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자
그로부터 몇 달 후, 긴 겨울이 지나고 새싹들이 기지개를 켜는 어느 봄날, 드디어 세틴이 제국을 떠나는 날이 왔다.
저스틴이 황제로 즉위해서 조정이 어느 정도 틀이 잡혀 가자, 세틴은 먼저 제국군 사령관 직을 내려 놓았다.
새로운 사령관은 다름 아닌 고진이었다.
그리고 세틴과 시오미는 가까운 사람들 몇 명과 함께 프라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원없이 주고 받았고, 꾸준히 서신을 통해 소식을 전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상의해 오기는 했으나, 중요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멀린은 세틴이 새롭게 구상하고 있는 제국의 모습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동하지는 않았으나, 저스틴의 신정책에 앞장 서서 따른다는 의미에서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브라스트에도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했다.
현재의 대공령과 오스틴, 놀란을 묶어 새로운 주로 출범시키고, 나머지 4 백작령이 또 다른 한 주가 되는 셈이었다.
또한 대공이라는 작위는 그대로 유지하되 모든 행정적인 권한을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들에게 이양하는 데에도 협조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세틴과 시오미는 브라스트 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면 며칠 후에 세틴이 떠날 것을 알고 있는 조스핀은 결혼식 내내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축하 연회를 하는 자리에서 조스핀이 세틴에게 하소연을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네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너도 알다시피 멀린이나 나나 애틋한 정을 느끼는 유일한 아들이 바로 너였다.
그동안 네가 천년 제국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세우고, 제국이 새롭게 발전해 나갈 길을 열기 위해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을 벌인 걸 잘 알고 있어.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하느라 몇 년 동안 떠나 있었으니, 이제 집에 왔으면 최소 일 년이라도 살다가 가면 안될까 ?
보다시피 몇 년 사이에 나나 멀린이나 폭삭 늙었다.
두 오라버니께서도 이미 떠나셨으니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니.
너희에게 아이가 생길 때까지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내가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이 대목에서 조스핀은 다시 눈물보가 터졌다.
시오미가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는지 한 마디 보탰다.
“세틴, 어머니께서 저토록 원하시는데 한 번 쯤 소원을 들어드리면 안 돼요 ?
나도 부모님 곁에 살면서 사랑을 듬뿍 받아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큰데요.”
사실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사람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틴의 마음은 이미 끝없이 펼쳐진 대양을 건너 새로운 땅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은 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제가 제국에 남아 있는 한, 저스틴 형이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황도를 떠나 오는 순간까지도 황제보다는 제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도 아무 생각 없이 늘어지게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자칫 제국에 황제가 둘 있는 꼴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급히 떠나려는 겁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멀린이 물었다.
“그렇다면 왜 네가 스스로 제위에 오를 생각을 하지 않은 거냐.
그렇게 했으면 이런 문제도 없었을 것 아냐 ?”
“제가 황제가 되려고 했다면, 우선 기존 황실의 정통성을 완전히 부정해야 했을 것입니다.
저도 황제의 외손자라고는 하나, 사실 제국 황실에서 외척이 제위를 승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존 황실의 정통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황실의 썩은 부위를 말끔히 도려낼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황태자의 사위인 저스틴 형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고 나니 정통성 문제를 들고 나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멀린이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허허, 저스틴도 내 아들이니 황제의 아비가 된 것은 마찬가지이나, 나는 왠지 네가 스스로 제위에 올랐으면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야.
저스틴을 위해 네가 제국을 떠야 한다는 것도 쉽게 납득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이지.”
세틴이 말했다.
“누구 못지 않게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제가 두 분을 모시고 함께 사는 것이 마땅한 일이나, 지금은 제국을 위해 매우 중요한 시점입니다.
일의 경중을 무시할 수 없는 제 처지를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얘기들이 수없이 반복되었으나, 붙잡아 두고 싶어 하는 조스핀의 생각이 변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떠나고 싶어 하는 세틴의 마음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프라움을 떠나 온 세틴은 곧바로 항해에 나설 준비를 서둘렀다.
국정에 관한 문제를 상의하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물리쳤고, 심지어 저스틴이 불러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지 않고 떠날 준비에만 몰두하는 세틴이었다.
세틴은 주변 사람들 중 누구 하나 동행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모두 황도에 남아 새로운 제국을 위해 자신의 기량과 경험을 뽐내며 살아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세틴이 무슨 얘기를 해도 기어이 따라 나서겠다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바네사와 상카였다.
바네사의 말이었다.
“저는 지금까지 시녀장으로 살아왔고, 좋은 시녀장으로 살다 죽는 것이 유일한 꿈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께서 떠나시고 나면 저는 누구를 모셔야 할까요 ?
설사 그 사람이 황제라 하더라도 나는 모시고 싶지 않습니다.
내 살을 베어 내서 구워드려도 아깝지 않을 주인을 어디 가서 다시 만날까요.
절 두고 가시려거든 차라리 죽이고 가세요.”
상카의 말이었다.
“저는 원래 무식하고 막돼먹은 인간입니다.
조정에서 위세를 떨며 일하기에는 저 스스로 부족하기도 하고, 솔직히 조정의 관료라는 인간들이 너무 싫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바네사와도 이제 두 번 다시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바네사가 따라 나선다니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바네사가 현실적인 문제를 덧붙였다.
“이제 두 분이 결혼도 하셨으니 아이도 가져야 할 텐데 옆에서 제대로 보살펴 줄 사람 하나 없이 어떻게 무작정 여행을 하시겠어요 ?
아무튼 저는 따라 갑니다.”
무슨 말로도 두 사람을 설득하기 어려움을 깨달은 세틴이 말했다.
“정 그렇다면 좋아요.
다만, 한 가지 나와 약속할 것이 있어요.
제국을 떠나는 순간, 우리는 모든 신분과 지위로부터 완전히 해방입니다.
즉, 모시는 사람과 받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는 동등한 친구로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윗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함께 떠나도 좋아요.
그리고 그동안 함께 했던 하인, 하녀들은 누구도 데려 가지 않습니다.
신분으로 묶여 있는 아랫 사람은 이제 필요하지도 않고, 나도 정이 들대로 든 하인들도 많기는 하지만 이제는 헤어질 시간입니다.
필요한 일손은 계약을 해서 고용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틴, 시오미, 바네사, 상카를 중심으로 함께 떠날 사람들이 정해졌다.
용병대 시절부터 상카와 함께 해왔던 다섯 명이 합류했고, 배를 부릴 선장과 선원들도 고용했다.
선장과 선원들은 3 년 계약을 했다.
즉, 3 년 후에는 다시 제국으로 일단 돌아와야 한다는 제약이 생긴 셈이었다.
세틴에게 속해 있던 엄청난 재산은 오골보르를 통해 이미 저스틴에게 인계한 상태였으나, 저스틴은 재산 중 현금화가 가능한 대부분을 금은보석이나 마도구 같은 것으로 바꾸어 세틴에게 넘겼다.
세틴에게는 늙어서 죽을 때까지 세상을 돌아다녀도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정도로 많은 재산이 생겼다.
새로 건조한 세틴의 배는 알테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강력한 마력기관을 장착한 알테온은 날렵하면서도 단단한 외양을 자랑했다.
백 여 명이 탑승할 수 있고, 적지 않은 화물까지 실을 수 있는 배였다.
원래 세틴은 될수록 조용히 제국을 떠나 항행에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세틴이 아르가스에서 알테온이 오르는 날, 부두에는 미어터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아르가스까지 배웅을 나온 사람들을 그저 손 한 번 흔들어주고 말 수는 없어, 사람들과 일일이 작별 인사를 나누느라 보낸 시간이 한 나절이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출항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점심 때가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닻을 올릴 수 있었다.
특기할 만한 사람은 울라프였다.
그는 동부왕국에서 세틴을 배웅하기 위해 직접 아르가스까지 배를 타고 왔으며, 자신의 배를 한 동안 동행시키고 세틴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울라프에게 들을 이야기가 많은 세틴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울라프라는 사람이 얼마나 타인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가 많은 사람인지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할 수 있었다.
이미 전에 사흘 동안 동행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세틴이 제국을 떠나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감지한 울라프가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한 보따리 풀어 놓으며 이틀을 동행하다가 돌아갔다.
배가 워낙 단단하여 크게 울렁거리지도 않고 선실도 아늑하고 편안하게 잘 준비되어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시오미가 심하게 뱃멀미를 했다.
시오미는 전에 이미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한 경험이 여러 차례 있었던지라 스스로도 왜 그리 멀미를 심하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알테온은 그녀가 타본 배들 중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안정된 배였음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틀 동안 시오미를 세심하게 살피던 바네사가 세틴에게 말했다.
“틀림없이 임신이에요.
멀미를 하는 게 아니라구요.
두 분에게 아이가 생겼어요.
제국을 떠나 바다 위로 나오자마자 이런 경사라니......
봐요 제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요.
시오미는 이제부터 내가 잘 보살필테니 아무 걱정 마세요.”
세틴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결혼 이후로 피임 마도구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기에 은근히 기대를 하고는 있었으나, 생각보다 훨씬 일찍 찾아온 소식이었다.
어찌 보면 이는 향후 세틴의 행보에 제법 큰 영향을 끼칠 변수이기도 했다.
갓난 아기를 데리고 마구잡이로 험난한 모험에 뛰어들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 내가 아버지가 된다는 말이지요 ?”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일은 세틴이 전생에도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이곳에서 제대로 된 아들 노릇 하기도 만만치는 않았으나, 과연 스스로 좋은 아비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신은 없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만나고,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여정을 세틴은 그렇게 아이가 생기고 아버지가 되는 일로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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