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전반전만 조진다
기신이 펼친 진형은 정말 이상했다. 중앙수비수 자리는 딕슨과 마르코 및 블랙이 담당했다. 호세는 이들보다 조금 앞에 있었고 그 앞에는 차범수와 에두아도가 자리 잡았다. 수비에 치중된 선수만 여섯 명이다.
왼쪽에 스벤이 오른쪽에 보나비치가 자리했고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워드가 처음으로 정식 경기에서 선발 출전을 했다. 중앙 공격수로는 헌터가 출전했다. 이론상으로 노츠 카운티가 2:0으로 이기면 원정 다득점으로 결승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기신의 선발진은 양측의 수비를 아예 포기한 것으로 보였다.
리옹은 4-5-1의 진형으로 경기에 임했다. 리옹이 가장 많이 그리고 익숙하게 사용하는 전술이다. 지난 경기에는 4-4-2로 기신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두드렸지만 2골을 우세한 리옹은 이번 경기에서 변칙적인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변칙은 자주 사용하면 오히려 낭패를 볼 수 있다.
노츠 카운티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뒤로 돌린 공을 마르코가 앞으로 길게 찼다. 리옹의 감독은 큰소리를 뻥뻥 치더니 기껏해야 롱볼이냐는 의미로 비웃는 표정을 짓고 기신을 바라보았다. 그 장면을 카메라가 생생하게 담아냈다.
헌터는 두 명의 수비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공을 머리에 맞추었다. 헌터의 헤딩 패스를 받은 보나비치는 돌파를 시도하다 막히자 워드에게 패스했다.
워드에게 오늘은 기념적인 날이다. 정식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출전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워드는 후반전에 상대의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황에서 주로 출전했다. 체력이 풀인 수비수들에게 자신의 드리블이 먹힐지 궁금했는데 오늘 그 답을 알게 되었다. 워드의 공을 빼앗기 힘들어지자 결국 세 명의 수비수가 워드를 둘러싸게 되었다.
워드의 드리블은 매우 특이하다. 워드는 드리블하는 도중에 고개를 들어 다른 선수들의 위치를 확인한다. 보통 상대를 제치거나 거리가 어느 정도 확보된 안전한 상황에서 고개를 드는데 워드는 다른 선수들과 반대이다. 그래서 수비수들은 워드가 고개를 숙이고 드리블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워드의 왼발이 공을 멀리 떠나보내자 수비수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워드가 공을 찔러준 위협적인 공간으로 헌터의 거구가 표범처럼 날렵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키퍼가 급하게 달려 나왔지만 헌터가 먼저 공을 잡았고 그대로 강슛을 날렸다.
수비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헌터의 슈팅이 골대에 맞고 골라인 밖으로 흘러나갔기 때문이다. 수비상황이 되자 워드가 가장 앞에 남았고 보나비치와 스벤은 거의 윙백의 위치까지 내려가 수비에 가담했다. 헌터 역시 미드필드까지 내려가서 공중볼 다툼에 힘을 보탰다.
공격진은 내려오고 수비진은 적절하게 올라와서 미드필드에 압축된 수비선을 펼쳐냈다. 워드는 수비수의 위치를 확인하며 오프사이드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공을 받으면 드리블을 통해 다른 선수들이 올라올 때까지 공의 소유권을 지켜야 한다.
워드는 드리블은 매우 잘하는데 돌파능력은 약하다. 모순되는 것 같지만 속도가 느린 워드가 수비수를 제쳐도 곧바로 다시 따라오기 때문에 돌파능력이 약하다고 하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결국 수비수를 떨쳐내지 못하기 때문에 돌파가 아닌 드리블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차범수가 멋진 슬라이딩으로 상대의 패스를 차단했다. 차범수는 워드가 가장 부러워하는 선수이다. 체력이 넘쳐나는 차범수는 매일 4시간씩 개인훈련을 한다. 덕분에 지금 프리킥도 곧잘 차고 있고 패스의 질도 엄청 좋아졌다. 차범수가 공을 차단하자 헌터와 보나비치 그리고 스벤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범수는 공을 호세에게 패스했다. 호세는 최근 기신으로부터 새로운 롤을 부여받았다. 중앙 수비수와 미드필더의 사이에 서서 양쪽을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호세에게 특별한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것으로 호세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려는 목적이었고 다행히 기신의 처방은 매우 적절했다.
호세는 상대의 압박을 가볍게 떨쳐냈다. 뒤에 센터백들이 받치고 있어서 실수에 대한 부담을 덜었기 때문에 동작이 부드러웠다. 호세의 롱볼은 헌터를 찾았고 헌터는 가까이에 온 스벤에게 패스했다. 스벤과 보나비치는 상황에 따라 중앙 공격수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스벤은 기술이 아닌 속도로 돌파하는 스타일이라 중앙에서의 돌파는 많이 부족한 편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스벤은 곧바로 공을 워드에게 패스하고 터치라인으로 움직였다. 수비수 한 명이 스벤을 따라갔다.
에두아도와 차범수도 공격에 투입되어 공을 잡은 워드를 위해 수비수들을 분산시켰다. 능숙한 드리블로 두 명의 수비수를 달고 다니던 워드는 갑자기 헌터에게 공을 찔러주고 급정지를 했다. 헌터는 곧바로 180도로 몸을 돌려 달리는 워드에게 공을 돌려주었다.
수비수들이 급하게 워드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워드의 방향 전환이 너무 급작스러웠고 헌터가 공을 잡는 순간 주의력을 그쪽에 빼앗겼기에 한순간 워드를 놓쳐버렸다. 자유로운 상황에 놓인 워드는 2초도 안 되는 그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슈팅을 날렸다. 공은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키퍼의 장갑을 피해 골인되었다.
워드는 두 손을 번쩍 드는 것으로 세리머니를 끝냈다. 기신이 되도록 전반전은 다 뛰었으면 좋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세리머니를 하는 기운마저 아끼려는 것이다. 경기가 재개되자 워드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고 남은 선수들은 수비에 전념했다. 특히 보나비치와 스벤은 윙백 위치에서 수비했다. 리옹의 감독은 기신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복잡하게 굴렸다. 이대로라면 후반전에 체력이 소진될 선수들이 한둘이 아니다.
스벤, 보나비치, 헌터, 차범수, 에두아도 전부 90분의 경기를 끝까지 견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워드는 전반전에 교체되지 않을까 추측된다. 한참 고민하던 리옹의 감독은 선수들에게 수비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전반전만 버텨내며 워드를 내리고 어떤 전술 변화를 가져오는지 확인하고 그에 맞는 선수 교체와 전술 변화를 통해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첫 경기처럼 말이다.
리옹의 선수들이 공격보다는 수비에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자 기신은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되면 보나비치와 스벤의 체력소모가 적어진다. 차범수와 호세도 체력을 보전할 수 있고 말이다. 워드가 놀라운 드리블과 골 하나로 존재감을 크게 과시했고 그 존재감을 의식한 리옹 감독이 소극적으로 나왔다. 다행스럽게 여기까지는 기신의 계획과 일치했다.
천천히 걸어 다니던 워드가 급가속으로 수비수를 떨쳐내고 공을 잡자 두 명의 수비수가 달려왔다. 워드는 드리블을 자제하고 공을 차범수에게 곧바로 패스했다. 패스한 워드가 몸을 돌려 달리자 수비수 두 명이 워드를 따라갔다. 워드는 몸을 돌리면서 주먹을 쥔 상태에서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펼친 후 흔들었다. 워드의 뜻을 알아차린 차범수는 수비수들이 워드를 쫓아가면서 나타난 패스 루트로 날카로운 패스를 찔렀다.
유니폼을 잡는 수비수의 손을 무정하게 뿌리친 헌터는 아까와는 달리 강슛이 아닌 로빙슛을 날렸다. 골인이 선언되자 헌터는 아름다운 암컷을 발견한 발정기의 수컷처럼 경기장을 뛰었다. 흥분한 것도 있지만 워드에게 조금이라도 휴식을 더 주기 위한 목적도 있다. 워드의 근육은 무슨 분해 능력이 부족해서 쉽게 피로한다고 한다.
전반전 26분 만에 2:0의 점수가 되었고 이 점수로 경기가 끝나면 노츠 카운티가 결승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리옹의 감독은 선수 교체나 전술 변화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기신이 워드를 내리고 누구를 올리는지, 어떤 전술로 변화하는지 지켜본 후 선수 교체를 하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들어찼기 때문이다.
'생각의 작은 전환이 이렇게도 큰 효과를 보는구나.'
기신은 워드를 독이 발린 비수라고 생각했다. 쉽게 부러지기 때문에 상대의 무기와 부딪히지는 못하지만, 상대가 지쳤을 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치명적인 비수이다. 하지만 이번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여러 가지로 고민하다가 워드를 미끼로 쓸 생각을 하였다. 워드를 선발로 출전시켜서 상대 감독이 워드를 자꾸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워드가 내려간 뒤에 노츠 카운티가 어떤 전술을 쓸까에 집중하게 만들어 반응을 무디게 하고 전반전에 결판을 낼 생각이다.
후반전은 선수들의 투지를 믿을 수밖에 없다. 객관적인 실력 차이가 있고 전술을 소화하는 능력도 부족하므로 기신은 모험을 하기로 했다. 목표는 워드가 있는 전반전에 최대한 많은 득점을 올리는 것이다. 천재적인 워드가 일 년이 안 되는 기간 경험이 쌓이면서 더욱 날카롭게 변했기 때문에 가능한 기책이다.
블랙이 두 번의 실책을 범하기는 했지만 한 번은 마르코가 막아주었고 한 번은 터너가 막아주었다. 터너는 겨울 이적시장이 열릴 때 스무 개가 넘는 구단으로부터 오퍼를 받았지만 노츠 카운티 운영진이 전부 거절했다. 터너와 헌터가 없는 노츠 카운티는 이제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헌터는 예전에 악명을 떨친 적이 있어서 더 지켜보자는 심산인지 오퍼가 얼마 없었다.
전반전 35분이 되자 워드는 뛰지 못하고 걸어 다녔다. 워드의 체력이 다한 듯하여지자 리옹의 감독은 공격을 강화하라고 주문했다. 노츠 카운티도 처음과는 달리 헌터가 수비에 참여하지 않았다.
워드는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걸어 다녔다. 멈추면 더 달리지 못할 수도 있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마라톤이라도 뛴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멈추면 근육이 더 굳어질 것 같아서 계속해서 걸어 다녔다.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자 워드는 꿀에 이끌리는 개미처럼 공을 향해 걸어갔다. 보나비치가 돌파를 시도하다가 프리킥을 얻어낸 것이다. 킥하고 싶냐는 질문에 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앉았다 일어나면서 무릎과 발목을 점검했다. 생각보다 무릎과 발목이 아직도 아주 부드러웠다.
주심의 호루라기가 울리자 워드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가 공을 향해 천천히 뛰었다. 워드의 오른발과 짧은 접촉을 가진 공이 시원한 궤적을 그리며 골망을 흔들었다. 키퍼는 워드가 페이크라고 생각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3:0으로 점수가 바뀐 후 노츠 카운티와 리옹은 서로 공방을 주고받았다. 워드는 그저 어슬렁거리면서 걸어 다니기만 했지만 리옹의 수비수들이 위험 지역에서 감히 반칙하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덕분에 노츠 카운티는 공격 리듬이 쉽게 끊기지 않았다. 반면 주심이 노츠 카운티의 강한 몸싸움에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여 리옹의 공격은 맥이 뚝뚝 끊겼다.
끝내 전반전이 끝나자 워드는 잔디 위에 쓰러졌다.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힘이 풀려버린 것이다. 선수들의 부축을 받고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워드에게 관중들은 큰 박수와 환호를 안겨주었다. 노츠 카운티의 유로파리그 첫 골을 기록한 워드는 팬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 체력적인 문제로 많은 경기를 출전하지 못해 안타까웠는데 결정적이고 중요한 경기에서 멋진 활약을 하자 많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워드가 전반전에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후반전에 우리가 할 일은 워드가 만들어낸 승리를 어떻게든 지켜내는 것이다. 후반전에 노츠 카운티의 모든 것을 걸고 이 승리를 기필코 지켜내야 한다."
- 작가의말
새로운 맞춤법/문법 검사기를 발견했습니다. ‘빈 공간’과 같은 맞춤법도 지적해 주는군요. 덕분에 더 많이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존에는 띄어쓰기와 오타만 발견했는데 이 검사기는 문법까지 점검해줍니다. 요즘 네이버 검사기에서 수정할 것을 많이 발견하지 못해 조금 오만해졌는데 다시 고개를 숙이게 되었습니다.
다만 공격수 헌터를 자꾸 추적꾼으로 수정해서 골치 아픕니다.
네이버에서는 프리킥을 프리 킥으로 띄어쓰기를 하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붙여야 맞는 거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프리킥을 붙여 쓰도록 하겠습니다. 기존 부분은 일단 그대로 두겠습니다.
Commen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