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퀘스트
경기가 재개되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독일은 골키퍼를 제외하고 모두 공격에 투입했다. 차범수도 다시 수비에 투입되었다. 다만 지휘는 포기하고 그저 한 명의 수비수로 뛰어다녔다.
김시웅은 오른쪽을 든든하게 지켰다. 돌파도 많이 허용하지 않고 크로스도 최대한 방해했다. 두 선수가 퇴장당한 한국은 대부분 선수가 페널티 구역 안으로 압축되었다.
왼쪽에서 올라오는 크로스를 안정적으로 잡은 황동근은 일부러 바닥에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시간을 다만 일 초라도 끌고 싶었다. 몸을 일으킨 황동근은 공을 앞으로 길게 내 찼다. 독일의 골키퍼가 공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독일 수비수가 골키퍼의 패스를 받았다. 공을 잡은 선수를 압박하는 사람은 없다. 김시웅과 한윤 그리고 차범수를 제외한 남은 다섯 선수는 페널티 구역 안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공이 다시 흑인 윙의 발아래로 갔다. 한윤도 노란 카드 한 장을 받았다. 그래서 강한 반칙을 하지 못했다. 윙이 페이크로 한윤을 속이고 골라인 쪽으로 돌파하자 차범수도 페널티 구역으로 들어갔다. 아크 지역이 비었지만 골대 앞이 비는 것보다는 낫다.
길서준이 헤딩으로 힘겹게 걷어냈다. 체력은 이미 소진 되었고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 가쁜 숨을 몰아내고 있고 숨을 쉴 때 어깨가 크게 움직였다.
차범수가 가장 먼저 밖으로 달렸고 현기철이 그 뒤를 따랐다. 독일의 중거리 슛도 무척 위협적이다. 슈팅각을 최대한 제한해야 한다.
차범수가 각을 막자 공을 잡은 선수는 곧바로 옆으로 패스했다. 현기철은 반대쪽으로 달려서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다리가 무거운 수비수들은 제자리에서 슈팅에 대비해 몸을 날릴 준비를 했다.
대포알처럼 공이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공은 멀리 가지 못하고 궤적이 바뀌었다. 차범수가 공의 경로에 몸을 날렸다. 차범수의 머리에 맞은 공은 높은 포물선을 그렸다. 앞으로 뛰쳐나온 황동근이 공을 안정적으로 받은 후 터치라인으로 걷어냈다. 그리고 다급하게 의료팀을 불렀다.
'현장 지배.'
기신은 현장 지배를 다시 깨웠다. 차범수의 상태를 곧바로 알 수 있다. 달팽이관이 흔들려서 어지럼증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회복 능력 10답게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
의료팀은 바로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터치 라인을 타고 달렸다. 주심이 차범수에게 다가가서 상태를 확인했다.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며칠 전에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다친 차범수다. 선수의 상태가 걱정되어 모두 숨을 죽였다.
차범수가 벌떡 일어났다. 골라인까지 달려온 의료진에게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기신은 피식 웃었다. 현장 지배가 똑바로 알려오고 있다. 지금 차범수는 아직도 어지러운 상태다. 차범수는 지금 허세를 부리고 있다.
남자라면 저 정도 허세는 당연하다. 멀미하는 것처럼 어지러운 상황에서 차범수는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 팬들이 차범수의 이름을 연호했다. 독일 선수는 공을 황동근에게 던져주었다. 황동근은 공을 잡은 후 곧바로 앞으로 길게 찼다.
지금 선수들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 시간을 끈답시고 템포를 늦추면 긴장의 끈이 풀릴 수 있다. 차라리 팽팽하게 가져가다가 끊어지는 게 낫다. 체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긴장이 풀려버리면 아예 답이 없다.
그다음 슈팅은 현기철이 막았다. 독일 선수들이 현기철의 팔에 맞았다고 항의했지만 주심은 고의가 아니라 판단하고 페널티킥을 선언하지 않았다. 정경수가 그나마 체력이 남아돌아 수비의 빈틈을 열심히 메웠다.
반격 기회가 어렵게 왔다. 차범수는 앞으로 달렸다. 김시웅은 공을 힘겹게 지키다가 가까이 다가온 정경수에게 넘겼다. 정경수를 제외하면 공을 앞으로 달리는 차범수에게 보낼 힘이 남은 선수도 없다.
차범수는 공을 받기 전에 먼저 몸싸움부터 했다. 몸싸움에서 이겨서 자리를 잡은 다음 공을 받았다. 공을 받은 차범수는 골대를 쳐다보지도 않고 슈팅했다. 골키퍼는 차범수의 강한 슈팅에 잡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주먹으로 쳤다.
독일의 수비수는 빠르게 뒤로 달려 공을 다시 키퍼에게 패스했다. 미리 뒤로 달리지 않았으면 차범수가 다시 골키퍼와 일대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골키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수비수의 패스를 길게 앞으로 내 찼다. 공에 실린 힘이 대단해서 생각보다 공이 멀리 튕겨 나갔다. 수비수가 아니면 또 실점했을지도 모른다.
차범수는 다시 뒤로 빠르게 뛰었다. 아주 상쾌하다. 몸이 가볍다. 머리가 맑고 다리에는 힘이 넘친다. 문득 걱정이 들었다. 혹시 약물 검사를 하면 양성 판정을 받는 게 아닌지.
추가 시간까지 전부 소모되고 주심이 경기의 종료를 선언했다. 양 팀 선수들 모두 쓰러졌다. 한국팀만 힘들었던 게 아니다. 쫓는 입장인 독일도 무척 힘들었다. 독일은 마지막 기회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공격에 최선을 다했다. 경기가 종료되자 긴장의 끈이 끊어졌다.
- 축하드립니다. 최종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 수많은 기회 중 처음으로 달성한 위업입니다.
- 통합 퀘스트가 주어집니다.
- 순환의 고리를 끊으십시오.
기신은 영상 통화를 했을 때 자신에게 윙크하던 강아지가 생각났다.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강아지의 볼살을 거머쥐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다. 신기의 최종 퀘스트를 어떻게 완성했는지 자초지종을 알고 싶다.
그러나 아직 남은 일이 많다. 관객석의 한국 팬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한국에서 온 팬들도 있고 미국 혹은 캐나다에 거주하는 교포들도 있다. 뭐가 저리도 서러울까? 이 기쁜 날에 왜 웃음보다 울음이 먼저 나오는 걸까?
영국에서 온 팬들이 커다란 종이에 한글로 삐뚤삐뚤하게 적어왔다.
[주술사 환영하네 너희 돌아옴을]
선수들의 유니폼 교환이 끝났다. 차범수가 울먹이는 베노를 다독여주었다. 김시웅도 베노를 위안하고 있었다. 흑인 윙이 한윤과 유니폼을 교환하고 엄지손가락을 연신 추켜들었다. 황동근은 같은 팀 동료와 유니폼을 교환했다.
한국 팬들이 선수들에게 태극기를 건넸다. 선수들은 태극기로 알몸이 된 상체를 감쌌다. 따뜻했다. 경기가 끝난 뒤 몸이 식어가는 시점인데 따뜻함이 느껴졌다.
충격, 공포, 절망, 슬픔이 많은 사람을 휩쓸었다. 경악, 신앙, 희망, 환희가 많은 사람을 포옹했다. 이건 단순한 축구 경기가 아니다. 이 경기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에게 각자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한 경기다.
초월적인 힘을 얻은 건 기신뿐이다. 직접 경기를 뛴 선수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기적을 이루어냈다. 기신도 잘했지만 모든 선수가 잘해줬다. 퇴장당한 채운과 공민훈도 자기 몫을 넘쳐나게 해줬다.
팬들에게 인사를 끝낸 후 옷을 갈아입으러 휴게실로 향했다. 김철범은 구석에 숨어서 울었다. 길서준 역시 황동근을 안고 눈물을 흘렸다. 기신도 코가 자꾸 시큰해졌다. 하지만 기신은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허세다.
"자, 그만 울고 다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라. 꼬까옷 입고 우승컵 들어 올려야지."
선수들은 수건 한 장씩 주워들고 샤워하러 들어갔다. 일 분도 안 되어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샤워를 하다 말고 물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저런 철부지들을 데리고 월드컵 우승을 해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깨어났는데 군 복무 중인 막장 전개는 없겠지?'
꿈 같았다. 꿈이라면 그 시작은 군 제대일 것이다. 제대할 때 마치 꿈 같았다. 보름 정도 다시 입영하는 악몽을 꾸었다. 만약 꿈이라면 절대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
기신은 월드컵 최연소 우승 감독의 기록을 세웠다. 차범수는 월드컵 MVP로 뽑혔다. 월드컵 베스트 일레븐에 한국팀은 세 명의 선수만 들어갔다. 차범수와 김시웅 그리고 현기철이다. 우승팀치고는 조금 초라한 감이 있다.
에릭 헌터의 전화기가 불탔다. 기신과의 광고를 원하는 사람뿐 아니다. 차범수, 김시웅, 현기철, 김철범, 길서준, 황동근, 공민훈, 한윤 모두 에릭 헌터의 회사와 계약한 선수들이다. 덩달아 회사와 계약한 다른 선수도 구단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대사관의 행사도 참여해야 했고 교민들과 함께 축하 파티도 열었다. 그렇게 행사를 마치고 겨우 한국으로 돌아갔다. 협회에서 구한 전용기는 S 그룹의 전용기보다 더 비싸 보였다.
한국에 도착하니 공항이 미어터졌다. 기자만 6백 명이 왔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온 일반 팬은 2만이 넘었다. 다른 탑승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VIP 통로로 몰래 이동해야 하지만 대표팀은 그럴 수 없다.
대표팀은 그럴 수 없지만 기신은 그럴 수 있다. 코치와 선수들을 먹잇감으로 던져준 기신은 홀로 VIP 통로를 통해 은밀히 움직였다. 버지니아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차가 빠르게 움직였다.
미리 소식을 받은 가족들이 병원에서 기신을 기다렸다. 기도는 아들을 안고 울먹였다. 잘 돌봐주지 못한 아들이다. 방치하다시피 키웠는데 알아서 큰 인물이 되었다. 찜질방에서 실수로 기신이 아들이라 말했다가 인기인이 되었다.
기여운이 기신의 손을 잡고 생글생글 웃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된 기여운은 친구들과 말다툼이 많다. 그럴 때마다 우리 오빠가 대표팀 감독이고 연봉 50억이라고 말하면 필승이다. 거짓말이라고 말하면 곧바로 버지니아와 함께 찍은 인증샷을 증거로 제출했다. 연예인이 될 생각이 없냐고 기획사들이 가끔 찾아오기도 했다.
버지니아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둘째는 버지니아를 더 닮았다. 체격만 어머니를 닮은 아들 기적과는 달랐다. 기신은 미리 준비한 반지를 꺼내 버지니아에게 정식으로 청혼했다. 버지니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양 문화의 승리다.
오랜 비행을 한 기신이 피곤해할 것을 염려해 먼저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기신은 기적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기적은 동생 고추가 사라졌다고 자꾸 울먹였다. 설득하다 지친 기신은 조금 더 크면 고추가 자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해서 기적을 안심시켰다.
딸의 이름은 기연(奇姸)이라고 지었다. 이쁠 연에 버지니아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뜻도 마음에 들었고 한글도 이쁘고 한문도 멋있다고 했다. 집에 가는 도중 기적이 꾸벅꾸벅 졸았다. 아빠를 오랜만에 봐서 과도하게 흥분했다. 그래서 급격히 피로해졌다.
기적을 방에 눕힌 기신은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는 강아지 신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강아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앉음새와 눈빛에서 건방짐이 철철 흘러넘쳤다. 동정 마법사 신기가 틀림없다.
- 아아, 들리는가? 만년이 넘어서야 동정을 뗀 마법사여.
신기가 선수를 쳤다. 기신은 피식 웃었다.
"헛소리 말고, 통합 퀘스트 정보나 뱉어내. 나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어."
- 그 전에 먼저 과정을 말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너도 퀘스트를 완성할 수 있으니. 그날 꿈이 깨질 때 멍든 도마뱀이 나한테 'can not swim'이라고 말했어. 나는 뭔가 싶었지.
"노수영?"
- 맞아. 딱 니들 수준에 맞는 수수께끼였어. 뭔 뜻인지 몰랐는데 갑자기 빙의 특성을 주더라고. 그래서 감각을 확장해서 노수영을 찾았지.
신기가 제일 먼저 감지한 상대는 강아지 신기다. 강아지 신기를 통해 인연의 끈을 더듬으며 노수영을 찾았다. 찾은 노수영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러다 결국 의료팀 막내인 노수영을 목표로 확정했다.
- 아파 뒈지는 줄 알았어. 정령화를 가속했거든. 정보의 손실이 없이 넘어가려면 정령화가 필수야. 예전에는 꿈이 지켜줬지만 지금은 꿈도 깨졌잖아.
- 작가의말
마무리 갑니다. 갑자기 슬픔이 차올라서 한 편을 채우다가 선삭한 독자들이 미워서 나 한참 흉보다가 오늘 3편으로 마칩니다. 위의 문장은 그저 제가 자주 노래를 듣다 보니 귀에 익어서 저절로 나온 겁니다. 절대 노래 가사를 표절한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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