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패배
반짝이는 철판을 물고기 비늘처럼 촘촘히 박은 베른의 갑옷은 보기에도 위압감을 주기 충분했고, 3 미르에 달하는 강철창은 끝이 바늘처럼 뾰족하여 찌르기에 특화된 무기임을 알 수 있었다.
세틴은 마상전투임을 감안해서 양손검으로나 쓸 만한 장검을 차고 있었다.
베른이 오른쪽 허리에 손잡이를 밀착한 창을 앞세우고 점점 속도를 높이고 있을 때, 세틴도 마주 달려 나가기는 했으나 검을 뽑지 않은 채 창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점차 거리가 좁혀지자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마상 전투에서 말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 게 당연했다.
충돌이 가까워지면 왼쪽으로 약간 선회하면서 오른팔에 든 무기로 상대를 공격하기에 유리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마상 전투의 기초적인 요령이었다.
베른의 입장에서는 긴 무기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가급적 거리를 멀리 벌리는 편이 유리했고 세틴은 말이 스치듯 지나치면서 상대를 조우하는 편이 유리한 상황이었기에 첫 싸움은 당연히 거리 싸움이었다.
첫 충돌은 세틴이 베른에게 유리한 거리를 허용했고, 베른이 돌진하는 속도를 이용해서 찔러오는 창을 검도 뽑지 않고 몸을 비틀어 피해내는 신기를 보여주면서 끝났다.
무기의 특성상 창끝만 회피하면 추가 공격이 불가능한 상황을 감안한 대처였다.
둘이 보여준 첫 충돌은 눈 깜빡할 새에 지나갔지만 연병장의 열기를 더하고 엄청난 함성을 불러 일으켰다.
기대했던 어떤 결과와도 다른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곧바로 속도를 줄이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돌진은 한 번으로 끝이었다.
돌진에 필요한 거리를 확보하자면 후방 공격을 감수해야 했고, 피차 간에 그런 상황은 피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근거리에서 무기를 맞대는 공방이었다.
세틴과 베른은 몇 차례 공격을 주고 받았으나 누구도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긴 무기를 지닌 베른이 불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베른의 공격이 무산된 후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공격해오는 세틴에 대한 베른의 대처가 훌륭했다.
재빠르게 창의 중간 부분을 옮겨 잡으며 회전시키는 공격이 일품이었다.
승부를 결정지을 기회는 여러 번 있었으나, 세틴은 베른의 역량을 시험한다는 의도가 컸기 때문에 공격보다 수비에 치중하는 편이었다.
10 여 차례 공방이 지나고 나자 베른은 일반적인 공격으로 세틴을 제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른의 공격이 점차 세틴을 향하기보다 테오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압도적으로 긴 무기를 가진 베른의 입장에서 직접 세틴을 공격하기보다 테오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편이 유리했다.
세틴은 이러한 베른의 대응에도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테오가 민첩하고 영약하다 하더라도 마스터에 가까운 무인의 공격을 감당할 수는 없고, 세틴은 방어해야 할 범위가 넓어지고 방어도 까다로울 뿐 아니라 거리를 좁힐 기회도 만들기가 더 어려워졌다.
세틴이 방어에 급급하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여러 차례 반복되던 중에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테오였다.
계속 해서 붙었다 떨어지는 교전의 와중에 어렵게 기회를 포착한 테오가 베른이 타고 있는 흑마의 뒷발 발목을 걷어차 버린 것이었다.
거대한 흑마의 신형이 순식간에 휘청거렸으나, 쓰러지지는 않고 버티고 있었다.
발목이 부러진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어떻게든 버티고 서 있었다.
역시 명마는 명마였다.
하지만 말이 기동성을 상실한 이상 마상 전투를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흑마가 주춤거리고 테오가 쌤통이라는 듯 우쭐대는 듯한 자세를 보일 때, 베른의 마지막 승부수가 터져 나왔다.
베른이 몸을 튕겨 올려 안장에 발을 딛더니 공중으로 솟아 올랐다.
베른의 창은 세틴이 아니라 테오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전광석화처럼 찍어내리는 창을 테오가 피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세틴은 하는 수 없이 테오에게서 뛰어 올라 베른의 창에 대응해야 했다.
세틴이 검으로 베른의 창을 쳐올려 테오가 무사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발이 먼저 땅에 닿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더욱 신기한 일은 흑마가 부러진 발목에도 불구하고 달려 나오며 베른의 몸을 받아낸 것이었다.
베른과 흑마가 이런 상황을 얼마나 대비해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승부가 분명하게 갈렸으나, 수 만 명이 운집한 연병장에는 침묵 만이 감돌고 있었다.
세틴을 신처럼 떠받드는 병사들이 대부분이었고, 돌로만 고원에서 할라크라는 어마어마한 괴물을 농락하는 장면을 목격한 자들이 많았다.
또한 베른이 승리를 차지한 방식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탓도 있을 터였다.
세틴이 납검을 하고 다가가자 베른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세틴이 베른의 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오늘의 승자는 베른 경이다.”
그제서야 고진이 깃발을 휘둘러 베른의 승리를 선언했고 여기 저기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베른은 함성에 화답이라도 하듯 연신 두 팔을 치켜올렸다.
세틴에게 승패는 사실 큰 의미가 없었다.
새로 합류한 장수인 베른에 대한 기대가 컸고, 그의 역량을 여러 모로 시험해보자는 마음이었으며, 제국군 병사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줌과 아울러 베른이라는 장수를 알리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세틴은 베른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역량과 자신감도 좋았고, 변화되는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이나 강한 승부욕도 나쁘게 보지 않았다.
마지막에 세틴이 패배를 감수하고 지켜주지 않았다면 테오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대목에서 베른의 인성에 대해 꺼림칙하게 생각할 여지가 없지는 않았다.
대련에서 이기기 위해 상관의 애마를 죽일 수도 있는 치명적인 공격을 서슴지 않고 행할 사람은 많지 않을 터였다.
세틴은 흑마에 대한 치료는 물론 튼튼한 마갑을 대련 승리에 대한 축하 선물로 주겠다는 약속으로 대련을 마무리지었다.
이번 대련으로 베른이 제국군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은 찍은 것은 분명했으나, 그것이 좋은 쪽으로 작용할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다.
범인을 뛰어넘는 역량을 인정받았다 해도 이기기 위해서 마지막에 한 행동에 대해서 그다지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승패를 떠나 개운하지 만은 않은 대련 결과에도 세틴의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환담을 나누던 호아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솔직히 베른이라는 물건이 좀 걱정되기는 합니다.”
세틴이 식기를 내려놓고 물을 마시고 나서 말했다.
“사람 속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베른을 크게 키울 생각입니다.
언젠가 뒤통수를 치거나 강력한 적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쓸만한 인재를 조그만 우리에 가둬 둘 수는 없습니다.”
호아니는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좋다고 자신할 수는 없으나, 베른은 누구에게 굽히거나 충성을 바칠 성격이 아닙니다.
자리가 높아지고 세력이 커질수록 그런 성향이 더 강해지는 유형이지요.”
세틴이 말했다.
“사람의 성격을 뜯어 고치기는 어렵지요.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힘든 커다란 약점이지만 스스로 깨우치기는 힘들 거에요.
그런 약점이 부각되지 않고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려면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겁니다.
하지만 베른은 배려를 아끼지 않아도 좋은 인재임은 분명합니다.
군사께서 유심히 살펴주세요.”
호아니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령관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 또한 군사로서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겠지요.
일단 제국군에 융화되는 과정이 어느 정도 필요하기는 하겠고, 가능하면 빨리 임무를 줘서 외부로 내보냈으면 합니다.
여기서 오래 지내다 보면 아무래도 불화와 갈등의 소지가 더 커지리라 봅니다.
마침 적당한 일이 있기는 합니다.
제국군에서 은근히 중요한 하나의 축이 바로 역참입니다.
지금은 혼란 중에 역참 체계가 많이 무너져 제대로 가동 중인 곳이 많지 않습니다.
우살리드와의 전쟁을 생각하면 제국 동부 가도의 역참을 재건하는 일이 가장 시급합니다.
전쟁이 본격화하면 역참 뿐 아니라 군수기지 역할까지 해야 하니까요.
올 겨울이 가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하니 시간이 넉넉지는 않습니다.
원래 난다 경을 책임자로, 역참 경험이 있는 잘낫 경을 보조로 파견할 생각이었는데 거기에 베른을 붙여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세부 계획도 짜고 준비가 필요할 테니 베른이 적응하는 것을 보면서 검토해 봅시다.”
며칠 후, 모그란데에게서 연락이 왔다.
황태자 옹립문제를 본격적으로 얘기해보자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시오미와 마주 앉은 세틴은 싱글벙글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는데 이제야 오셨군. 누굴 세우기로 했는지 물어도 될까 ?”
시오미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비밀도 아닌데요, 뭘.
3황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예상하신 거 아니에요 ?”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기는 하지.
이제야 얘기가 된 걸 보니 3황자가 꽤 많이 버틴 모양이군.
3황자도 호락호락하게 허수아비 노릇이나 하고 싶지는 않을 테고,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경험도 있으니까.
그리고 모그란데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옴비두스는 요즘 어때 ? 아마도 가시방석이지 않을까 싶은데......”
시오미가 말했다.
“나도 못본 지가 오래 되었어요.
황태자를 세우고 나면 섭정 자리가 없어지니 아마도 양부가 승상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옴비두스 성격에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에요.
둘 사이는 장군께서 입경하기 전부터 틀어졌고, 양부도 옴비두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하는 눈치에요.”
세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옴비두스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참견할 처지는 아니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무슨 짓이든 저지르고 남을 사람이라서.
그건 그렇고 이것을 한 번 봐 줘.”
세틴이 시오미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건냈다.
오골보르의 금고에 보관된 마법 유물의 목록이었다.
세틴이 직접 봐도 알 수 없고 이름에서도 용도를 짐작하기 힘들었기에 혹시 시오미가 알고 있는 유물이 있을까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시오미가 두루마리를 조금씩 펼쳐가며 꼼꼼이 목록을 확인했다.
간혹 머리를 손가락으로 두들기거나 낮은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목록을 끝까지 확인한 시오미가 물었다.
“혹시 이 유물들을 모두 갖고 계신 건가요 ?”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소유물의 일부이긴 한데 난 직접 봐도 무슨 용도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서 혹시 아는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거야.”
시오미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황궁의 보고라도 털었나요 ?
어지간한 귀족 가문에서도 이만한 유물들을 갖지는 못했을 거에요.
나도 이름만으로 알 만한 건 몇 가지 없네요.
일단 이 두 가지는 누구라도 꼭 갖고 싶어 할 만한 보물이에요.”
시오미가 두루마리에서 가리킨 두 가지 유물은 ‘방울새의 속삭임’과 ‘구름 속으로’라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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