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지배
김철범의 공은 골키퍼의 머리 위로 지났다. 무게 중심을 낮추고 양쪽과 가랑이까지 염두에 두던 골키퍼지만 머리 위는 생각도 못 했다. 뒤늦게 반응하고 팔을 허우적거렸으나 공은 이미 지나갔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황희가 달려가서 김철범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캄캄한 상황에 빠져있던 김철범은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김철범은 급하게 숨을 몰아 쉬웠다. 심장이 강하게 펌프질하며 산소를 달라고 재촉했다.
김철범은 골이 되었음을 알았다. 뭐라 형언하기 힘들다. 그저 자신이 골을 넣었음을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지 않았음에도 알게 되었다. 더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다. 김철범은 머리를 젖히고 하늘을 향해 크게 포효했다. 삼 년 가까이 한 고생이 달게 느껴졌다.
한국팀은 바로 교체를 진행했다. 유재범을 내리고 채운을 출전시켰다. 채운과 김시웅이 좌우로 달리고 차범수가 앞뒤로 달리면서 수비를 강화했다. 공격 상황에서 차범수가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움직이며 공격력도 강화했다.
독일 감독은 자신의 안이함을 후회했다. 한국을 상대로 스리백을 내세우는 게 가장 안정적임에도 불구하고 4-2-3-1을 고집했다. 결승전에서 선수들이 가장 익숙한 진형을 사용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첫 골은 프리킥이고 두 번째 골은 코너킥이다. 세트피스 상황은 약팀이 강팀을 상대할 때 가장 유효한 득점 수단이다. 실점 2개를 했지만 많이 긴장하지 않았다. 안정적으로 경기하며 한국팀의 약점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30분 정도 시간에 약점을 최대한 파악하고 그때부터 발동을 걸 생각이었다.
약점 하나를 발견하고 공격하면 상대도 그 약점을 발견하고 전술 변화나 선수 교체로 약점을 없앤다. 그러면 새로운 약점을 찾는데 또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 독일은 경기 초반에 이곳저곳 두드려보며 최대한 약점을 찾아낸 후 그 약점들을 번갈아 가며 이용한다.
당하는 팀은 자신의 약점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다. 설사 알아내고 그 약점을 없앴다고 해도 다른 약점을 이용할 수 있다. 무적의 전차 군단이 늘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비결이다.
그러나 30분이 채 안 되어 세 골을 실점했다. 그리고 기신은 곧바로 선수를 교체했다. 30분에 가까운 시간의 노력이 무의미해졌다. 수비형 미드필더 채운이 교체로 출전하며 한국팀의 수비는 다르게 바뀌었다.
이제 독일팀에 남겨진 선택은 하나밖에 없다. 강한 공격을 거듭하는 것이다. 약점이고 뭐고는 천천히 생각하고 일단 힘으로 밀고 올라가야 한다. 약점을 찾는 일은 벤치에 앉은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범수야, 상대 리듬보다 조금 빠르거나 느리게 해. 못살게 굴어."
차범수는 경기장 상황을 읽는 데 능숙하다. 같은 팀 상대 팀 가리지 않고 전체적인 흐름을 읽는다. 독일의 흐름이 거세지자 선수들에게 중앙에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공민훈과 한윤이 양쪽을 지키고 남은 선수들은 중앙으로 모였다.
황동근은 높은 공을 처리하는 데 강점을 가진다. 양쪽의 높은 크로스는 황동근과 길서준 그리고 박동춘이 주로 걷어냈다. 김시웅과 채운이 좌우 풀백에 협력 수비를 하며 크로스는 허용해도 돌파는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공이 중간에 오면 중앙에 빽빽하게 모인 한국팀 선수들 때문에 패스 워크가 쉽지 않았다. 드리블해도 매우 신중하게 대처해 돌파가 어려웠다. 한 명을 돌파해도 바로 다음 수비수를 상대해야 할 정도로 한국팀의 협력 수비가 좋았다.
"다 앞으로 달려. 수비선을 계속 바꾸면서 독일 애들이 적응 못 하게 만들어."
반격 기회가 오자 기신은 힘껏 소리 질렀다. 차범수의 지휘로 수비 라인을 계속 올리고 내리며 독일 선수들에게 늘 낯선 수비진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차범수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지휘했다. 기신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비진을 중앙선 근처까지 올린 후 5분 정도 압박 수비를 했다. 그러다 수비진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한국팀의 수비진이 계속 변화하며 독일 선수들에게 새로운 판단을 요구했다. 그 작은 차이가 전체적인 공격 템포를 늦춰버리며 충분한 대비 시간을 벌었다.
베노가 올린 얼리 크로스를 황동근이 잡았다. 예상하지 못한 크로스라 미처 누구도 소리치지 못했다. 그래서 황동근과 길서준이 서로 부딪혔다. 둘이 바닥에 쓰러지자 기신은 고함을 질렀다.
"일어나, 빨리 일어나. 얕보이지 말라고."
길서준은 허리를 튕기며 멋지게 일어났다. 황동근은 천천히 일어서며 허리를 돌렸다. 아무 이상도 없자 한 손을 들어 올려 무사함을 알렸다. 주심이 의료팀을 부를 것인지 질문했다. 황동근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 문제 없다고 대답했다.
한윤은 상대의 페이크에 속아 돌파당했다. 경기 전에는 이번 경기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오른쪽 풀백인 공민훈에 비해 이번 월드컵에서 보여준 것이 너무 적었다.
그러나 정작 경기가 시작하자 모든 잡생각이 다 날아갔다. 그저 경기에서 이기고 싶다는 생각만 남았다. 빠르게 몸을 돌린 한윤은 몸을 던졌다. 고개를 들고 크로스 타이밍을 재던 독일 선수는 한윤의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
한윤이 공을 먼저 건드렸기에 심판은 스로인 판정을 내렸다. 채운이 다가와 한윤의 머리를 툭 쳤다. 수비를 하며 많이 달리다 보니 숨이 가빠서 선수들의 말수가 점점 적어졌다. 차범수와 김시웅만 여유를 잃지 않고 선수들에게 틈틈이 지시를 내렸다.
팔심으로 던진 공은 페널티 구역 안까지 날아갔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황동근은 출격 시기를 놓쳤다. 길서준이 최대한 점프했으나 독일 선수의 헤딩을 방해하지 못했다. 공에 힘이 붙지 않아 헤딩은 느릿했지만 황동근이 미처 건드릴 수 없는 사각으로 향했다.
그때 김시웅이 불쑥 나타나 헤딩으로 공을 걷어냈다. 골이 될 공이 코너킥이 되었지만 독일 선수들은 크게 아쉬워하는 표정이 없었다. 전차 군단의 선수들은 전차의 부품처럼 정밀하게 움직이기만 할 뿐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다.
먼 포스트를 노리는 코너킥을 황동근이 주먹으로 쳐냈다. 독일 선수와 부딪혀서 바닥에 쓰러졌지만 아주 빠르게 일어섰다. 덕분에 아크 지역에서 쏘아 올린 공을 손끝으로 건드릴 수 있었다. 황동근의 손끝을 스친 공은 크로스바에 맞은 후 골라인을 넘어 코너킥이 되었다.
독일팀의 코너킥은 이번에 가까운 포스트를 노렸다. 먼저 유리한 자리를 차지한 차범수가 헤딩으로 골라인 밖으로 걷어냈다.
"철범아, 중앙선에 서 있어. 뒤로 가지 마."
김철범은 자꾸 상대에게 코너킥을 주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기신은 김철범에게 자기 위치를 지키라고 소리쳤다. 세 골 앞섰지만 아직 불안하다. 수비를 아무리 잘하고 실수를 안 해도 실점할 수 있다. 첫 경기에서 유재범이 넣은 골처럼 어쩔 수 없이 한 슈팅이 골이 될 때도 있다.
출격한 황동근이 코너킥을 쳐 냈다. 공의 궤적을 정확히 판단한 차범수는 빠르게 달려가 공을 앞으로 힘껏 차 냈다. 뒤늦게 달려온 독일 선수가 공을 향해 슬라이딩 태클을 했다. 공이 떠난 후 독일 선수의 발은 차범수의 발목을 가격했다. 차범수는 바닥에 넘어졌다.
김철범이 공을 잡고 앞으로 돌진하자 주심은 경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공격 측에 유리한 상황이다. 김철범은 아크 지역에 도착하자 슈팅을 했다. 정교한 드리블이 불가능한 김철범이기에 한 번만 더 드리블하면 슈팅각이 오히려 작아질 수 있다.
김철범의 슈팅을 쳐낸 골키퍼는 의료팀을 불렀다. 경기 초반에 다친 손가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반대로 차범수는 벌떡 일어나 절뚝거리면서도 의료팀을 거부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우리는 강하고 상대는 약하다."
선수들은 천천히 걸어서 코너킥을 차러 올라갔다. 김철범은 화가 난 듯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주 잘 찬 공인데 상대 골키퍼에게 막혀서 화가 난 것 같았다. 기신은 선수들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강하고 상대는 약하다."
후보 선수들과 의료팀도 소리를 질렀다. 교체된 유재범의 목소리가 유독 컸다. 전반전 30분만 뛸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독일팀의 일관된 전략을 눈치챈 기신이 처음 30분과 남은 15분에 다른 전술을 준비했다.
기신은 차범수의 프로수준이 7밖에 안 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지금 전반전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큰 부상이 아니면 15분 휴식할 때 치료를 받아도 된다. 그러나 독일팀 골키퍼는 통증이 느껴지자 곧바로 의료팀을 불러 진단을 받았다.
월드컵이 끝나면 구단으로 돌아가 구단을 위해 경기를 뛰어야 한다. 프로 선수에게 몸이 곧 재산이고 밑천이다. 그러나 차범수는 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의료팀의 투입을 거절했다. 인대 부상 같은 건 선수 본인이 느끼지 못한다. 무릎 인대가 끊어졌는데도 모르고 경기를 다 뛴 선수가 있을 정도다.
훈련도 성실하게 하고 경기중에 집중도 풀리지 않는 차범수의 프로의식이 7밖에 안 되어 늘 궁금했던 기신이다. 오늘에야 그 궁금증이 풀렸다.
물론 기신은 지금 현장 지배로 차범수의 부상이 심각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만약 치료가 필요한 부상이라면 바로 의료팀을 투입했을 것이다. 전술 이해 스텟이 삭제되며 현장 정보로 바뀌었던 현장지휘가, 지금은 현장 지배로 바뀌었다. 결승 경기는 기신의 지배하에 놓여있다.
주심이 뒤늦게 차범수에게 태클을 날린 선수에게 노란 카드를 주었다. 카드를 받은 선수는 차범수를 찾아 사과의 말을 전했다.
"독일팀 중앙이 컨디션 별로다. 황희하고 길수 공격 상황에서 중앙 많이 괴롭혀."
독일팀 키퍼는 손가락이 부어있다. 압박 붕대로 감았고 스프레이를 뿌려 더 붓는 것을 막아냈지만 이미 부은 부분은 어쩔 수 없다. 눈가라면 살을 째서 부기를 뺄 수 있지만 골키퍼의 손가락은 함부로 처치하기 힘들다.
아마 후반전에 골키퍼가 교체될 가능성이 크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독일 미드필더들을 공략하면 후반전에 중앙 미드필더들이 교체될 가능성이 크다. 정면 공격은 전혀 두렵지 않다. 두려운 건 양측 수비가 털리는 것이다.
선수 교체가 중앙에서 일어나면 독일의 두 윙백에 적응한 공민훈과 한윤이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작어진다. 서로 익숙해졌을 때 수비하는 선수가 더 유리하다. 특히 베노나 오른쪽 윙백은 돌파를 그렇게 잘하는 선수가 아니다.
신이라도 된 느낌이다. 경기장의 정보가 확연하게 머릿속에 들어온다. 누구의 컨디션이 좋고 나쁜지, 누구의 몸에 어떤 부상이 있는지, 누구의 위치가 훌륭하고 누구의 위치가 불합리한지 그냥 알 수 있다.
"철범아, 조금 더 앞으로 나가. 수비진을 흔들어."
골 두 개를 넣고, 코너킥 상황에서도 득점한 김철범을 독일 수비수들이 무시할 수 없다. 김철범의 위치가 바뀌면 독일 수비진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수비진은 제대로 흔들었지만 헤딩이 되는 선수가 적어 한국의 코너킥은 큰 위력을 보지 못했다. 독일의 골키퍼는 공을 잡지 못하고 왼 주먹으로 쳐냈다. 차범수는 공을 뒤로 길게 패스해 김시웅에게 보냈다.
공민훈과 한윤은 깔짝대기만 하고 한국팀의 공격은 중앙에 집중되었다. 공격 기회 하나가 아쉬운 독일이지만 돌파와 패스를 잘 결합한 한국팀의 공격에 신중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전반전을 3:0의 점수로 끝내자 관객들은 큰 소리로 응원했다. 경기가 숨 막히게 진행되어 경기중에 느긋하게 응원할 수 없었다. 애국심 혹은 기신에 대한 호감으로 한국팀에 베팅한 토토쟁이들도 컴퓨터 앞에서 크게 환호했다.
- 작가의말
오늘 세 편으로 마칩니다. 경기 하나로 이렇게 분량을 늘릴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고무고무 열매를 먹은 후 아무리 늘려 써도 질(잘)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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