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탄생
12월에 기신은 아프리카와 남미를 다녀왔다. 노츠 카운티를 위해 젊은 선수를 수급했다. 그리고 유럽에 가서 해외 선수들의 컨디션도 점검했다.
그리고 1월 23일, 기신은 아버지가 되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들이 태어났다. 기신은 버지니아와 함께 아기의 이름을 상의했다.
"나는 린이 마음에 들어. 아이 이름 린이 어때?"
기신은 필사적으로 버지니아를 설득했다. 기린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포악한 이름인지 설명했다. 아들의 목이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에 버지니아는 고집을 꺾었다.
"적 어때? 쌓을 적(積)."
기신은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 지금 쌓아가고 있는 것들이 퀘스트의 완성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아들의 이름을 적이라 지으려 했다. 버지니아도 몇 번 발음해보고 마음에 들어 했다.
그렇게 기적이 탄생했다. 강아지 신기는 기적이 태어난 후 기여운의 장난감에서 일약 기적의 보디가드로 신분 상승했다. 털갈이도 하지 않는 이 신기한 강아지는 24시간 기적의 곁을 지켰다.
- 다시 만난 미얀마, 미안.
- 17:0의 대승. 9명의 선수가 득점에 성공.
- 전반전 9실점 후 골키퍼 교체는 감독이 아닌 선수의 의지?
전반전에 9실점을 한 후 후반전 미얀마의 골키퍼가 교체되었다. 그래서 후반전이 끝나기도 전에 무수한 추측성 기사가 나왔다. 뚜껑을 열어보니 선수 본인이 정신적으로 힘들어 출전을 거부했다고 한다.
- 경기 후 미얀마 골키퍼와 유니폼 교환한 차범수,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
- 국기를 가슴에 달고 국가를 대표한 것만으로도 승리자, 차범수 미얀마 골키퍼에게 따뜻한 응원을 전해.
- 프리미어리그 선수의 품격, 힘들어하는 미얀마 골키퍼에게 응원을 전한 차범수.
경기 도중 상대 선수와의 대화를 통해 사연을 알게 된 차범수는 경기가 끝난 후 전반전만 뛰고 교체된 미얀마 키퍼를 찾아 유니폼 교환을 제의했다. 그리고 국가대표가 된 것만으로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니 경기의 패배로 실망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 미얀마 골키퍼, 차범수는 위대한 선수다. 실패보다 포기가 더 두려운 것이라고 나를 일깨워줬다.
- 미얀마 골키퍼, 오늘 경기에서 졌지만 우리는 패배자가 아니었다.
- AFC 홈페이지, 차범수의 미담으로 장식.
- S 그룹, 미얀마 축구의 발전을 위해 기여할 것. 아시아 축구 진흥 프로젝트에 미얀마도 포함.
아시아 축구 진흥 프로젝트는 차범수와 왕후이를 노츠 카운티로 보내는 것에서 시작했다. 김시웅과 두레이, 그리고 노츠 카운티와 계약한 네 명의 한국 선수도 이 프로젝트를 통해 축구 장학생 신분으로 보내졌다.
중국과 한국을 주요 타겟으로 하고 베트남을 포함해 S 그룹이 진출한 국가들만 포함했다. 거기에 미얀마도 넣은 것이다. 손 안 대고 코를 푼 것이나 다름이 없다.
- 한국 대표팀 원정에서 라오스에 12:0의 대승.
- 경기 후 웃으며 서로를 격려하는 양 팀 선수의 모습.
- 승패를 초월한 경기, 한국팀과 같은 강팀과 경기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 패배가 아쉽지만 경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차범수는 월드 클래스.
득남하고 한국팀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러나 기신이 마냥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현장 정보의 약점 하나를 새롭게 발견했다. 현장 정보는 수비에 관한 정보보다 공격에 관한 정보를 훨씬 많이 준다. 쉽게 말하면 공격에는 큰 도움이 되지만 수비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그간 너무 게을렀나?'
노츠 카운티부터 수비는 차범수가 잘 지휘하는 바람에 기신은 늘 공격에 집중했다. 거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현장 정보도 상대 선수들의 수비 약점을 찾는 데 특화된 듯하다.
'범수가 출전하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컨디션이 나쁘거나 카드 누적으로 출전하지 못하면 큰일이다.'
한 경기로 승부를 내는 토너먼트에서 차범수가 출전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싫다.
'설마 범수가 수비 지휘를 너무 잘해서 약점이 없는 것인가?'
기신은 축구협회에 5월 말 유럽 강팀과 친선경기를 잡아달라고 요청했다. 대표팀의 선전으로 축구협회의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다. 예전에는 무작정 욕을 먹었는데 요즘은 그래도 욕을 덜 먹는다. 칭찬은 아직도 요원하다.
- 태국팀을 8:0으로 대승. 무실점 경기 계속 이어갈까?
- 팀 수비의 위력, 코치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실점이 없어요.
- 한웅진 골키퍼, 나는 한 게 없다. 수비수들이 잘 해줘서 경기중 딴생각한 적도 있다.
- 축구협회 현재 벨기에와 스페인과 친선경기 추진 중.
- 한국의 무실점 수비진 과연 유럽 강호에게도 먹힐까.
그리고 2단계 마지막 경기에서 베트남을 만난 기신은 차범수에게 휴식을 주었다. 김시웅과 채운이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베트남은 중앙보다 양쪽 윙의 공격에 많이 의지했다.
풀백 출신인 김시웅과 수비 범위가 넓고 부지런히 뛰는 채운이 협력 수비를 잘 해냈다. 수비에 대한 정보가 곧잘 올라오는 것을 확인한 기신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비록 여전히 공격에 필요한 정보가 많지만 그건 유럽의 강팀과 대결하면서 확인하면 된다.
홈에서 팬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으면서 전반전을 2:0으로 마쳤다. 수비가 가끔 허점이 생기니 공격할 때도 마음 놓고 인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기신은 김시웅을 내리고 차범수를 올렸다.
차범수가 교체되자 베트남 선수들은 숨이 막혀왔다. 공을 잡을 때 드리블하기도 마땅치 않고 좋은 패스 경로도 없다. 뒤로 패스하면 시간을 번 상대의 수비가 더욱 단단해진다.
수비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기신은 채운을 내리고 공격수 한 명을 추가했다. 뒤가 든든해지자 선수들도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과감한 공격을 했다. 공격 기회가 많아지고 베트남 선수들의 실수도 잦아지며 후반전 또 한 번 골 잔치를 벌였다.
- 7:0의 대승, 이번엔 만족한 표정의 기신 감독.
- 경기 중 세 번의 진형 변화와 전술 변화에 완벽 적응한 대표팀 선수들.
- 이번 대표팀은 다르다. 우승은 공허한 외침이 아니었다.
- 더는 바라지 않는다. 이대로만 자라다오.
길서준은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어릴 때부터 늘 대표팀 주전으로 뛰었다. 그리고 지난 월드컵에서도 어린 나이에 주전이 되었다. 그런데 유럽은커녕 중국이나 일본 리그에서도 연락이 없다.
이번에 국가대표로 뽑힌 후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실력을 의심했다. 처음에 왜 뽑았냐 싶던 김철범이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고 궁금해서 물어봤다. 기신 감독의 지시로 개인 훈련을 한다는 말에 충동적으로 감독을 찾아갔다.
"너는 수비 능력만 따지면 유럽 수준이야."
기신의 첫 마디는 그래도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길서준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전술 이해랑 팀워크가 너무 부족해. 너는 본인의 수비만 생각하지 팀의 수비는 생각하지 못해. 범수가 경기하는 걸 보면서 느낀 게 없어?"
"나는 죽어도 저렇게 못 하겠구나 싶더군요."
"그래. 중앙수비수 자리에서 팀워크가 뛰어난 팀을 만나면 너는 큰 약점이 돼. 미드필더로 올리기에는 패스와 공격 가담이 부족하지."
길서준은 고개를 푹 숙였다. 반쪽짜리 선수라는 말은 예전부터 들어왔다. 그러나 출중한 개인 능력으로 늘 주전 자리를 얻었다. 팀 수비를 더 중시하는 기신 때문에 지금은 벤치 신세지만 말이다.
"네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어. 하나는 전술 훈련을 받아서 팀워크를 키우는 거야. 팀워크만 키우면 유럽도 진출할 수 있지."
길서준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건 성격을 바꾸라는 뜻이다. 경기장에서 많은 생각을 하면 머리가 아프다. 그냥 단순하게 뛰는 게 좋다.
"또 하나는 수비 기술, 특히 대인 마크 기술을 연마하는 거지. 김시웅이 에릭센을 마크하던 것처럼 말이야."
"두 번째를 선택하면, 유럽에 갈 수 있나요?"
길서준은 짧은 한마디를 하는데 큰 용기를 냈다. 기신이 비웃을까 겁이 났다.
"안정적인 선발 주전은 힘들어. 대신 중요한 경기에서는 출전 기회를 잡을 수 있지. 혹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방법도 있어. 실패할 확률도 무척 높지만 말이야."
"둘 다 할게요. 시켜만 주세요."
길서준은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속으로 살짝 후회되었지만 이내 이를 악물었다. 차범수는 몰라도 김시웅과 자신은 크게 차이가 없다고 느꼈다. 자신은 타고난 성격 때문에 유럽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 이 악물고 해내고 싶다.
"하비 코치 찾아가면 개인 훈련을 시켜줄 거야. 팀워크 훈련은 케슬러를 찾아. 머리가 노란 독일 코치 말이야."
길서준은 눈을 끔뻑이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기신은 미소를 지었다. 김철범을 보고 길서준 주변을 알짱거리라고 한 보람이 있다. 자존심이 강한 길서준은 본인이 먼저 입을 열게 해야 한다. 기신이 먼저 말할 수도 있지만 길서준이 먼저 요구하는 것보다 효과가 못할 게 뻔하다.
남은 골칫거리는 황희와 박요환이다. 황희는 공격 수단이 너무 빈약하다. 풀백의 지원이 없으면 위력을 내지 못한다. 박요환은 수비를 너무 안 한다. 속도가 느린 것도 큰 문제다.
최길수는 수비도 잘하고 속도도 빠르다. 그런데 크로스를 정말 못 올린다. 기술 문제가 아니라 타이밍 문제다. 공격수는 이미 자리를 잡고 수비수는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에 정확한 크로스를 올리면 가장 좋다. 그런데 최길수는 공격수가 자리 잡기도 전에 급하게 올린다.
"문제는 최길수가 이미 잠재력 49를 꽉 채웠단 말이지."
물론 크로스 타이밍 문제이기에 경험이 쌓이면 해결될 것이다. 이 문제는 본인이 명확히 해결 방법을 알아야 훈련으로 도울 수 있다. 타이밍을 잡아주는 훈련은 그 효과가 확실히 검증되지 않았다. 훈련을 통해 발전을 보이는 선수도 있고 효과를 보지 못하는 선수도 있다.
"황희는 발목이 너무 뻣뻣해. 문제는 배성국도 크로스가 별로라는 거지."
배성국도 수비 가담이 훌륭한 윙이다. 문제는 배성국 역시 크로스는 별로다. 컷인 플레이를 하지만 위협적이지 않다. 오랜 시간 왼쪽 윙 자리에서 주전을 차지한 선수 때문에 왼쪽 윙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이 부분은 공격 전술을 책임진 델 핀토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첫 경기 후반전 황희의 롤 변경도 델 핀토의 아이디어다. 기신은 현장 정보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지만, 정보를 가공하는 능력은 아직 부족하다.
"일단 공부나 하자."
기신은 경기 영상을 틀고 노트를 펼쳤다. 벌써 세 번째 정주행이다. 그런데도 새롭다.
"아, 여기서는 이렇게 하는 게 더 나았구나."
새롭게 느껴지는 게 있자 기신은 즐거웠다. 그간 발전했고 아직도 발전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다시 보면서 아무것도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발전이 멈추었다는 뜻이다. 세 번째라 지루할 법도 하지만 기신은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끝까지 관람했다.
아들 기적의 백일잔치를 열고 기신은 유럽으로 향했다. 스페인과는 일정이 안 맞았다. 벨기에와 핀란드가 이번 친선경기 상대이다. 벨기에는 무수한 스타 선수를 보유한 강팀이고 핀란드 역시 새롭게 떠오르는 유럽의 강호다.
기신은 노츠 카운티로 가서 윤한을 비롯한 네 선수를 확인했다. 평가전에 불러도 될 수준은 되었다. 파리 올림픽 대표팀 주전인 넷을 대표팀에도 출전시켜 사기를 돋우어줄 필요가 있다.
- 작가의말
3차 예선에 어떤 팀들을 한국과 같은 조에 넣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란과 호주 그리고 일본은 같은 조가 불가능합니다. 한국까지 넷이 1시드거든요. 누굴 조질지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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