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틴의 선택
약탈 행위를 엄격히 금하고 제국 상인들이 돌로만 고원에 안전하고 자유롭게 출입하는 것을 보장하는 대가로 상인들의 부당한 거래를 엄격하게 단속하겠다는 협약이 세틴과 숄츠 총독의 보증으로 이루어졌다.
실제로 노스롭 반도에서 돌로만의 인간과 오크들이 실질적인 위협이 아닌 상황을 확실하게 만든 셈이었다.
세틴이 노스롭의 본영으로 돌아왔을 때, 황도로 파견했던 사절은 이미 돌아와 있었고, 휴가를 겸해 여러 임무를 띄고 제국 남서부와 에메랄드 호변의 영지들을 방문했던 호아니도 복귀해 있었다.
모그란데는 세틴이 제국 남서부와 노스롭 반도에서 행한 모든 조치들을 추인함과 동시에 세틴을 제국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겠다는 제안을 보내왔다.
모그란데의 속셈은 뻔했다. 이미 소수의 제국군을 이끌고 노스롭 반군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세틴이 이미 제국군을 명실상부하고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모그란데의 전횡에 반대하는 남부의 갈리온 후작과 북동부의 우살리드 백작이 이미 황도를 향한 진격을 꾀하고 있는 마당이었다.
세틴마저 확고한 적으로 돌아선다면 모그란데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세틴의 손아귀에 들어있는 제국군의 사령관직을 주는 것을 미끼로 일단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속셈이 너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제안이었다.
세틴이 모그란데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의 손을 잡고 제국을 안정시키는 일을 돕겠다는 의사를 보이는 셈이었다.
세틴에게는 모그란데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스롭이나 제국 남서부, 혹은 에메랄드 호변의 일정 지역에 둥지를 틀면서 모그란데를 축출하려는 다른 지역의 세력들과 같이 황도를 향해 진격한다는 선택도 있었다.
브라스트와 제국 서부, 남서부, 노스롭 반도까지 세력권이 되어 제국 전체의 삼분의 일에 달하는 힘을 갖게 된 세틴이 점차 제국의 공적이 되어가고 있는 모그란데의 손을 들어줄 이유는 없다는 것이 세틴 휘하 대다수 장수들의 생각이었다.
노스롭이 완전히 안정을 찾을 때까지 몇 달은 더 노스롭에 머물 예정이었다. 호아니가 제국 서부에 다녀온 주된 목적이 에메랄드 호 주변에 장기적인 세틴군의 본영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호아니가 가져온 성과는 에메랄드호 북쪽의 시건 백작령에 본영을 설치할 수 있도록 양해를 받아온 일이었다. 시건 백작은 아들이 없고 자신의 딸을 정실로 맞아준다면 영지를 아예 세틴에게 양도할 의사도 있다는 것이었다.
시건 백작령은 에메랄드 호변 영지들 중에서 가장 북단의 영지로 제국 서부 가도와도 가까워 세틴군이 장기적인 본영을 마련하기에 최적의 입지였다.
세틴은 노스롭이 안정되고 나면 바닷길로 놀란을 거쳐 브라스트로 갈 예정이었다. 나바니아와 오스틴 백작도 만나볼 수 있고, 육로에 비해 브라스트로 가는 기간이 절반 정도로 단축되는 길이기도 했다.
프라움에서 오랜만에 부모님과도 상봉할 수 있을 터였다. 시건 백작령에 마련된 본영에서 다시 합류한다는 계획이었다.
놀란으로 떠나는 배에 오르기 며칠 전, 세틴이 호아니와 마주 앉았다. 호아니는 세틴이 모종의 결심을 굳히고 마지막으로 그것에 대해 자신의 조언을 듣고자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거의 모든 장수들이 내가 모그란데의 제안을 거절하리라 생각한다고 합니다. 짐작하시겠지만 브라스트로 향하기 전에 방침을 확실히 정하고 싶어요. 오늘은 적어도 우리 둘 사이에서는 아무런 이견이나 의혹도 남기지 않도록 모든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호아니가 세틴의 눈을 한참이나 지그시 바라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장수들은 대부분 장군께서 어떤 결정을 하시든 두말 없이 따를 겁니다. 그런 마음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그란데를 제국의 반역자로 지목하고 황도로 진군해도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국군 사령관이 되시면 당장 북동부의 우살리드 백작을 토벌하고 남부의 갈리온 후작을 물리쳐야 할 텐데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요는 세틴군은 이미 제국 제일의 세력이 되었고, 어떤 선택을 하든 실패하지 않을 자신도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우선 하나 여쭙고 싶습니다. 장군께서 선택을 하심에 황실 마법 병단장과의 사적 관계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세틴이 주저없이 말했다.
“내가 사령관직을 받아들이면 아마도 모그란데는 바로 혼사를 추진할 것입니다. 내가 모그란데의 사위가 되고, 브라스트과 모그란데가 혈맹이 되고, 감히 도전할 자가 없는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겠지요.
시오미와의 관계는 당연히 저에게 매우 중요한 고려 사항입니다. 단, 그녀와 나는 정략으로 우리의 관계가 오염되기를 원치 바라지 않습니다.
모그란데와 일시적으로 손을 잡는다 하더라도 당장 혼사는 추진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녀를 모그란데에게서 뺐을지언정 선물 받지는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내 선택의 고려사항이 아닙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장군의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다만 저는 여전히 그렇게 간단치 않은 문제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공과 사, 큰 일 작은 일을 구분합니다. 하지만 장군은 이미 제국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위치에 오르셨고, 그런 분에게는 사적인 일도, 작은 일도 없습니다.
장군께서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시오미에게 일부일처제를 선물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사실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부다처제는 귀족들을 위한 특권과 부조리가 싹트는 근원 중의 하나입니다. 저도 귀족인지라 그저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있었을 뿐, 중요한 개혁의 과제로 고려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장군은 단지 사적으로 그 분 외에 다른 여인을 들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그분에 대한 장군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천하의 모든 귀족 여인들 뿐아니라 수많은 여인들이 환호할 것을 생각하면 저는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장군께 그런 질문을 드린 의도는 제가 장군님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본인의 감정도 소중히 하시라는 뜻입니다.”
세틴이 조용히 웃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새삼 깨닫는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사실 나는 모그란데의 제안을 받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지 꽤 됐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결정을 내리고자 하는 이유가 시오미 때문이 아닌지 스스로 수도 없이 질문을 던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이미 말씀드린대로입니다.
군사께서는 우리가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던 날을 기억하실 겁니다. 모그란데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 꼭두각시놀음을 해야 하느냐가 주제였지요.
사실 나는 지금도 비슷한 심정입니다. 굳이 모그란데가 아니더라도 멋모르고 누군지도 모를 어떤 존재가 써놓은 각본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불안감이 갈수록 커져요.
하지만 결론은 그때와 다를 바가 없죠. 어쩌겠습니까, 그저 마음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요.”
호아니가 물었다.
“저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여쭙고 싶습니다. 왜 모그란데의 제안을 굳이 받아들이려 하십니까 ?
모그란데를 역적으로 몰아붙이면 우리가 갈 길도 분명해지고, 대부분 영주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으며, 훨씬 쉬운 싸움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모그란데는 역적이지요. 황제가 엄연히 살아계시는데 황자들을 모조리 구금하고 스스로 섭정의 지위에 올랐으니 역적이 틀림 없습니다.
영주 귀족들이 대부분 그런 모그란데에 대해 반대의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나는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모그란데인가 천하의 귀족들인가.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면 지금은 모그란데와 손을 잡아야 합니다. 적어도 천하의 귀족들과 싸우고자 하는 점에서 모그란데는 우리의 동지입니다.
모그란데가 왜 우리가 상신한 안들을 모두 수용했겠습니까 ?
남서부와 노스롭 반도의 귀족들이 가장 중요한 계승권 박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들이 명분에서 지고 싸움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영주들과 합심해서 모그란데를 축출하는데 성공한다면, 다시 황실의 권위를 복원한다면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세상은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합니다. 더 많은 영화를 바라는 귀족들은 철저하게 깨져야 합니다.
모그란데가 지른 불이 더 크게 번져나가도록 할 생각입니다.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서 악마라는 말을 들을 지라도 지금은 싸움을 멈출 때가 아닙니다.”
호아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틴에게 엎드려 크게 절을 하고 나서 말했다.
“장군께서 진심으로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고, 백성들의 작은 고통에도 함께 아파하시는 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시간부로 모그란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 모든 대책을 세우는데 진력하겠습니다.
무엇에 중점을 두어야 할까요 ?”
세틴이 말했다.
“나를 제국군 사령관에 임명하면 모그란데는 아마도 섭정왕이 되고자 할 것입니다.
섭정이라는 직위는 이미 황도 안에서나 통할 뿐이니 나나 브라스트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한다면 왕작을 받는 것밖에 없지요.
이번에 모그란데를 확실한 역적으로 만들어 줍시다.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너도나도 앞장서서 모그란데를 쳐죽이겠다고 나서게 만들어야지요.
제국군 사령관은 받지만 브라스트와의 동맹이나 혼사는 일단 승낙도 거부도 아닌 상태로 계속 미룹니다.
왕이 되겠다고 하면 역시 방관합니다. 그러면서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다음 대책을 세우도록 합시다.”
호아니가 다시 물었다.
“휘하의 장수들에게 장군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밝히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군은 만 여 명이 추가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주력이 기존의 제국군입니다. 대부분 황도에 가족과 생활 기반이 있지요.
장군께서 제국군 사령관에 오르는 것도 싫어할 까닭이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모그란데와 손을 잡는다는 것보다는 ‘우리가 당당히 황도로 개선하여 황실을 굳건히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편이 좋겠습니다.”
세틴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좋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모그란데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어서는 안되지요.
일단은 내가 브라스트를 거쳐 시건에 건설할 본영에 합류할 때까지 확실한 방침은 정하지 않는 것으로 해두세요.
황도에도 어떤 언질도 줄 필요 없습니다. 지금 급한 건 모그란데지 우리가 아니니까요. 우리의 결정은 모그란데에게 늦게 통보할수록 좋습니다.”
노스롭에서 몇 달 머무는 사이 뜨거운 여름이 다가왔다. 그동안 드워프들은 마갑을 비롯한 무구들을 생산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세틴이 주문한 신종 활의 개발도 상당한 진척을 보았다.
세틴이 놀란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는 날, 세틴군의 본영도 본격적인 이동을 시작했다. 3만 여에 이르는 군이 스프링스와 바늘 요새를 거쳐 시건 백작령까지 가는 길도 한 달 이상 걸리는 여정이었다.
세틴과 함께 놀란으로 향하는 인원은 극히 소수였다. 놀란도 자신이 끌고 온 기병대를 모두 세틴군에 합류시켰고, 드워프와 엘프들도 계속 세틴군에 머물렀다.
하쿰은 인간의 군대에서 협력이 어려움을 깨달은 것도 있고, 돌로만 고원에서 만난 오크들에 대한 소식을 동족에게 전해야 한다는 일도 있어서 세틴과 함게 놀란으로 향했다.
세틴의 호위는 오클린 포함 세 명만 따라나섰고, 바네사와 몇 명의 하인들이 동행할 뿐이었으니 전체 인원이 30 여 명에 불과했다.
생전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는 배에 오른 세틴은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 아래에서 망망대해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끝없이 부딪쳐오는 파도와 그에 따라 출렁이는 뱃전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거스를 수 없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감정적 경험을 선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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