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피무늬 양복
"평소에도 입을 수 있고 전투 시에도 입을 수 있게 양복으로 부탁해."
전투 시에도 품위를 위해 양복을 입어줘야겠다는 신기의 생각이다. 앙드레는 홀로 6등급 괴수를 물리치는 신기의 위용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가 체의 가죽으로 코를 닦을 용도의 손수건을 제작하라고 해도 그러려니 할 정도로 신기에게 빠졌다.
여러 명의 대마법사와 수많은 고위 마법사, 그리고 전사들이 협력해도 잡기 힘든 것이 6등급 괴수다. 특히 무리 생활을 하는 괴수보다 단독으로 생활하는 괴수는 더욱 힘들다. 전투력이 강하든지, 다른 특별한 능력이 있어 잡기 힘들든지 무리 생활을 하는 괴수보다 힘들다. 장보고 등이 한 번 목격했던 호교, 고기를 먹으면 모든 병이 치료되는 6등급 괴수도 대영제국에서 몇 번이나 포획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잠깐, 어제 대한민국의 왕자라고 했었지. 왕족의 품위에도 맞는 옷을 지어야겠군.'
앙드레는 마법 주머니에서 재봉틀을 비롯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꺼냈다. 내부가 저온에 의해 알갱이가 되었기에 거꾸로 들고 몇 번을 털자 가죽만 남았다. 변형 마법으로 가죽의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가죽의 저항력이 너무 강해 일시로 저항력을 낮추는 약물을 무척 많이 소모해야 했다.
신기는 앙드레가 옷을 만드는 사이에 돌아다니며 장작을 주웠다. 혹시 사냥이라도 하게 되면 고기를 구워야 한다. 야생 짐승의 고기는 비리지만 맛있는 부위도 꽤 있다. 그리고 내장은 구워 먹으면 식감이 매우 좋다. 얼음 마법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신기이기에 이런 수고를 해야 한다.
사흘의 시간 동안 복잡한 과정을 걸쳐 완성한 양복은 좀 과했다. 체의 무늬는 호랑이의 무늬보다 훨씬 화려하고 선명하다. 그런 무늬를 살려서 만든 양복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재료의 화려함과 반대로 왕가의 품위를 나타낼 수 있게 장중함과 엄숙함을 디자인으로 표현했다.
양복의 어깨에는 견장이 붙어 있었다. 견장에는 꽃 네 송이가 달려있다. 왕족은 전쟁이 나면 별 네 개를 달고 원수급의 대우를 받는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한 노력이다. 바지 역시 양옆으로 가죽을 한 줄 더 붙여서 선을 살렸다.
신발과 장갑 역시 호피 무늬이며, 발목을 보호하는 발목 토시, 손목을 보호하는 손목 토시가 있었다. 두 눈만 드러낸 호피 복면이 얼굴과 목을 보호하며 중절모의 모양을 가진 모자는 훌륭한 디자인으로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보통은 손등 부위에만 털이 있는 일반 털장갑과는 달리 체의 가죽으로 만든 장갑은 양측에 다 털이 있다. 신발의 바닥도 털이 있는 부분이 밖으로 향했다. 모든 옷을 착용하니 두 눈을 제외하고 밖으로 드러난 부분이 없지만, 호흡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앙드레가 마지막으로 꺼내 든 것은 피풍의였다. 꼬리가 달린 부분의 가죽으로 만든 피풍의를 걸치니 패션이 완성되었다. 소꼬리를 닮은 체의 꼬리가 등 뒤에 곧게 세워져서 머리 위로 높게 뻗었다.
"서리 거울."
모든 마법을 반사하는 고위급의 마법이다. 앙드레는 무영창으로 고위 마법을 펼치는 신기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경박한 듯 행동하지만, 자세히 살피면 일거수일투족에 귀족 특유의 동작들이 깊이 배어있다.
'숨겨진 왕자일 가능성이 크구나. 그래서 약간 염세적으로 변한 거야.'
"남은 가죽은 수고비로 하지. 그럼 이만 작별을 할 때군."
신기는 새로 만든 양복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대한제국의 귀족 복식은 매우 실용적이다. 언제든 전장에 나설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각오인데, 이미 씹힌 지 오래된 각오이다. 요즘 무기를 들고 가장 앞장서서 돌격하는 귀족은 찾아보기 힘들다.
반대로 대영제국은 안전한 곳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여러 가지로 멋을 부렸다. 실제로 호주머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죽을 덧붙여서 호주머니의 느낌을 살렸다. 화려한 생활을 바라지만 대놓고 사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대한제국의 귀족들과는 달리 대영제국의 귀족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자랑했다.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있기에 백성들이 국가를 위해 더욱 힘내어 헌신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니, 저도 데리고 가 주셔야죠."
체가 죽었지만 언젠가는 다른 고등급의 괴수가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앙드레는 죽은 목숨이다.
"나는 캐나다로 가는데."
"저도 캐나다로 가겠습니다. 그쪽 귀족들과 친분이 두텁습니다."
그쪽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기는 앙드레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앙드레는 신기의 뒤를 따라 아무것도 없는 바닷가에 도착하자 어리둥절해졌다. 신기의 품위에 어울리는 대형 선박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바닷가에는 쪽배 하나 없었다.
"바싹 따라붙어야 해."
말을 마친 신기는 바닷물을 얼리며 앞으로 걸었다. 하지만 앙드레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대마법사님, 차라리 얼음으로 배 모양을 만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마나의 소모가 너무 커져."
"그저 바닷물을 얼려 주시면 제가 변형 마법으로 배 모양을 만들겠습니다."
신기는 빙결 속성으로 바닷물을 가득 얼렸다. 그 얼음을 앙드레가 변형 마법으로 배 모양을 만들었다. 앙드레는 노도 두 개 만들었다. 하지만 신기는 고개를 저었다.
"노는 필요 없어. 바람개비를 본 적이 없나 봐."
기신의 기억으로 알게 된 지식이다. 바람개비 모양으로 된 얼음꽃을 만들어낸 후 배의 뒤편에 꽂았다. 마나를 소모하며 회전을 시키니 배가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배가 안정적으로 움직이자 앙드레는 재봉 도구들을 꺼내서 자투리 가죽들로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죽이 부족한 것도 있고, 이미 보온기능이 있는 옷이 있기에 앙드레는 주요부위를 보호할 목적으로 복면과 가슴 보호대, 그리고 많이 짧은 반바지를 만들었다. 복면으로 머리를 보호하고 가슴 보호대로 심장을 보호하고 짧은 반바지로 존엄을 보호했다.
앙드레가 착용을 마치자 신기는 웃음을 꾹 참았다. 반바지와 가슴 보호대가 기신의 세상으로 갔을 때 호텔에서 본 잡지에 나온 비키니와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복면까지 쓰니 변태가 따로 없었다.
"대마법사님, 거울 한 번 부탁드립니다."
"서리 거울."
앙드레는 자신의 작품에 몹시 만족한 듯 손뼉을 쳤다. 신기는 이 복장이 캐나다와 대영제국의 귀족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디자인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옷 만드는 것을 취미 생활로 하던 앙드레였는데, 부족한 가죽으로 만들어낸 옷 덕분에 거장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가는 길에 가시 고드름 마법으로 물고기도 잡았다. 원래는 걸어서 갈 생각이었는데 생각 밖으로 얼음 배를 타고 가는 것이 편하여 보이자 아예 바다로 캐나다까지 가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적당한 크기의 섬이 보이자 상륙해서 저녁을 보냈다.
"여기 사람이 살던 흔적이 있군요. 괴수가 없는 섬이 확실합니다."
신기와 앙드레가 우연히 찾은 섬은 독도였다. 일본 유민들의 임시정부가 있던 곳이다. 일본 유민들이 대한제국으로 건너가면서 임시정부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신기는 모르지만, 대한제국 황실은 조어도(釣魚島)라는 곳에 일본의 임시정부를 허락했다.
조어도는 호교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고, 괴수들의 이동 경로에서 벗어나 있어서 낚시가 가능한 곳이다. 물론 부러진 검을 대만으로 옮긴 후에는 이동하는 괴수들에 의해 물고기들이 많이 죽었다. 지금 새로 바뀐 패턴에서 조어도는 또 괴수의 이동에 비켜 나가 다시 물고기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일본 유민들은 강소성의 해안에 배치되었다. 한반도와 제주도의 사이를 지나가는 괴수들이 도착하는 곳으로 가장 괴수들의 압박이 심한 곳이다. 이곳이 돌파당할 때마다 괴수들이 주요 도시인 소주, 양주, 남경에서 대학살을 벌였다. 특히 인구수가 많고 자체 방어력이 약한 남경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괴수들의 남경 대학살을 막기 위해 일본 유민들은 강소성의 해안에 정착했다. 일부는 군인으로, 대부분은 공장에 들어가서 무기 생산에 투입되었다. 제주도에서의 경험이 있으므로 일본 유민들은 빠르게 적응했고 이들 덕분에 화북평원의 곡물 생산이 안정에 접어들게 되었다.
물론 신기는 이러한 사정들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일본 유민들이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했던 건물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배를 만들어 항해했다. 바다에서 자는 일은 너무 끔찍하여서 육지를 왼손 편에 두고 이동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충분하고 추위도 타지 않기 때문에 시일이 더 걸리더라도 안전한 방법이 좋은 것이다.
### 나는야 쌈박한 분계선 ###
"너는 하나만 명심해라. 신무가 앙드레를 죽이지 못하게 잘 보호해야 한다. 앙드레를 찾지 못하면 내 왕세자 자리가 위태롭다."
신현은 자신의 심복에게 신신당부했다. 6등급 괴수를 물리치고 대마도를 수복하며 앙드레를 구출하는 임무를 당연하게도 신무가 맡게 되었다. 왕인 신도가 직접 움직일 수 없고 다리 하나 잃고 지난 작전에 실패한 신현을 보낼 수도 없다.
신현이 걱정하는 것은 신무가 자신의 왕세자 자리를 탐해 앙드레를 몰래 처리하는 것이다. 대영제국이 마법에 관련해 적지 않은 지원을 해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검사의 힘도 부족하고 마법사의 힘도 부족하다. 거북선과 가시거북의 힘으로 괴수들의 침공을 버텨내고 있다.
이 방식의 장점은 인명의 피해를 줄인다는 것이고 단점은 자원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면 허망하게 뚫린다는 것이다. 자원이 부족할 경우 괴수들을 막아줄 검사와 마법사가 필요하다. 그런데 마법사의 양성은 거의 대영제국의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마법 아카데미는 자체적으로 고위 마법사를 양성할 능력이 없다.
대영제국은 거북선의 기술을 탐내어 앙드레를 핑계로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앙드레가 대표지만 그것은 앙드레가 귀족 출신에 고위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책임자는 따로 있다. 거북선의 유용성을 전해 들은 대영제국은 유리한 조건으로 거북선의 기술을 양도받거나, 거북선의 건조를 의뢰하기 위해 수작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신현은 자신을 왕세자 자리에서 몰아내기 위한 수작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고, 모든 사람의 행동이 다 자신을 목표로 한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천이 넘는 군사로 대마도를 조심스럽게 사흘이나 수색했지만 6등급 괴수의 모습도, 앙드레의 모습도 찾을 수 없었다. 신무는 대마도에 일반 괴수가 하나도 보이지 않자 고등급 괴수가 영역으로 삼아 일반 괴수들이 찾지 않는 곳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신무가 대마도를 점령하고 거북선까지 회수해서 돌아오자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 배후에는 당연히 김원견이 있었다. 신도도 김원견의 수작을 알았지만 서로 원하는 것이 일치하여 모른 척 눈감아 주었다.
결국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신현은 폐세자가 되어 강원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새로 왕세자가 된 신무는 함길도에 이어 대마도까지 영지로 받으면서 군과 백성들의 지지를 골고루 받았다. 왕후가 뒤늦게 신무에게 잘해주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어머니와 정이 별로 없는 신무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 작가의말
신기는 참 신기한 아이입니다. 아무 생각도 안 하는데 항상 큰일을 만들어냅니다. 이건 운명이라고 봐야겠죠.
닭의 해가 오늘로 끝나고 개의 해가 옵니다. 새해에는 개 멋있게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건강하고 즐겁게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시고, 일 년 동안 쭉 건강하고 즐거우셨으면 합니다.
내일 한 편 올리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장담은 드리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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