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주
신기는 손을 마법 주머니에 가져다 댔다. 겸양의 뿔과 심판의 검이 신기의 손에 쥐어졌다. 왕실 기사단 기사들의 손이 검자루를 가볍게 잡았다. 비록 날이 15센티밖에 안 되지만 여왕의 앞에서 검을 꺼냈다는 것은 커다란 불경이다.
"이 뿔이 지금 세상에서 발견된 물질 중 가장 단단하다고 하더군요. 제가 한 번 얼마나 단단한지 시험해보죠."
'얼음의 불길.'
일명 빙염(氷炎)이라고 하고 대영제국에서는 아이스 플레임(Ice Flame)이라고 한다.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마법으로 지금까지 구사해낸 사람이 없다. 온도가 극도로 낮아지면 물체가 와해하며 불타는 것과 똑같은 현상을 보인다는 가설에 따라 이론적으로 만들어진 마법이다. 주문도 없고 마법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아는 사람도 없다.
얼음 마법의 희귀한 속성 중 하나인 소멸 속성이다. 겸양의 뿔은 낮은 온도에 흐물흐물해지더니 불타는 것처럼 뿔 위로 아지랑이가 어질거렸다. 그러면서 그 크기가 점점 축소되었다. 신기는 오른쪽 귀의 귀걸이를 손으로 뜯어내 빙염 속으로 던졌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귀걸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신기는 마법을 멈췄다. 염력으로 잡아두고 있던 뿔은 크기가 꽤 작아졌다. 아직 흐물흐물한 뿔을 보고 신기는 비수로 만들면 마석을 채취할 때 참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이 움직이자 염력이 알아서 뿔을 비수의 모양으로 주물렀다.
심판의 검과 겸양의 뿔로 만든 각비(角匕 - 뿔 비수)를 다시 마법 주머니에 넣었다. 신기는 일부러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누구도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라 장내의 분위기가 어색함의 극치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제가 그만 실수로 제 귀걸이를 없앴군요. 귀걸이의 모습을 잘 알고 계실 테니, 번거로우시겠지만 '모조품' 하나 부탁드립니다."
우직한 기사 몇 명을 제외하고 판이 돌아가는 상황을 전부 눈치챘다. 대영제국은 캐나다를 독립시킬 때 러시아처럼 위협적인 국가로 성장할까 걱정되어 세력이 약한 귀족을 골랐다. 거기에 여자를 내세워 여왕으로 만들었다.
다른 귀족의 핏줄이 왕가에 섞이는 것을 경계하여 왕족이 된 귀족가는 근친 결혼을 일삼았다. 시간이 흐르며 왕족들은 점점 멍청해졌다. 귀족들도 멍청한 왕족이 다루기 편하므로 굳이 무언가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일국의 여왕이 왕족의 품위와 체면도 무시하고, 홀로 6등급 괴수를 처단한 무시무시한 대마법사에게 사기를 쳤다. 단순한 사기가 아니라 계약이 된 상황에서 의뢰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대영제국이라면 법정에서 판결을 받았을 것이고, 대한제국이라면 다른 귀족들에게 배척받아 빠르게 몰락했을 것이다.
"저녁에 연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때 드리죠."
여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긴장한 나머지 신기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대영제국의 대마법사가 와도 일국의 여왕으로서 존칭을 사용하면 안 된다. 기사들의 얼굴에는 참담한 표정이 떠올랐다.
신기는 베르캄이 자신을 멀리하는 것을 확인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정확히는 멀리하는 척하는 것이다. 아마 수도만 떠나면 자신에게 지겹게 들러붙을 것이 분명하다. 귀족으로서 당연한 행동이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가고 마음으로는 인정하기 싫었다.
'어머니가 몰락 귀족이라는 건 거짓말일 거야. 너무 예쁘니까 아버지가 몰락 귀족 신분을 만들어준 게 틀림없어. 그리고 난 어머니를 닮은 게 분명해.'
신기는 궁녀의 인솔하에 자신에게 배정된 귀빈 방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했다. 이번에도 떼먹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베르캄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왕족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힘을 제대로 보였으니 더는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며칠씩 자지 않아도 아무 불편함이 없는 신기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 멀뚱멀뚱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녀들은 방에 들어오기 전에 항상 기척을 내서 안에 알린다.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간다는 것을 통보하는 용도로 기척을 내는 것이다.
신기의 예상과는 달리 하녀가 아니라 둘째 공주였다. 첫째 공주가 바보여서 다음 여왕은 둘째 공주로 내정되었다. 가슴을 반쯤 드러내고 허리를 꽉 졸라맨 공주는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대화를 잠깐 나눌 수 있나요?"
"그러시죠."
신기는 정중한 태도로 공주에게 의자를 권했다. 공주가 착석하고 나서야 신기도 의자에 앉았다. 원래 지금쯤 하녀가 차나 술을 올려야 하는데 미리 분부가 있었는지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름 알아봤는데 대마법사님이 대한민국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고 계시지 못했더군요. 혹시 캐나다의 왕이 될 생각이 없으신가요?"
공주는 겸양의 사체로 만든 화장품을 사용했는지 피부가 몹시 훌륭했다. 비록 금발에 벽안은 아니지만, 가슴이 풍만하고 엉덩이가 커서 신기의 취향이다. 목선도 시원하게 뻗어있고 오관이 단아하면서도 색기가 풍겼다. 금발이 아니고 벽안이 아닌 것만 제외하면 신기가 꿈꿔오던 이상형이다.
"왕이라니, 지금까지 마법사가 왕이 된 경우가 없소."
신기의 눈은 공주의 오른쪽 귀에 걸려있는 귀걸이에 머물렀다. 아까 건넨 가짜와 거의 똑같은 귀걸이였다.
'설마 이번에도 사기 치진 않겠지?'
사람을 죽이는 데 딱히 거부감은 없다. 어차피 식량이 부족하면 가장 쓸모없는 자들을 뽑아서 처단한다. 몇백 년 동안 지속하여온 전통이고 정당한 행위이다. 기인제(棄人祭)이라고 이름 지은 이 행위는, 뽑힌 자들의 친족이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남의 손을 빌리면 괜히 원한이 생기기 때문이다.
비록 최근에는 형편이 나아져서 기인제가 폐지되었지만, 그와 관련된 교육은 계속하고 있다. 사정이 어려워지면 다시 기인제가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과는 달리 현재의 신기는 귀족이나 왕족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번 더 사기를 치면 신기는 귀걸이를 힘으로 빼앗을 생각이다.
"대영제국은 원래 마법사가 왕이었습니다. 그러다 문제가 많아서 지금의 공화정으로 바뀌었죠. 캐나다는 마법사의 힘이 미약해서 대마법사께서 왕이 된다고 해도 별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약할 때는 왕정이 더 낫다. 하지만 강해지면 공화정이 낫다. 대한제국이 감히 공화정을 못 하는 것은 백성들이 수십 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처럼 직접적인 힘을 보유하지 못한 대한제국 황실이기에 감히 공화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초면인 내게 왕위를 내준다는 말이오?"
"당연히 조건이 걸려있죠. 아이의 성은 우리 가문의 성을 따르고 다음 대에는 여왕이 즉위해야 합니다."
진도가 너무 빠르다. 신기는 입가를 살짝 핥는 공주의 혀에 눈길을 빼앗겼다. 하지만 직관력이 발동되지 않았다. 이는 생소한 상황이 아니고 위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거절하겠소. 빨리 귀걸이나 내놓으시오."
귀찮다. 귀족의 존엄도 제대로 모르는 하찮은 것들과 부대끼기 싫다. 그리고 이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고민하느라 머리를 굴리는 것도 귀찮다.
"소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군요."
신기는 서른이 넘은 공주가 소녀 운운하는 것이 역겨웠다. 여왕으로 내정되었기 때문에 남자를 사귀는 것은 허용되어도 정식 결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소녀라는 말이 입에 붙은 듯했다. 그때 공주의 몸에서 무언가가 나와서 신기를 향해 은밀히 스며들었다.
- 마녀의 정신 공격을 물리쳤습니다. 마녀가 기절합니다.
신기는 그제야 이상형의 여자를 만났는데 왜 가슴이 뛰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옛날 마법 아카데미와 마찬가지로 마녀의 수작질이었다.
- 마녀의 정령이 소멸하면서 정령 구슬을 남겼습니다. 복용을 권합니다.
신기는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투명한 구슬을 잡은 후 입가에 가져갔다. 정령 구슬은 쑥 하고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빙룡이 여의의 힘을 정령 구슬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 정령 구슬이 여의주가 되는 순간 빙룡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 정령 구슬을 얻은 덕분에 빙룡이 더욱 빠르게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아직 주식이 남아있다. 신기는 공주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나타난 공주의 이목구비는 나쁘지 않았다. 평범한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법 아카데미의 마녀처럼 아주 못생기지는 않았다.
귀걸이를 떼어 오른쪽 귀에 달았다. 서리 거울 마법을 펼치니 오른쪽 귀에 책 모양의 은색 문양이 남아 있었다. 이제 신기가 발동한 얼음의 상자나 얼음의 울타리 같은 마법들은 디스펠되지 않는다. 신기만 마법을 취소할 수 있다. 아무리 강한 대마법사라고 해도 얼음의 상자에 갇히는 순간 끝장이다.
신기는 염력으로 공주를 침대 위로 올린 후 친절하게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명상에 들었다. 굳이 잠을 자지 않고 명상에 들어도 신기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다. 잠깐 명상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왕궁을 떠날 생각이다.
### 나는야 몽롱한 분계선 ###
기신은 신기 머리 위의 빙룡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예전보다 훨씬 많이 투명해진 것 같고 머리 중간에 난 뿔은 좀 더 선명해진 것 같다. 뱀처럼 똬리를 튼 빙룡은 커다란 구슬 하나를 품고 있었다.
"축하해. 그리고 다음 퀘스트는 시간제한이 있어."
"왜? 갑자기 왜?"
"일본 후지산의 7등급 괴수가 움직이기 전에 완수해야 한다는데. 위치는 남아메리카 대륙이라고 해."
신기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 왔다. 시간을 제한하는 것까지는 어찌 이해해볼 만 한데 구체적인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무슨 심술인지 모르겠다.
"그쪽 세상이나 이쪽 세상이나 지리는 대충 비슷한 것 같으니까 조언 좀 해줘."
"바다가 빠르겠지. 하지만 바다는 변수가 너무 많아. 차라리 육지로 가는 게 나을 수 있어. 물론 좋은 길잡이가 있어야 해."
신기는 곰곰이 생각했다. 남으로 가면 얼음으로 된 배가 빠르게 녹기 때문에 신기의 마나를 더 많이 소모한다. 거기에 해류의 방향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변수가 너무 많다. 물론 시간제한이 없다면 편하게 배를 타고 가는 것이 맞다. 두 다리로 걷는 것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혹시 이동문이나 이동진이 있는지 한 번 알아봐."
"없어. 마법사는 죄다 대영제국에서 데려가 버렸어. 캐나다의 마법 역량은 완전히 바닥이야. 차라리 토착민들의 주술사를 찾아보는 게 더 가능성이 커."
"명심해, 빨리 가려고 모험을 하지 말고 정확히 계산되는 방식을 취해."
신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신과 대화를 하면 무언가 정리되는 기분이다. 목표가 명확해지고 선택이 쉬워진다. 볼일이 끝난 신기는 그제야 질문을 시작했다.
"그쪽은 시간이 얼마 흘렀는데?"
"나 지금 한국이야. 프리미어리그 승급했고 시즌이 끝난 후 바로 아프리카랑 남미에서 선수 한 명씩 건지고 지금은 한국에 도착했어. 광고 촬영을 어제 방금 했고 오늘은 예능 촬영을 해. 중국 골키퍼 한 명이 있는데 그간 열심히 했는지 확인하고 영입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야."
기신은 그간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이번 광고는 기신과 김시웅이 함께 촬영했다. 위상이 달라진 차범수는 단독으로 촬영했다. 챔피언십에 관한 관심이 적기 때문에 순전히 얼굴 덕분이라고 봐야 한다.
"나도 그쪽 세상에서 태어났으면 노력 없이 얼굴로 먹고사는데."
다른 사람이 날로 먹는 것이 몹시 안타까운 신기의 발언이었다.
- 작가의말
신기처럼 노오력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날로 먹는 것을 못 견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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