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법사의 품격
대마도의 사건을 전해 들은 신기는 여관방에서 홀로 배를 그러안고 웃었다. 신현은 자신의 충실한 호위대가 체의 가죽을 곱게 벗겨서 자신의 앞에 가져다 바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6등급 괴수, 그것도 무리 생활이 아닌 단독으로 생활하는 괴수를 준비도 없이 퇴치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신현의 호위대는 대부분 목숨을 잃었고 신현 역시 체에 의해 다리 하나를 잃었다. 충성스러운 호위들의 육탄 방어가 아니면 신현은 다리가 아닌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문제는 대영제국이 파견한 전문가단의 대표인 고위 마법사 앙드레를 버리고 혼자 도망쳐서 대영제국의 강력한 항의가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누군가의 솜씨로 이 사건이 일반 백성들에게 상세히 알려졌다는 것이다. 민심이 많이 흔들리고 있어 왕실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때 일본 유민들이 대마도의 양도를 두고 왕실과 담판을 시작했다.
"대마도를 대한민국에 넘기겠습니다. 마법 무기와 총기 및 탄약으로 지급해주시면 됩니다. 물론 소량의 식량과 재화도 필요합니다."
일본 유민들은 대한제국에서 파견한 대표단과 접촉해서 이미 어느 정도 협상을 진행했다. 대한제국은 괴수들의 패턴이 갑자기 변해서 인력난이 발생했다. 사천 지역에 많은 인력을 파견했기에 동쪽 해안가에 공백이 생겼다. 서쪽의 인력을 동쪽으로 옮기려면 최소 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본 유민들이 대한제국 동쪽 해안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두 달이 되지 않는다. 길이 잘 닦여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마도를 팔아서 무기까지 마련해서 오겠다고 하니 대한제국은 두 손을 들어 환영했다. 그래서 대한민국 왕실에 압박을 가해 대마도를 받고 최대한 많은 무기와 탄약을 토해내게 했다.
대마도의 수복에 실패하고 다리 하나를 잃은 신현은 왕세자의 자리마저 위태해졌다. 왕후는 산동성 전체를 영지로 가지고 있는 자신의 부친에게 사정해서 많은 식량을 지원받았다. 그 식량을 백성들에게 풀어서 일단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것이다.
지리적 위치의 특성 덕분에 산동성으로 향하는 괴수 대부분을 한반도에서 막아준다. 산동의 공작가에서 식량을 계속 지원해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최대의 군벌이기도 한 공작가이기에, 대한민국이 몇 년만 안정적으로 괴수를 잘 막아주면 황실을 전복할 가능성도 생긴다.
갑작스럽게 바뀐 괴수들의 움직임에도 산동과 하북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하북을 차지한 황실은 무리하게 확장을 시도하면서 당분간 밑 빠진 독을 채워야 한다. 몇 년 동안 지속해서 약해질 황실과 점점 강해질 공작가이기에 몇 년 후가 승부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 된다.
그래서 황실은 대한민국에 압박하고 있고 공작가는 최대한 도와주고 있다. 이런 상황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하면 더 많은 이득을 얻어낼 수 있지만, 왕후의 존재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공작가의 도움은 전부 왕후의 공으로 돌리고 있다.
### 나는야 잔인한 분계선 ###
호랑이를 똑 닮은 괴수가 신현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분명 왕이 될 사람은 신현인데 오히려 괴수에게서 왕의 품위가 느껴졌다. 신현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지만 검은 손잡이만 있고 검날이 없었다.
호랑이의 입안에는 혀 대신 불길이 날름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괴수와의 거리는 좁혀지기만 했다. 드디어 가까이 다가온 괴수는 신현의 오른쪽 다리를 덥석 물었다.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현은 비명을 질렀다.
"저하, 저하. 제발 진정하시옵소서."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깬 신현은 따뜻한 수건으로 자신의 이마와 몸을 닦아주던 하녀들을 물리쳤다. 천한 것들에게 못 보일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치밀었다. 그날 호위대의 피를 핥아 먹던 괴수를 생각하자 가랑이가 또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누군가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괴수의 발톱에 다리가 아닌 목이 잘려나갔을 것이다. 잘린 다리를 주워왔으면 마법으로 이을 수도 있는데 급히 도망을 치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에 김은결의 마법이 아니었으면 도망을 치지도 못했을 게 분명하다.
김은결은 빛 원소의 환상 속성이다. 인간은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미각 등 많은 감각이 있다. 김은결은 빛의 환상 속성으로 시각을 교란한다. 감각의 동조를 통해 시각을 자극하는 것으로 상대의 후각과 청각 및 촉각까지 속이는 것이다. 그래서 3등급까지의 괴수들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고 4등급의 일부 괴수들에게도 먹히지 않는다.
생명체와 비슷해지는 5등급부터 비로소 김은결의 마법이 효과를 본다. 김은결의 환상 마법은 6등급 괴수를 속였다. 오랫동안 묶여있어서 경험이 부족한 괴수이기 때문에 높은 지능에도 불구하고 쉽게 속았다. 체가 환영과 싸우는 사이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싣고 대마도를 떠났다.
"거북선을 많이 남겨두고 왔구나."
육지에 둔 소형 거북선들을 미처 회수하지 못했다. 중형과 대형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싣고 육지로 향했다. 조정의 대신들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예전과 같지 않다. 다리 하나를 잃었는데 병문안을 오는 사람이 생각보다 적었다.
### 나는야 잔인한 분계선 ###
신기는 거제도에서 대마도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대마도로 간다, 대마도로 간다를 속으로 끊임없이 외치는데 직관력이 아무 반응도 없다. 6등급 괴수를 상대하려니 살짝 겁이 났다. 빙룡이 잠들지 않았다면 자신만만하게 대마도로 향했을 것이지만, 빙룡은 아무 대답도 못 할 정도로 깊게 잠들었다.
"가자. 대마법사가 체의 가죽으로 만든 옷 한 벌은 있어야 품위가 살지."
체의 가죽은 매우 따듯하다. 알래스카를 횡단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신기로서는 체의 가죽이 절실하다. 물론 그것만이 원인이 아니다. 모산도사는 일본의 7등급 괴수가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신기는 그 전에 6등급 괴수와 한번 붙어보고 싶었다.
"어차피 퀘스트를 완성하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 내 힘이 6등급 괴수에게 얼마나 먹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신기는 직관력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면 곧바로 방향을 틀 생각이다. 오룡신기를 하나씩 모을 때마다 자신은 강해진다. 오룡신기를 다 모은 다음 도전하면 피해가 커지겠지만 신기는 안전하다.
바닷물이 빠르게 얼어서 얼음이 되었다. 신기가 걸음을 옮김에 따라 앞의 바닷물이 얼고 뒤의 얼음이 녹았다. 중간에 멈춰서 배도 채우느라 대마도에 도착하는 데 열 시간이 걸렸다.
"직관력이 잠잠한 걸 봐서는 6등급 괴수도 별거 아닌가 보군."
정보가 적은 환경 혹은 위험한 환경이 되면 직관력이 날뛴다. 하지만 신기는 다른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다. 대마도의 면적이 너무나 컸다. 탐지 마법도 불가능한 신기이기에 발품을 팔아야 한다. 생각 같으면 블리자드를 광범위하게 전개해서 괴수를 끌어내고 싶은데 마력이 부족할까 시도를 감히 하지 못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보자."
괴수는 추위를 싫어한다. 그러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따뜻해 보이는 곳을 찾으면 된다. 그렇게 오른 산봉우리에서 신기는 뜻밖에 사람을 만났다.
"나, 나를 구출하러 온 것이오?"
추위에 부들부들 떠는 남자는 서양인이었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남자가 입은 옷은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얇았다. 아마 마법이 가미된 옷인데 마력석이 떨어진 모양이다.
"아니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다."
"무엄하군. 난 대영제국의 백작이오."
"난 대한민국 왕자인데, 거기에 대마법사이기도 하고."
왕자라는 말에도 머리를 꼿꼿하게 쳐들던 남자는 대마법사라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대영제국 고위 마법사 앙드레입니다."
"마나친화력 10인 전설의 대마법사 신기라 한다."
신기는 마법 주머니에서 식량과 마력석 하나를 꺼내 앙드레에게 건넸다. 옷의 입력 단자에 마력석을 가져다 대자 너덜너덜하던 옷이 복구되었다. 음식으로 배까지 채운 앙드레는 신기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대단하시군요. 일반 옷인데도 추위를 전혀 타지 않으시다니."
추위를 타지 않은 것은 신기가 대마법사인 것과 상관이 없다. 비유의 고기를 너무 먹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추위를 못 느끼는 건 아니다. 추위는 추위대로 느껴지지만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을 뿐이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지?"
앙드레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형 거북선 한 척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물 마시러 나왔다가 대마법사님을 보게 되었지요."
고위 마법사라니 탐지 마법이 가능할 것 같다. 신기는 앙드레에게 질문했다.
"괴수의 위치를 아는가? 내가 사정이 있어 탐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앙드레는 곧바로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는 낯빛이 확 변했다.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우선 거북선에 숨어서 관찰을 해보는 것이 어떤가요?"
신기는 마법 주머니 안에서 심판의 검을 꺼냈다.
"따뜻한 홍차 한 잔 부탁한다. 괴수를 잡고 나면 항상 갈증이 오더라고."
앙드레는 급히 거북선으로 달려갔다. 변환 마법으로 거북선의 밑에 구멍을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함에 홍차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
체는 신기가 자신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기척을 발견하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체는 자신의 무지를 탓해야 했다. 신기 급의 심판의 검이 신기의 손에 들려있었다.
"얼음의 울타리, 천층."
신기는 굳이 묵영창을 들키기 싫기도 하고, 마법 명을 외치는 것이 품위 있어 보인다는 생각에 마법 명을 외쳤다.
"얼음의 상자."
우선 얼음의 울타리로 체를 겹겹이 감싸서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다음 얼음의 상자로 체를 가두려 했다. 하지만 체의 마법 저항력이 강해 얼음의 상자 속에서 격렬하게 반항했다. 내부를 타격하기 위해 체를 고정하고 입 혹은 항문을 공략하려 했는데 체의 신형을 고정할 수 없었다.
"얼음의 상자, 빙결."
얼음의 상자는 보존의 속성이다. 가두는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다. 체의 저항력이 너무 강해서 신기는 빙결의 속성을 추가했다.
"가시 고드름, 회전."
끝내 체의 앙탈이 끝나자 신기는 가시 고드름을 만들어서 회전시켰다. 체의 입과 항문을 향해 회전하며 신체 내부로 파고들려고 했다. 체는 입을 꾹 다물고 항문을 오므린 채 신기의 공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빙풍폭설, 일점."
신기는 그나마 틈이 보이는 항문에 범위를 한 점으로 좁혀서 빙풍폭설을 펼쳤다. 심판의 검은 범위를 조절하는 기능을 제외하고도 마법의 위력을 증가시키는 기능도 있다. 재료가 가지는 기본적인 증폭률이 높고 거기에 허금이 충분하여서 위력의 증폭에도 신경을 썼기에 일 점에 집중된 빙풍폭설은 한순간 체의 마법 저항력을 무효화시켰다.
"얼음 가시 꽃."
체의 항문을 뚫고 들어간 고드름에 얼음 가시 꽃을 사용했다. 체의 내부는 빠르게 재생했지만 신기의 공격도 끊어지지 않았다. 고드름들이 지속해서 투입되어 꽃을 피웠다. 결국, 체는 몸속에 얼음꽃을 잔뜩 피우고 꽃길을 걸어 저승으로 향했다.
대마법사의 품격에 어울리는 전투를 마친 신기는 심판의 검을 바라보았다. 체의 가죽을 벗기는 데 사용하면 이순신 장군님에 대해 불경이 아닌지 고민할 때 앙드레의 감격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에게 맡겨 주시면 세상에서 가장 품위가 넘치는 옷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 작가의말
내일부터는 연재가 규칙적이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시간이 나면 한 편이라도 연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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