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치명적인 유혹
기신은 비행기를 타고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저녁에 영호와 맥주를 간단히 하면서 내일 만날 금창에 대해 이야기했다. 금창은 중국과 이태리 및 유럽 일부 국가들에 아주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어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축구 붐을 이용해 크게 성공한 에이전트다.
"금창이 세금 후 연봉 최소 천만으로 받아낼 수 있으니 지금 에이전트와 계약을 해지하고 자신과 계약하는 게 좋다고 하더라. 금창도 사실 대가리는 아니고 밑에서 뛰는 장기짝이지만 중국에서는 얘가 왕이야."
"요즘 환율 어떻게 되냐? 천만이면 18억이야 19억이야?"
"너 왜 배포가 아직도 그만큼밖에 안 되냐? 하긴 영국도 코딱지만 하긴 하지. 중국이나 미국처럼 큰 나라에서 살아야 돼. 그래야 나처럼 배포가 커지지. 천만 유로야."
"백삼십억?"
기신이 입가로 맥주를 줄줄 흘리자 영호는 느긋한 동작으로 휴지를 건넸다. 맥주를 닦아낸 기신의 손은 저도 모르게 맥주 잔으로 향했다.
"잠깐, 먼저 내 말을 듣고 맥주를 마셔. 내 얼굴에 뿜을 것 같다는 말이지."
최영호의 의기양양한 말투에 기신은 뭔가 더 있음을 알아차렸다.
"우리 대주주께서 힘을 쓰셔서 구단 내부의 정보를 좀 캐냈다 이 말이야. 화하 팀은 최대 3천만까지 생각하고 있단다."
390억, 아니 400억 연봉이다. 언제 10억 따위 꼬투리를 신경 썼다고 390억이냐. 기신은 두 손으로 뺨을 거칠게 쓰다듬은 후 영호에게 질문했다.
"나 맥주 몇 박스 먹은 거야? 왜 벌써 취하지?"
"두 잔째야 인마. 정신 좀 차려라."
"근데 에이전트 반드시 바꿔야 돼? 지금 에이전트가 변호사 출신이라 협상은 진짜 잘 하는데."
"중국의 구단들은 지금 졸부와 마찬가지야. 돈은 많은데 쓰는 방법을 몰라. 구단 스카우터들도 다 전문성이 하나도 없고 말이야. 괜찮은 선수나 용병을 살려면 반드시 금창을 통해야 해. 네가 금창을 제치고 협상을 하면 구단에서도 안 받아줄 거야. 당분간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되거든."
"일개 에이전트가 왜 이렇게 위세를 부리는 거야?"
"호가호위. 지금 축구에 투자하는 자들은 다 축구팬으로 유명한 중남해의 최고지도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야. 자기 구단이 챔스 우승이라도 하면 사업 허가나 여러 가지 일들에 푸른 등이 켜진단 말이야. 매년 2천억에 가까운 돈을 구단에 쏟아붓는 게 바보 같지? 쟤들은 그 이상의 이익을 뽑아낼 수 있으니까 그러는 거야."
"중국에서 내 평가는 어때? 솔직히 나 같은 애송이한테 3천만 유로를 투자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
"중국 국대 감독 리피 알지? 리피 연봉을 지불하는 게 축구 협회가 아니라 광주 에버그란데 팀이야. 자기 팀 감독으로 데려왔다가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며 대표팀 감독 자리에 앉혔지. 연봉은 그대로 구단에서 지불하고. 하북 애들도 지금 광주 애들을 흉내 내려는 것이야. 그리고 높은 분이 공식 석상에서 중국에도 저런 훌륭한 감독이 나왔으면 좋겠다 고 한마디 했어."
기신이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껌뻑이자 영호는 기가 차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축구 감독이라는 새끼가 어떻게 나보다 더 축구에 관심이 없어요. 리피가 예전에 아챔 우승 두 번 했잖아. 그래서 아시아 축구를 잘 안다고 대표팀 감독이 된 거야. 지금 화하 팀이 리그 4위야. 만약 네가 남은 반시즌안에 우승을 해내거나 내년 아챔 우승을 하면 네가 대표팀 감독이 되는 거지. 특히 너는 현장지휘를 잘 하고 젊은 선수들을 잘 키우는 걸로 소문이 났거든. 그래서 중국 구단들이 너를 잡으려는 거고. 다른 구단들은 감독이 그나마 잘하고 있어서 하북 애들처럼 긴박하지 않은 거야. 반년 뒤면 3천만 유로보다 더 받을 수도 있어."
반년 뒤면 마법의 시간이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리그 경기 수가 30경기밖에 되지 않는 중국에서 감독 생활을 하는 게 마법의 시간을 늘리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어릴 적 꿈이 400억 연봉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특별 분기점이어서 DPP가 간섭을 못한다. 그래서 기신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던 '어릴 적 꿈'이 점차 옅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400억이라는 마법의 숫자에 정신이 팔린 기신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 나는야 이상한 분계선 ###
신기는 게임의 작동을 멈추고 게임기를 이불 위로 내팽개쳤다. 경기에서 패배하여 다시 로딩했을 때 캐릭터 기신은 항상 새로운 인원과 전술로 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465번의 기회를 썼지만 결국 중국 구단과 3천만 유로로 계약을 하는데 동의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한 것은 아니지만 도움말에 의하면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더 이상 캐릭터 기신에게 어떠한 간섭도 하지 못한다.
마지막 DPP로 다시 영국으로 보낼 가능성도 없다는 뜻이다. 심란해진 기신은 게임의 작동을 멈추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데 이번에도 계약에 동의하면 정들었던 캐릭터 기신과 헤어지게 된다. 암시장에서 새로운 게임기를 구매하여 게임을 할 수도 있지만 신기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게임기를 잘 감춰둔 후 신기는 기분을 풀려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 영국에서 유학생들을 확인하러 손님들이 왔다. 하지만 신기가 고대하던 금발 벽안의 미소녀는 없었다. 어차피 3학년부터 유학이 가능하기에 신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라 이내 관심을 끊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온 엘리사라고 합니다.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 가네요. 혹시 손님들을 위한 별채가 어딘지 알고 계시나요?"
"그럼요. 저기 보이는 건물이 도서관이거든요. 도서관에서 서쪽으로 십분 정도 걸으면 별채가 보입니다."
엘리사는 금발 벽안은 아니지만 곱슬머리에 건강한 느낌을 주는 라틴계 미녀이다. 특히 몸매는 마법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비교할 바가 아니다. 엘리사는 생글생글 웃으며 신기에게 도움을 청했다.
"또 신기 씨처럼 마음씨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폐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안내 부탁드려도 될까요?"
신기는 고개를 끄덕인 후 엘리사를 별채까지 안내해 주었다. 엘리사는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신기에게 보답으로 차 한잔 대접하겠다고 말했다. 엘리사의 방에 들어가니 짙은 차향이 느껴졌다. 평소에도 차를 즐기는 여자라고 신기는 가볍게 지나쳤지만 엘리사가 마법 아카데미에 도착한 것이 어제라는 생각을 했으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차와는 다른 대영제국의 홍차를 음미하며 신기는 음흉한 생각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 기회에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신기에게 엘리사가 질문을 해왔다.
"신기 씨, 게임기의 배터리를 교체한 적이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꽤 오래 썼는데도 배터리가 아직도 남아있더군요. 대영제국의 기술력에 탄복했습니다."
"그럼 게임기는 어디에 있나요?"
"침대 밑에 숨겨두었죠. 가는 실로 걸어서 두었으니 모르고는 쉽게 못 찾을 겁니다."
### 나는야 이상한 분계선 ###
기신은 게임기를 벗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만남은 이 호텔의 커피숍에서 하기로 했다. 만남까지 반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새벽에 오줌을 누러 일어났다가 지금까지 밥도 굶으며 게임을 했다.
매번 저 장면에서 게임이 멈춘 뒤 최근 저장시점을 로딩하겠냐고 나온다. 다시 로딩을 하면 엘리사가 게임기 배터리를 교체한 적이 있냐고 질문을 한다. 신기는 매번 똑같은 대답을 하고 저 네 마디의 대화가 끝나면 다시 최근 저장시점을 로딩하겠냐고 질문한다.
923번인가 하는 숫자가 1로 바뀌자 기신은 게임을 중지했다. 마지막 기회까지 실패하면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멍하니 앉아있다 보니 약속시간이 15분 남았다. 400억 연봉이 걸린 일인데 게임에나 신경 쓰는 자신이 찌질해 보였다.
"그래, 마지막 기회를 써버리고 협상에 집중하자."
게임기를 다시 뒤집어쓴 기신은 최근시점을 로딩하겠냐는 질문에 예를 선택했다. 화면이 검은색이 되더니 엘리사의 질문이 들려왔다.
"신기 씨, 게임기의 배터리를 교체한 적이 있나요?"
3인칭 시점이 아닌 1인칭 시점이 되자 기신은 당황했다. 광대가 툭 튀어나오고 아랫입술이 유난이 두툼한 엘리사는 그전에 보던 엘리사가 아니었다. 몸매는 여전히 출중하지만 얼굴은 기신의 심미관에 심히 거슬렸다.
- 정신 공격에 노출되었습니다. 치유능력이 발동됩니다. 2등급 치유능력 복구가 발동되어 플레이어 기신의 정신을 복구합니다.
- 복구에 성공하였습니다. 상대방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신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플레이어 기신의 정신이 파괴됩니다. 치유능력이 정신을 복구합니다.
- 오십 번째 복구에 성공하였습니다. 마녀의 집중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신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치유능력이 정신을 복구합니다.
- 백 번째 복구에 성공하였습니다. 상대방이 모든 힘을 짜내어 정신 공격을 합니다. 훌륭합니다. 플레이어 기신은 유럽 최고의 마녀 엘리사의 정신 공격을 이겨냈습니다. 마녀 엘리사가 충격으로 혼절합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기신은 반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열일곱 살의 신기의 모습이 보였다.
"제길, 뭔가 이상하다 했어. 영국에서 축구 감독이 되는 어릴 적 꿈? 내 꿈은 핑클 누나들이랑 결혼하는 거였어. 누구랑 할지는 끝내 결정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그때 엘리사의 곁에 투명한 구슬 하나가 보였다. 기신은 허리를 숙여 그 구슬을 주었다.
- 정령의 구슬을 획득했습니다.
- 마녀의 비밀을 파헤쳤습니다. 마녀는 특이 정령과 계약을 한 정령술사입니다.
- 마녀와 계약을 한 어둠의 정령이 정신 공격에 실패하며 소멸되었습니다. 정령석을 복용하면 언젠가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습니다. 복용을 권해 드립니다.
정령석은 주먹만큼 컸지만 입에 가져다 대자 쑥 빨려 들어갔다. 정령석을 복용한 기신은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기신은 겁쟁이는 아니지만 비교적 신중한 성격이다. 유리처럼 보이는 물건을 먹으려고 했다는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별채를 나온 기신은 몇 걸음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는데 가장 위에 대한제국 마법 아카데미라는 글씨가 쓰여있었다. 마법 아카데미는 한글이지만 대한제국은 한문이었다.
대한제국(大漢帝國)이라는 네 글자가 기신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지금까지 게임을 하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고 생각했다. 평양이 수도였고 김씨 가문도 있었다. 그래서 다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조선이 강해진 게 아니라 중국에 먹혔을 가능성이 더 크다.
기신은 도서관에 가서 지리와 역사에 관련된 책을 빌렸다. 세계의 진실을 확인한 기신은 기가 막혔다. 단순히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세상에 와 버렸다. 괴수의 침공으로 지금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가 대영제국, 대한제국, 러시아, 캐나다, 노르웨이, 스웨덴, 폴란드뿐이다. 그중 북유럽 삼국은 생존이 힘들어서 서로 왕실의 통혼을 통해 하나의 국가로 합쳐지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대한제국은 다섯 개의 수도가 있었다. 제일수도는 북경이고 평양이 동수도, 서안이 서수도, 낙양이 남수도이고 북수도는 몽골의 땅에 있는 투라하라는 곳이었다. 영토는 러시아가 가장 크고 마법력은 대영제국이 일등이며 군대는 대한제국이 가장 많다. 역사에 관련된 책을 몇 권 빌린 기신은 신기의 방에 도착하여 탐독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대한제국의 공식 문자는 한문이지만 가장 많이 쓰는 문자는 한글이었다. 그것도 현대의 한글이어서 독서에 아무 지장이 없었다.
- 작가의말
400억의 유혹과 마녀 엘리사의 육혹, 어느 혹이 더 큰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둘 다 저랑 상관없는 일입니다. 제 소원은 그저 핑클 누나들이랑 결혼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점은 제가 우유부단한 성격이라 아직도 누구 하나를 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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