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골보르 상단
상단의 일꾼이라 해도 믿을 만한 복장에 세틴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세틴은 2층에 있는 상단주의 방을 눈치껏 찾아 문을 두드렸다.
작은 키에 벗겨진 머리, 통통한 체구의 상단주가 세틴을 맞아주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황자님의 명으로 사령관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무디스 오골보르라 합니다.
무디스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오골보르는 5 대 전부터 황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상단입니다.
지금까지는 대황자께서 상단의 주인이셨지요.
대황자님으로부터 이제 세틴 사령관님이 새로운 주인이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하는 일에는 큰 변화가 없겠지만, 상단 운영은 전적으로 사령관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발생하는 수익의 처분과 중요한 투자에 대해서도 사령관님의 지휘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 뒤쪽 방에는 가지고 계신 반지로만 열 수 있는 금고가 있습니다.
금고에 무엇이 있는지는 저도 다 알지 못합니다.
나중에 직접 확인해보시고 마음대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앞으로도 비밀 금고로 사용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미리 준비라도 한 듯 무디스는 세틴이 듣고 싶어할 모든 얘기를 일목요연하게 전해주었다.
무디스가 직접 만들어 내놓은 차를 음미하면서 세틴은 오골보르 상단의 현황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오골보르는 평범한 상단이 아니었다.
황궁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품을 조달하는 창구로 공적인 조직에 가까웠다.
그런 만큼 터무니없는 폭리를 취하거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다.
제국이 혼란에 빠지고 세수가 줄어든 만큼 오골보르 상단의 활동도 위축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은 내고 있었다.
조정의 감시와 감찰이 철저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수익은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세틴은 무디스에게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얘기도 많았으나, 첫 만남임을 감안해서 현황을 정확하게 듣는 데 만족해야 했다.
제법 튼튼해 보이는 자물쇠가 달린 문을 세 번 지나고 세틴 홀로 들어선 금고방에는 양 옆 벽을 따라 여러 개의 금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세틴은 제일 안쪽 벽에 유일하게 설치된 금고가 월칸의 금고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세틴이 받은 반지의 모양을 음각한 문양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모양에 맞게 반지를 끼우자 딸깍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이 살짝 열렸다.
제법 육중한 금고문을 열어젖히자 금고 속 내용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금고에는 금, 은, 보석 따위는 없었다.
두툼한 서류뭉치가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확인해보니 황도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산재한 장원의 소유를 증명하는 문서였다.
줄잡아 수십 개는 되어 보였다.
금고에 있는 대부분의 물품은 유물이라 할 만한 장신구나 무구, 용도를 알 수 없는 장치 등이었다.
세틴이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으나, 추측하기에 금고 가득 금이나 보석으로 채운 것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가진 물건이었다.
세틴은 나오는 길에 무디스에게 장원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었다.
무디스는 각 장원마다 믿을 만한 관리인이 선정되어 있고, 그 전체를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해마다 수익금을 상납하고 있다며, 신경 쓸 필요 없이 자신을 믿어달라고 했다.
세틴은 금고에 있는 유물들을 계속 보관하기보다 곧바로 처분해서 현금화하기를 원했다.
군상 체계 구축과 제국군 재건, 무구 개령 등 돈 들어갈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서 더없이 귀중한 선물인 셈이었다.
세틴이 유물을 처분할 방도를 알 리 없었다.
가능한대로 빨리 처분할 수 없느냐는 물음에 무디스도 난색을 표했다.
대부분 자신이 구해준 물건들이라 알고 있는데, 엄청난 고가품이어서 구매자를 찾기도 힘들고, 더구나 요즘 시국에서는 판매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무디스는 자신이 구해준 물품의 목록을 찾아서 세틴에게 보여주었다.
대략 훑어보니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은 단순한 유물과 희귀한 마법 용구들로 나눌 수 있었다.
무디스는 자금이 급하면 10만 골드 정도를 오골보르 상단의 자금으로 구매할 수 있다 했다.
무리하면 그 이상도 가능하나 어차피 재 판매를 해야 하니 황실의 수요를 생각해서 미리 확보해두었다는 정도의 명분, 누구나 납득할 만한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세틴은 단순 유물 위주로 적당량을 골드로 바꾸도록 했고, 마법 용구들은 조만간 사람을 보내 확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일황자에게서 생각지도 않은 큰 선물을 받은 세틴은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일단은 호아니와 바네사에게만 새로운 자금줄이 생긴 사실을 알렸다.
이황자 골트릿의 집은 황궁 주변이라고는 하나 황궁 정문에서 서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황실 아카데미와 가까운 아담한 저택에 골트릿이 살고 있었다.
한 명의 아내와 열이 안되는 하인들이 사는 저택은 고즈넉한 느낌이었으나 그리 넓지 않은 식당은 오히려 활기가 넘쳤다.
골트릿과 함께 세틴을 맞는 외숙모는 얼굴이 붉고 활기가 넘쳤다.
직접 음식 준비를 한 듯 미처 앞치마도 벗지 않고 세틴을 반겼다.
“세틴이 외숙부, 외숙모님께 인사드립니다.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하여 입에 침이 샘솟고 있네요.”
골트릿이 따뜻한 손으로 세틴의 손을 감쌌다.
“어서 오너라.
나는 연금을 당했다고는 하나 사실 별 차이 없이 지냈다.
모그란데가 한때는 내 제자였거든.
내게는 아무런 제약도 하지 않았어.
몇 번 직접 찾아오기도 했고.”
외숙모는 말없이 세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웃을 뿐이었다.
현관의 오른쪽으로 난 문이 바로 식당 문이었고, 골트릿 내외가 세틴을 맞이한 곳도 바로 식당 문 앞이어서 들어서자마자 식당이었다.
골트릿의 아내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세틴의 앞에 몇 가지 음식을 직접 차려 주었다.
그리고 나서야 앞치마를 벗고 자신도 골트릿의 옆에 앉았다.
골트릿은 말없이 식사에 집중하는 편이었으나 많이 먹지는 못했다.
식기를 들고 연신 세틴에게 이것 저것을 권했지만 정작 자신은 작은 새우 한 마리를 입에 넣고 백 번은 씹는 식이었다.
세틴은 오랜만에 과식을 할 정도로 만족할 만한 식사를 했다.
자기 앞에 놓인 다섯 가지 요리 접시를 모두 비웠다.
외숙모를 향해 온갖 찬사를 늘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외숙모도 붉은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언제든지 밥 먹으러 오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식사후 옮겨 앉은 골트릿의 서재는 크지는 않지만 주인의 기품을 말해주고 남을 만큼 정갈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장식품이라고는 탁자 중앙에 놓인 등이 유일했는데, 골트릿은 마법등이라 밝고 냄새가 나지 않아 자신이 평생 아끼는 소장품이라는 것이었다.
“너에게 기대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잘 해낼 줄은 몰랐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네가 제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형님하고는 진즉에 공감하고 있는 사항이야.”
세틴이 빙그레 웃었다.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입에 올리기도 부담스러운 일이에요.
저에게 그런 뜻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판단하면 모그란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골트릿이 쓴웃음을 지었다.
“알았다. 우리의 뜻이 그렇다는 것만 염두에 두라는 말이야.
나도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형님이 제법 쓸만한 선물을 했다고 들었는데 마음에 드니 ?”
“물론입니다.
지금 저에게 제일 부족하고 필요한 것을 주셨어요.
큰 힘이 됩니다.”
“나는 무능해서 너에게 그만한 선물도 줄 수 없고, 도움이 되지 못할 듯하니 안타깝구나.”
세틴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숙부님은 저에게 더 중요하고 큰 선물을 주실 수 있어요.
모그란데와 관계가 나쁘지 않다니 더더욱 도움이 될 듯합니다.”
“흠, 그런 게 있어 ?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데......”
세틴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모그란데, 아니 북부군을 전장으로 내몰려 합니다.
북부군이 건재한 상황에서는 모그란데와 피를 보지 않고 넘어갈 방법이 없어요.
이제 황태자가 옹립되고 모그란데가 섭정에서 내려오게 되면, 누가 황태자가 되든 모그란데의 영향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지요.
이번에 모그란데는 군사적인 힘만으로 권력을 장악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을 겁니다.
제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무슨 공이 있느냐는 얘기가 계속 나올 겁니다.
모그란데가 저보다 먼저, 혹은 독자적으로 우살리드와의 전쟁에 나서도록 할 생각입니다.”
골트릿은 세틴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은 것은 물론 자신에게 뭘 해주도록 원하는지도 알아차렸다.
“그러다 모그란데가 우살리드와의 전쟁에서 대승이라도 거두는 날에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되지 않을까 ?”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그런 일이 있더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미뤄두고요.
모그란데는 황도가 걱정 되서 전쟁에 직접 나서지는 않을 겁니다.
병력도 상당 부분을 황도에 남겨두고 싶겠지요.
듣기에 우살리드가 상당히 강군이라 합니다.
모그란데가 그런 식으로 해서 다른 영주들을 닦달해서 병력을 추가한다 해도 일방적으로 이기기는 어려울 겁니다.
모그란데가 현명하다면 제게 손을 내밀겠지요.
어떤 식이든 우리가 참전하게 되면 모그란데가 공을 독차지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골트릿이 말했다.
“노스롭 토벌이 끝나고 나면 네가 모그란데와 승부를 보려 할 것이라 예상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나도 역시 그렇게 생각해서 만약의 경우에는 우리 일가족이 모그란데에게 몰살을 당하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어.
그래서 네가 제국군 사령관직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에 무척 놀랐지.
사실 당장 황도가 피에 잠기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던 것만도 대단해.
네가 주도하거나 계획한 일이 아니라 해도 황도에 입성하자마자 황자들의 연금을 풀게 만든 것도 좋은데, 모그란데에 대해 거기까지 대책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군략도 모르고 전쟁도 잘 모르니 네 판단에 맡겨야겠지.
모그란데가 군공에 애가 타도록 만드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듯 하구나.
따지고 보면 어디까지나 정도이지 속임수 따위도 아니니 말이다.”
세틴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모그란데의 입장이라 해도 어설프게 술수나 부려서 천하의 대권을 차지하겠다는 욕심은 과하지요.
일반 백성들은 차치하고 귀족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면서 대권을 노릴 수는 없습니다.”
세틴이 차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제가 모그란데에게 누구를 황태자로 세울 것인지는 일임했습니다.
사실 그것으로 연금 문제와 섭정 문제까지 타협을 본 셈이지요.
저는 모그란데에게 3 황자 말고는 대안이 없을 거라 보았는데 숙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3 황자께서 황태자가 되신다면 모그란데와의 관계가 어떨 것인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골트릿이 생각을 가다듬고 나서 말했다.
“황자들은 내 친 형제들이니 아마도 내가 가장 잘 알겠지.
형님과 나, 그리고 4 황자는 모그란데의 고려 대상이 아닐 거야.
5황자 트리엄은 일단 세력이 거의 무너졌다고 봐야 하니 적당히 조종하기 쉬운 인물이라고 생각할 여지는 있어.
하지만 정치적인 자질이 너무 떨어지고 성격이 급해서 공감을 얻기는 힘들지.
그리고 막상 황태자가 되고 나면 모그란데에게 고분고분 따를 거라 장담할 수도 없을 거야.
모그란데가 설리반 후작과 연대를 생각해서 6황자를 밀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
그런데 맬덤은 모그란데에 대한 반감이 워낙 큰 데다 황도의 귀족들을 대표하는 설리반이 모그란데와 협력을 선택하기도 쉽지 않을 거야.
무엇보다 그건 너에게 대적한다는 의미일 테니 귀족들의 뜻을 대표한다고 볼 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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