다. 몸싸움과 점프 때문에 맨유 선수들 대부분 곧바로 김시웅의 뒤를 쫓지 못했다. 오직 린가드만 김시웅의 뒤를 쫓았다.
김시웅의 드리블은 나쁘지 않다. 돌파는 부족하지만, 기본기가 탄탄해 드리블할 때 공을 멀리 차내는 일은 없다. 하지만 린가드가 빠른 속도로 따라와서 방해하자 점점 오른쪽으로 몰렸다.
맨유는 벌써 세 명의 선수가 수비로 복귀하고 있다. 거기에 린가드는 공을 빼앗으려는 생각이 없다. 그저 김시웅을 잡아두려는 생각뿐이다. 다른 선수들이 돌아가서 수비진을 다시 펼칠 때까지 시간만 끌 생각이다. 그래서 김시웅의 페이크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헤이, 슝."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김시웅은 고민도 하지 않고 패스했다. 패스하고 곧바로 전방으로 달렸다. 훈련으로 몸에 익은 패턴이다. 린가드는 김시웅을 따라 달렸다.
안정적으로 잡은 공을 그레이는 발끝으로 살짝 굴렸다. 심장이 쿵덕거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그레이에게 알려왔다. 긴장된 순간에도 그레이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관객들에게까지 들리면 부끄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발꿈치는 공의 뒷면과 일치하게, 발끝 방향은 공을 보내기 원하는 방향.'
그레이의 왼발이 정확하게 공 옆에 놓였다. 그레이는 자신의 몸에 대한 제어 능력이 뛰어나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동작이라도 정확히 해낼 수 있다. 자폐증 탓에 그 마음을 먹는 게 무척이나 어려워서 문제일 뿐.
'두 다리가 제각각인 것처럼, 오른 다리를 엉덩이 힘으로 휘두른다는 느낌.'
그레이는 크로스 훈련을 하지 않았다. 다만 훈련을 하면서 다른 선수의 훈련을 지켜보고 얻어들은 것들이다.
'발이 공과 부딪히는 순간, 회전을 원하는 반대 방향으로 발목을 비틀면서 엉덩이와 허벅지에 힘을.'
"베컴?"
기신은 그레이의 뜬금없는 공격 가담과 크로스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공의 궤적은 기신의 놀라움을 수십 배로 키웠다. 축구공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소재가 바뀌면서 사라지다시피 한 베컴의 크로스가 메도 레인에 재현되었다.
엑토르가 다리 근육들을 혹사하며 그레이의 공을 헤딩했다. 데 헤아는 3미터가량 되는 거리에서 날린 엑토르의 헤딩 슛을 엉겁결에 쳐냈다. 사지를 벌리고 두 팔을 감으로 휘둘렀는데 왼팔 상박에 행운스레 공이 맞았다.
"내꺼."
흘러나온 공은 한발 늦게 도착한 르노가 강슛으로 골대 안에 쏘아 넣었다. 흥분으로 유니폼을 벗으려는 르노를 엑토르와 김시웅이 꽉 잡았다. 그레이는 크로스를 올린 후 가만히 서서 오른손으로 자신의 심장 부위를 눌렀다. 기분 좋은 쿵쾅거림이 온몸에 전해졌다.
- 작가의말
각성한다고 해서 무시무시한 선수가 되는 건 아닙니다. 르노만 봐도 약점을 고친다고 바로 대단해지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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