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체질의 기신
"노인학대라니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때 매일 시비를 걸던 늙은이가 말했다.
"네가 나한테 늘 폭언을 뱉었고 나를 때린다고 위협했잖아."
기신은 여유있게 웃었다.
"그런데 당신 노란 피부와 검은 피부 다 싫다고 했잖아. 저 흑인 경찰은 괜찮은거야?"
덩치가 작지 않은 흑인 경찰이 험악하게 인상을 썼고 백인 경찰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졌다. 둘이 동시에 노려보자 늙은이는 다급히 말했다.
"거짓말. 나는 동양인이 싫다고 했지 흑인이 싫다고 한 적은 없어."
"두분 보셨죠? 인종차별자 입니다. 매일 저에게 폭언을 일삼았는데 제가 참았죠. 귀찮은 일은 질색이니 이만 집에 가서 쉬어도 되겠습니까?"
"이 문제는 저희가 신고인과 심도있는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죠. 다만 몇 달째 아무 직업도 없이 지낸다고 들었는데 신원확인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럼 이걸 보여드리죠."
기신은 방금 사인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로만은 오늘 협상만 하려고 했는데 기신이 까다롭게 굴지 않아 그 자리에서 계약을 체결했다.
"노츠 카운티의 새로운 감독이 당신인가요? 원래 감독이 갑자기 사임해서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이군요. 이번 시즌 목표는 어떻게 되나요?"
흑인 경찰은 노츠의 팬인듯 했다. 래퍼처럼 빠르게 쏟아내는 질문에 기신은 손사래를 쳤다.
"마지막 질문만 알아 듣겠네요. 이번 시즌 목표. 제 목표는 항상 우승입니다."
흑인 경찰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기신은 집으로 들어갔다. 백오십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프리미어리그가 생긴 후 한 번도 1부 리그에 발을 담가보지 못했다. 1894년 FA컵 우승이 이들이 이루어 낸 가장 큰 영광이다. 하지만 팬들이 구단에 대한 충성과 열정은 전혀 식지 않았다.
### 나는야 쌈박한 분계선 ###
- 캐릭터 기신이 프로구단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스텟 분배가 가능합니다.
주급관리 7
돌발사태 대응 5
현장지휘 0
전술이해 1
언론대응 2
일정관리 7
선수단관리 0
전술 일관성 1
선수 능력 분석 0
선수 잠재력 분석 0
코치 능력 분석 0
"젠장. 나는 대마법사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내가 애지중지하는 캐릭터는 왜 이렇게 처참한 스텟을 가지고 있어?"
신기는 고개를 쳐들고 한탄했다. 원래는 하늘을 바라보며 분위기 잡으려 했는데 창고로 쓰이는 작은 방안이라 천장만 보였다. 대마법사의 행적에 오점이 남겨지면 안 되기 때문에 몰래 창문도 없는 작은 방에 숨어서 게임을 하고 있다.
"내 천재적인 두뇌로 100의 스텟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분배해야지."
신기는 55 포인트를 소모해서 현장지휘를 10으로 만들고 28 포인트를 소모해 선수단관리를 7로 만들었다. 남은 17포인트는 일정관리에 투자하여 7을 9로 만들었다.
"선수영입은 내가 할 거고 전술은 전술코치에게. 완벽한 스텟 분배였다."
스텟 분배를 마친 신기는 곧바로 선수영입에 몰입했다. 척척 어린이 문수도 몰래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신기에게 훌륭한 팁 하나를 주었다. 대영제국의 게임들은 데이터 암호화방식을 마력패턴으로부터 발전시켰기에 적당한 양의 마력을 CPU에 주입하면 암호화가 풀려버린다.
배터리 문제도 쉽게 해결되었다. 대영제국의 배터리들은 마법사의 마력으로 충전이 가능하다. 단 현재 신기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최근 들어서 마나수련에 열심히 임하고 있는 신기이다.
"요놈 하고 요놈, 그리고 요 자식도 탐이 나네. 얘는 완전 대물이고."
노츠 카운티에서 영입 가능한 자들은 푸른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미래가 기대되는 자들도 있고 능력에 비해 가격이 싼 자들도 있고 즉전감이지만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는 자들도 있다. 어떤 자들을 영입할지 신기는 오래도록 고민했다.
### 나는야 쌈박한 분계선 ###
"공개 트라이 아웃을 한다구요?"
트라이 아웃은 직접 선수들을 불러다가 기량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거기에 공개 트라이 아웃이라면 기자들을 포함한 구경꾼들을 입장시키겠다는 말이다. 트라이 아웃이야 이상할 것 없는데 굳이 공개로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자기 기량을 제대로 발휘해야죠. 평소 훈련할 때는 굉장히 잘하다가 시합에서 엉망으로 하는 선수들이 있잖아요. 예산도 넉넉하지 않은데 최대한 실패의 확률을 낮춰야 합니다."
기신의 설명에 구단 직원도 동감했다. 특히 어린 선수들이 그런 경향이 심하다. 팀에도 몇몇 유망주들이 있는데 훈련에서 잘하다가 정식경기에 투입되면 곧바로 다리가 풀려서 제대로 뛰지도 못한다.
기신은 감독 부임 후 훈련을 전적으로 코치들에게 일임했고 전술은 전술코치에게 일임했다. 코치들 중 유일하게 파벌에 속하지 않은 전술코치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팀의 상황에 맞추어 전술을 짰다. 선수들은 파벌이 없지만 공격위주의 전술을 신봉하는 코치들과 수비위주의 전술을 신봉하는 코치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선수의 선택을 달리한다.
기신은 훈련과 팀 내 경기들을 지켜보며 빠르게 공부했다. 훈련은 아무리 봐도 느껴지는게 없지만 팀 내 경기를 지켜보면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속속 발견되었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바로바로 답이 떠올랐다. 자신이 사무직 체질이 아니라 현장직 체질이라는 것을 기신은 회사를 나오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 나는야 쌈박한 분계선 ###
리차드 헌터는 키가 190이 넘는다. 달리기 속도도 결코 늦지 않다. 슈팅 정확도가 낮지만 그건 연습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헌터는 유스팀에서 쫓겨났다. 겁이 많아서 헤딩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다.
헌터는 어릴 때부터 키가 컸다. 그래서 감독은 헌터를 공격수로 세우고 센터링 전술을 사용하기 좋아했다. 하지만 비오는 날 진흙이 묻어 평소보다 무거운 공을 헤딩하려 하다가 눈을 맞은 뒤로부터 헌터는 헤딩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의지력이 박약하다는 이유로 결국 유스팀에서 쫓겨났다.
겁쟁이 헌터는 이미 스카우터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비록 드리블이나 여러가지 기술이 많이 부족하지만 훌륭한 육체조건과 축구선수들 중에서도 비교적 빠른 편인 달리기 속도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외면을 받았다.
"여기는 노팅엄의 노츠 카운티 구단입니다. 7월 7일에 진행하는 공개 트라이 아웃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간과 장소는 곧바로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시간이 긴박한지 참가자가 많은 건지 전화를 한 사람은 신원확인을 한 뒤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곧바로 시간과 장소가 적힌 문자가 핸드폰에 도착했다. 유스팀에서 방출된 후 석달정도 훈련을 하지 않았지만 문제 없다고 생각하며 헌터는 식탁위에 입단 테스트를 하러 간다는 쪽지를 남기고 노팅엄으로 출발했다.
헌터는 싸구려 여관에서 우연히 같은 방을 쓰게 된 터너와 빠르게 친해졌다. 아직 앳된 얼굴의 터너는 2000년생인 헌터보다 한 살 많았다. 스코틀랜드 출신인데 주정뱅이인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주먹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스코틀랜드 구단의 요청을 거부하고 이곳으로 향한 것이다.
"샘, 너 키퍼가 나보다 키가 작으면 어떡하니?"
샘 터너는 키가 185밖에 되지 않는다. 대부분 감독들이 골키퍼의 키를 190이상으로 원하기에 골키퍼 치고는 키가 작은 편이 맞다.
"나 아마 키가 더 클거야. 주정뱅이 아빠 때문에 어릴 때 식사를 제때에 못해서 키가 안 자란거야. 프로 선수가 되어 돈을 벌면 맛있는 요리를 많이 사먹어 키를 키울거야."
"맛있는 영국요리를 사먹겠다고?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둘은 영국요리 비하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우정을 다졌다. 헌터 역시 '고아'나 다름이 없다. 터너의 아버지처럼 손찌검을 하지는 않고 그저 모두 너무 바빠서 자식에게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것이다.
"너 이후에 결혼할 때 변호사 마누라 절대 얻지 마. 난 지금까지 생일날 가족이 전부 함께 보낸 기억이 거의 없어. 둘 다 변호사인데 한번은 법정에서 서로 적수로 만났어. 그날 밤 집에 와서까지 다퉜다니까."
바쁜 부모 때문에 외동아들인 헌터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주정뱅이 아빠가 재혼하지 못해서 외동아들인 둘은 빠르게 친해졌다. 부모의 관심에서 벗어나 어려서부터 자립을 했기에 둘 다 서로 배려할 줄도 알았고 나이가 비슷해서 대화도 잘 통했다.
7일날 정해진 시간에 트라이 아웃 장소에 도착해보니 테스트를 받으러 온 선수가 70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미리 준비를 단단히 해놓았는지 전혀 난잡함이 없이 질서가 정연했다.
"새로 온 감독 말이야. 유스팀 1년 경험밖에 없다고 했는데 제법이야. 이번 트라이 아웃 준비하는 걸 보면 베테랑 같단 말이야."
"유스팀을 관리했으니 경험이 풍부 할 수밖에. 애들 뒤치다꺼리 하는게 얼마나 힘든데."
직원들은 생각보다 편하게 트라이 아웃 준비를 했다. 기신이 여러가지 경험을 발휘해서 필요한 것들을 미리 다 챙겼기 때문이다. 머리를 굴려서 뭔가를 결정하는게 어렵지 기신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코치들을 제외하고도 몇몇 나이 많은 선수들이 나와서 테스트를 도왔다. 달리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신체능력 테스트의 결과를 기록하고 나서 응시자들에게 점심을 먹였다. 일정한 시간을 휴식한 뒤 여섯 팀으로 나눠 30분짜리 경기를 진행했다.
세 경기를 진행하는데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세 경기가 끝나자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호명되고 남은 사람들은 경기장을 떠났다. 탈락한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빠르게 사라졌고 헌터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터너와 손뼉을 마주쳤다.
"십오분 휴식 후에 30분짜리 경기 두개를 연속 치르겠습니다. 경기 도중에 서로 선수가 바뀔 수도 있으니 명심하기 바랍니다."
경기를 진행하는 도중 가끔 호루라기로 경기를 중단시키고 두 팀의 선수가 서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위치도 기신이 일일이 지정해 주었다. 헌터와 같은 편이던 근육덩어리 흑인이 반대편으로 가서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았다.
으헉 하는 소리와 함께 헌터는 뒤로 자빠졌다. 근육덩어리와 부딪히고 튕겨난 것이다.
"미안, 난 피터 그레이. 힘 조절을 잘 못해."
"너 몇살이야?"
"열아홉이야. 너는 스물두셋 되어 보이는구나."
"나 열일곱이야. 너는 서른두셋 되어 보여."
항상 덩치로 상대를 압살했던 헌터는 그 뒤로도 그레이와의 몸싸움에 한번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키는 헌터가 10센치 정도 더 컸지만 점프력은 그레이가 훨씬 대단해서 헤딩은 항상 그레이의 차지였다.
"너 헤딩 무서워 하는구나. 나도 예전에 무서워했어. 하지만 지금 안 무서워."
"어떻게 한 건데?"
헌터는 헥헥거리며 그레이에게 질문했다. 제대로 점프를 해도 헤딩대결에서 질 게 뻔하지만 겁을 먹어 점프 하면서 항상 몸을 움츠렸다. 그래서 좋은 위치를 차지했을 때도 그레이에게 헤딩기회를 빼앗겼다.
"농구공에 얼굴 한번 맞아본 적이 있거든. 그 다음부터 축구공은 안 무서워. 대신 농구공은 아주 무서워."
헌터는 자신도 한번 농구공에 맞아볼까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레이는 어딘가 모자라 보였다. 아마 헤딩을 무서워하는 습관을 고친 건 다른 이유일 것이다. 친해져서 많은 대화를 나누면 자신의 총명한 머리로 자연스럽게 이유를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육체는 외조부의 것을 물려받았지만 머리는 변호사인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헌터는 항상 생각해왔다.
- 작가의말
언젠가 한국 선수도 영입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물론 무쌍을 찍지는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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