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은천세가 소가주 천후(1)
143화.
외할아버지가 장내를 향해 역설했지만 웅성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나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이게 다 누님 탓이에요."
저벅저벅.
장연 누님을 쏘아 본후 외할아버지쪽으로 걸어 갔다. 중앙을 가로 질러 가는 어린 천후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왜 나온거냐?"
"외할아버지, 제가 선물한 함을 꺼내 주세요."
"...음."
함을 건네 받은 천후는 함안의 영약을 모두에게 보여 주며 보며 크게 소리쳤다.
"이 함안에 들어 있는 영약은 소화제가 아니라 진짜 영약이에요. 태극진인님, 이 영약을 잘라 보세요. 소화제라면 안쪽이 모두 소화제로 채워져 있을거에요."
"잘라 본다고 알수 있는게냐?"
"물론이에요. 이걸 준 노인의 말에 의하면 특별한 영약이라고 했어요. 일단 잘라 보면 아실거에요."
빈그릇안에 금명환 한알을 넣고 테이블위에 놓자 태극진인은 손가락을 세워 금명환 위쪽을 그어 내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금명환이 두쪽이 나 있었다. 손가락에 내공을 주입시켜 뻗어 내어 금명환을 가른것이다. 내공의 수발이 자유롭지 않으면 절대로 흉내조차 낼수 없는 경지였다. 두쪽이 난 금명환을 본 진인이나 외할아버지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음, 소화제는 아니구나. 그런데 저 물은 뭔고?"
"이, 이럴수가!! 저, 저건...어떻게 저런식의 내기가 존재할수 있단 말인가?"
"진인, 저 물이 뭔지 아는지요?"
"저건 물이 아니라 내기 그 자체로 기(氣)를 응축시킨것으로 영약이라고 해도 무방할겁니다."
역시 태극진인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바로 알아 보았다. 아까운 마나가 기화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저 아까운 영약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빨리 드세요."
"허허허, 그래야겠구나."
그릇을 들고 영약을 마시는 할아버지였다.
"좋구나. 역시 영약이 맞구나. 그런데 왜 소화제라고 한게냐?"
"그건 영약이라고 하면 외할아버지가 아까워서 드시지 않을꺼잖아요. 그래서 소화제라고 한거에요."
"아! 기특한지고!"
외할아버의 말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태도를 백팔십도로 바꾸며 천후를 칭찬하기 바빴다. 태극진인의 영약 감정으로 진품임이 드러나자 한알이 남은 영약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무인들은 눈을 빛내며 열려 있는 함의 영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탁!
"잘 간수하세요."
"그러마."
아버지쪽으로 걸어 가자 장연 누님이 얼굴이 빨개진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누님은 제게 빚 한개를 진거에요."
"미, 미안해."
천후가 만약 영약이 가짜라고 말한 누님 이름을 덜먹였다면 누님은 앞으로 얼굴을 들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을것이다.
"어떻게 그런 영약을 구한게냐?"
"아침에 장원 밖을 달릴때 어떤 노인이 장원벽에 기댄채 쓰러져 있었어요. 그 노인에게 먹을것을 주자 고맙다며 영약을 준거에요."
말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아버지는 더이상 물어 보지 않았다. 자신이 아침 일찍 장원 밖을 달리는 것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작은 소란이 일단락되자 흥겨운 환갑연이 이어졌다.
잔치에 빠질수 없는게 무공 시연이다. 운이 좋으면 태극진인에게 무공 지도를 받을수도 있었다. 그런 기대감에 양평 표국 소국주 아들인 외사촌이 창아 검법을 시연하고 태극장의 외사촌이 태극 검법을 시연했다.
태극진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공 시연을 본체만체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다른 중소 문파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도 등장해 무공을 시연했지만 천후의 눈에도 한심하게 보일뿐이었다.
복건성은 중원 변방이나 마찮가지로 뛰어난 무인들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런 이유로 절정 고수 한명만 배출하면 그 문파가 복건성 전체를 장악하는것이나 마찮가지다. 젊은 청년들의 무공 시연이 끝나자 태극진인이 천후를 지명했다.
"자아, 너도 무공을 펼쳐 보거라."
어쩔수 없었다. 나중이나 지금이나 어차피 맞을 매라면 빠를수록 좋았다.
"누님, 검 좀 빌려주세요. 이걸로 빚은 없는 걸로 할께요."
"검을 사용할줄 아는거니?"
"물론이죠. 목검이나 진검이나 똑같은 검(劍)자가 들어 있잖아요."
자신의 분신이나 마찮가지인 검은 함부로 타인에게 빌려 주는게 아니다. 그래서 빚을 들먹였다. 남자가 지니는 검보다 짧은 검은 어린 천후가 들기에도 충분했다. 검을 받아 들려는 천후에게 아버지가 제동을 걸었다.
"아직 넌 검을 만져선 않돼. 위험하다."
"아버지, 걱정마세요. 은천 검법을 펼칠 생각이니까요."
"조심하거라."
검을 들고 나가자 태극진인의 얼굴이 미미하게 변했다. 태극육합권을 펼치지 않은 탓이었다. 가볍게 포권을 하고 은천 검법을 시전한다고 선포한후 검을 빼어 들었다.
스릉.
은천 검법의 형(形)은 이미 모두 다 알고 있다. 아버지는 아직 자신이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완벽하게 펼칠수 있다. 아버지 앞에서 시전하던 것처럼 어슬퍼게 펼치느냐 완벽하게 펼치느냐 고민해야 했다.
쉬익!
슈슈슈.
베고 찌르고 당기며 완벽하게 은천 검법을 시전했다. 모든 검법이 그렇듯이 내공을 주입해야 온전한 위력을 발휘할수 있다. 이번엔 내공은 전혀 주입하지 않았다. 평범한 검법 시연이 끝났다.
짝짝짝짝.
작은 아이가 진검을 든것만으로 놀랐던 관중들이 시연이 끝나자 우레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포권을 하며 살짝 태극진인을 살폈다. 뭔가 못마땅한지 뚱한 표정이었다. 제자리로 돌아 오자 아버지가 놀란 표정으로 맞이해 주었다.
"그동안 속이고 있었던거냐?"
"죄송해요."
"아니다. 오히려 고맙구나."
아버지는 눈시울까지 붉어져 있었다. 천후로 인해 은천 세가가 다시 비상할수 있다고 생각하는듯했다. 환갑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밤 늦게까지 이어진 탓으로 동생들은 피곤한지 꾸벅꾸벅 졸아 먼저 재웠다. 천후도 장원으로 동생들과 같이 돌아와 쉬었다. 그럴때 태극진인이 직접 찾아왔다.
"왜 태극육합권을 펼치지 않은게냐?"
"그거야 제 맘이죠."
"껄껄껄, 그렇구나. 그래. 그건 네 맘이구나."
진인은 껄껄 웃어 넘겼지만 눈빛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진인의 태도로 볼때 펼쳐주지 않으면 계속 찾아 올것 같았다.
"딱 한번만이에요."
진인이 보는 앞에서 태극육합권을 시연했다. 이번엔 내공을 전혀 주입하지 않았다. 공기를 찢어 발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간간히 바람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 태극권은 어디서 배운거냐?"
시연이 끝나자 태극권을 의심스러워했다. 그에 대비해 이미 준비해 둔 대답이 있었다.
"할아버지에게요."
"할아버지가 절정이랬지?"
"예."
"혹시 무당산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는게냐?"
태극진인도 무당파 제자가 되라고 제안하고 있었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는 천후는 단번에 거절했다.
"음, 그럼 몸을 만져 봐도 되겠느냐?"
"에엑? 진인님 그런 취미였어요?"
"예끼놈! 근골을 살펴 볼려는거다."
"절대로 않되요."
기겁하는 천후의 행동에 진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장원을 나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외할아버지 일가 모두가 모여 다시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면 제각기 집으로 흩어질것이다. 이번에는 이모들의 비아냥거림도 없었다.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마치자 외할아버지가 자신을 불러 작은 주머니 한개를 용돈이라며 건네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개 남은 영약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효과가 사라져요. 오늘 당장 먹어 버리세요."
"껄껄껄, 그렇게 하마."
나중에 안 일이지만 외할아버지는 영약을 큰외백부에게 주었다.
***
"할아버지, 그렇게 된거니까 누가 물으면 그렇게 말해 주세요."
"네가...정말 무공을...창안했단 말이냐?"
"할아버지가 완쾌하시면 보여 드릴께요."
은천 세가로 돌아오자 마자 곧바로 할아버지를 찾아 장가장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하고 입을 맞추었다. 할아버지의 내상 치료를 앞당길 필요가 있었다. 장가장에서의 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은천 세가에 도착한지 3일후 우려했었더 일이 벌어졌다. 장연 누님의 스승이라는 무려 비연검이 방문한 것이다. 비연검 할머니를 본 천추나 천예는 얼굴이 무서운지 어머니 뒤로 숨어 들었다.
"비연검님은 식객으로 머물기로 했다."
"예엣?"
비연검과 대화를 하고 나온 아버지의 말이었다. 군식구 한명이 늘면 그만큼 쪼들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비연검을 홀대할순 없기 때문이다. 비연검이 식객으로 들어 앉은 다음날 이번엔 태극진인이 방문했다.
태극진인은 할아버지를 찾아 왔다며 할아버지 방으로 안내되어 갔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천후와 입을 맞추어 놓아 태극육합권은 별 문제없이 넘어 갈것이다.
태극권은 시중에 파는 흔한 삼류 무공 서적이 아닌 무당파 사대 제자들이 배우는 태극권과 육합권을 조합한 탓으로 진인이 알아 본것같았다. 방에서 쉬고 있을때 아버지가 불렀다. 할아버지 방으로 안내되어 간 천후는 태극진인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후야, 무당파로...갈 생각이 없는...게냐?"
"전혀요."
"진인께서 널....제자로 받아 들이고...싶어 하시는구나."
"장가장에서 거절했지만 누구 제자로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어요. 비연검 할머니도 제자로 들어 오라고 한걸 거절한 상태에요."
비연검을 들먹이자 태극진인의 안색이 돌변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비연검이 이곳으로 온게냐?"
"식객으로 머물고 있어요."
"...음..."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진인은 지긋이 눈을 감고는 반각후에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그럼 누구의 제자로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는거냐?"
"물론이에요."
"알았다. 나가 보거라."
비연검 할머니와 태극진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것 같았다. 태극진인은 그날 저녁 은천 세가를 떠났다. 식객으로 있는 비연검 할머니와는 하루에 한번씩 만나 무림에 대한 지식을 들었다.
예전에 영혼의 일부였던 청송이 은거에 들어 간지 수십년후에 자신이 이곳에 태어났다. 시간을 거슬러 온것이다. 남궁세가 태상 가주를 만나 환생에 대해 설명을 하면 반갑게 맞이해 줄것이지만 남궁 세가까지는 엄청난 거리다.
할아버지는 두달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담장밖에서 구해준 노인에게서 받은 영약이라며 금명환을 먹이고 사이킥으로 치료하는 속도를 높인것이다. 할아버지에게 네알을 사용하고 천추에게 한알, 아버지에게 한알, 천예에게 한알을 사용했다. 천추와 천예는 임독맥이 뻥 뚫려 있었다. 동생들이 잘때 임독맥이 막히지 않게끔 계속 뚫어 준 덕이다.
"정말 제자가 되지 않으련?"
"후우, 비연검 할머니, 아무리 제안해도 소용없어요. 그렇게 제자를 원하신다면 제 여동생을 제자로 받아 들이세요. 할아버지 말로는 여동생의 근골이 좋다고 했거든요."
아직도 동생들은 비연검 할머니 얼굴을 두려워한다. 동생들이 어린 탓도 있지만 무뚝뚝한 비연검 할머니 탓도 있었다.
"아, 그리고 할아버지는 내상이 치료되어 일어 나셨어요."
"호오, 경사로구나."
절정인 할아버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상 은천 세가를 무시하는 자들은 없을 것이다. 세가에서 내보낸 무인들도 몰려 들것이고 지역 유지들도 몰려와 아부를 떨것이다.
***
16살 성인이 되었다. 평균 수명이 짧은 중원에선 16살이면 벌써 성인이이다. 정정한 할아버지로 인해 은천 세가는 빠르게 예전의 성세를 되찾았다. 내보낸 무인들도 하나둘씩 찾아왔다. 3년전 은천 세가 구역을 먹어 치운 양선장(梁嬋莊)과의 대립이 있었지만 할아버지가 나서자 꼬리를 말고 도주해 버렸다.
이제 하문 지역은 완전히 은천 세가가 장악한 상태였다. 여동생인 천예는 10살때 비연검 할머니의 정식 제자로 들어 갔다. 천예의 몸을 살펴본 비연검 할머니가 임독맥이 전혀 막히지 않은 천예에게 경악하며 제자로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결실이 맺어진것이다. 무량 신공은 15살때 드디어 내단을 만들수 있었다.
내단이 만들어지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정도의 마나가 몰려 들어왔다. 가만히 있어도 절로 피부 호흡으로 마나가 쌓이는 것이다. 이미 은천 검법은 대성한 상태로 할아버지에게 더이상 배울게 없었다. 세가내에선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한 천후였다.
"허허허, 벌써 절정으로 들어 서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구나."
할아버지에게는 자신의 경지를 어느 정도 알려 주었다. 마음만 먹으면 사이킥으로 강환(罡環)도 시전할수 있다. 강기는 절정이상의 고수가 시전할수 있으며 강환은 화경이상의 경지에 도달해야 시전할수 있다. 절정은 중간계로 치면 소드 마스터다.
마나를 더 빨리 모으기 위해 복건성에도 용혈이 있는지 찾아 보았지만 찾을수가 없었다. 성대한 성인식이 끝나고 3일이 지났을 무렵 기이한 소문이 들려왔다. 하문에서 3일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이 통채로 불타고 주민들이 모두 뼈가죽만 남은채 앙상한 몰골로 죽었다는 소문이다.
흉흉한 소문에 하문 주민들까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정보 수집이 체계화되지 않아 하문 일대를 제외하면 장님이나 마찮가지다, 이계의 정보 길드에 해당되는 하오문이나 개방에서 정보를 수집해도 되지만 돈이 들어 가는 일이다.
"천후야! 네가 가서 조사해 보거라."
"예."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사건이 벌어진 마을로 갔다. 마을에는 관에서 나온 포졸들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어? 소가주님이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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