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군드라 강
영주들이 자기들끼리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주고 받는 가운데 소바리타가 다시 말했다.
“사령관께서 관대하고 뜻이 원대하며 제국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다는 소문을 그저 소문으로만 여겼으나, 이렇게 직접 만나 뵙고 우리를 대하는 처사를 겪고 보니 저는 진심으로 탄복하는 마음입니다.
사령관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황도로 진격했던 초기에 이곳 저곳 잘난 척 들쑤시고 다닐 때는 좋았지만, 사실 우리는 너무 지쳐 있었고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보내주신다면 즉시 북부로 돌아가 사령관님의 분부대로 재건에 모든 힘을 보태겠습니다.
나중에라도 제가 사령관님께 도움이 될 만한 일이 꼭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모든 영주들을 대신해서 깊히 감사드립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막상 직접 전투를 한바탕 치르고 나서 모그란데군에게 세틴이 느낀 감정은 측은함이었다.
모그란데는 정치적인 모략에는 누구보다 능할지 모르나 확실히 군사를 이끌 그릇이 되지 못했다.
장수들의 마음을 휘어잡지도 못했고,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릴 줄도 몰랐다.
무려 3 천에 달하는 기사단이라면 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막강한 무력이었다.
그런 기사단이 나름 제대로 준비를 해서 기습공격을 가하고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고, 초반에 자신들이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펼쳐지는 상황에서 순식간에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세틴의 판단과 결정은 빨랐다.
기사단 넷이 다른 곳에서 또다시 기습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세틴은 개의치 않았다.
첫 번 째 기습이 어긋난 사실과 벌어진 전투의 상황이 전해진다면 아마도 그들은 기습공격을 지레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따라서, 세틴의 결정은 ‘숨쉴 틈도 없이 거세게 몰아쳐 모그란데가 자군드라 강을 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는 전략이었다.
세틴이 직접 3 천의 기병을 이끌고 선봉에 서기로 했다.
별도로 기마정찰대를 신속하여 운영하여 그때 그때 포착된 적을 지체없이 때린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세틴이 이끄는 기마대가 출발한 것은 첫 번 째 전투가 끝난지 고작 네 시간 만이었다.
한편, 모그란데의 진영에서는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첫 기습을 나갔던 3천 기사단이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모조리 죽거나 사로잡혔다는 소식에 모그란데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어쩔 줄을 몰랐다.
아무리 전력의 차이가 크다 한들 무려 3 천의 기사단이 기습공격을 해서 어찌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전멸할 수 있단 말인가.
모그란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수군대지들만 말고 대책을 말해 보시오, 대책을.”
북부군의 주축의 되는 영주들과 동부왕국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기사단장 5 명이 모두 모여 회의를 열고 있었으나, 첫 전투의 처참한 결과에 망연자실할 뿐,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그런 영주들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계속 소리를 지르는 모그란데를 보다 못해 셔플린이 일어서며 말했다.
“승상, 먼저 진정을 좀 하시고 차분하게 대책을 논하시지요.
세틴이 개인적인 무력 뿐 아니라 전략 전술에 능하고 부대 운용을 기가 막히게 잘 한다는 얘기는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간 우리가 병력의 우위를 믿고 세틴을 상대할 대비를 너무 소홀히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단, 결과가 불을 보듯 뻔한 기습작전은 철회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계속 덤벼 봐야 적군의 사기만 올려주고 우리 군의 주력만 망가질 뿐입니다.
지금은 세틴의 진격을 어디에서 어떻게 저지할 것를 정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모그란데는 흥분과 분노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흥, 그대가 세틴을 우러러 보는 줄은 내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
꼭 그렇게 세틴을 하늘처럼 띄워주고 우리 군을 깔아 뭉게야 속이 시원한가 ?
하지만 마지막에 세틴의 진격을 저지할 대책을 세우자는 말은 그럴 듯 하군.
그에 대해서 의견이 있으면 모두 말해 보게.”
일전에 세틴을 찾았던 말로론이 말했다.
“이번 전투처럼 속절없이 밀리다가는 우리의 십오만 군대가 사냥개에게 쫓기는 토끼와 같은 신세가 될 게 뻔합니다.
지금의 기세라면 우리가 진지를 건설하고 있는 설루인 산 주변에서 그를 저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설루인 진지는 구축하기 시작한지 이제 겨우 오 일이라 서두른다고 해도 우살리드가 페링에 구축했던 진지보다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설프게 설루인에서 맞서려다 밀리는 날에는 우리는 자군드라 강을 건너서 도망갈 길을 찾기도 어려워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아예 자군드라 강변까지 물러나서 거기에 배수진을 치고 마지막 결전을 벌여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동부 세피우스 왕국의 기사단장인 칼리파라는 자가 나섰다.
“어찌 승상의 군대에는 용감하게 나서서 맞서 싸워보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오.
지금은 꽤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소.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착실하게 전열을 정비해서 세틴과 과감하게 맞서 싸울 수는 없는 것이오 ?
내가 우려하는 바는 지금처럼 지리멸렬하게 밀리다가 자군드라 강 서쪽을 세틴에게 완전히 내주고, 도망치는 모양새를 보였다간 승상의 군대는 끝이라는 사실이오.
승상이 제국 동부에도 제법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지만, 여기서 동부로 물러나는 순간 승상군은 승상군이 아니라 동부의 조그만 시골 군대로 전락하고 만다는 점이오.”
모그란데가 칼리파를 째려 보며 반박했다.
“그대는 내가 세틴에게 무조건 지고, 자군드라 강 건너로 도망치는 것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하는구려.
5만이나 되는 동부왕국군이 지금까지 제대로 나서서 한 번 싸움이라도 해본 적이 있소 ?
늘 강 건너 불구경하듯 참견이나 하지 않았느냔 말이오.
자군드라 강을 건너게 되면 내 꼴이 얼마나 우스워지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소.”
모그란데가 말을 하면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한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리 이렇게 서로 옥신각신 할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세틴을 막아설 대책을 마련하고 힘을 합해서 노력해 봅시다.
내가 여기서 완전히 패퇴하고 강 건너까지 내몰리게 되면 동부왕국으로서도 좋은 일은 아니지 않겠소.
우리가 한 번 강을 건너게 되면 다시 자군드라를 건너 황도로 향하기가 얼만 어려워질지 다들 충분히 알 거요.
셔플린은 말로론 백작의 안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
셔플린이 조심스럽게 다시 일어섰다.
워낙 장신인 셔플린이 일어설 때마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게 되어 모두가 상당히 불편해 하는 기색이었다.
모그란데가 셔플린을 주저앉혔다.
“그렇지 않아도 큰 사람이 걸핏하면 그렇게 벌떡벌떡 일어서는가.
그냥 앉아서 얘기하게.”
셔플린이 다시 의자를 당겨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설루인 진지가 미완성이고 방어 진지로 그다지 큰 위력이 없을 거라는 말로론 백작님의 말씀이 아마 맞을 겁니다.
배수진을 치고 마지막 결전을 벌여보자는 대책도 충분히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솔직히 우리 군의 사기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주력인 북부 출신의 병사들은 이미 고향을 떠나온지 2 년이 되어 갑니다.
처음 황도로 진격했을 때, 그리고 황도 북부에 진을 치고 황도를 호령할 당시에는 우리 군의 사기도 드높았습니다.
우리가 반역군으로 몰리면서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것도 사실이고, 모두가 쉬쉬하고 있지만, 세틴이 작정하고 우리 군 내에 퍼트리고 있는 소문 때문에 동요하고 있는 병사들도 적지 않습니다.
지치고 힘든 병사들에게 ‘여기가 마지막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마지막으로 힘을 내게 하는 데는 사실 배수진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세틴군의 규모가 너무 적고, 우리는 아직까지 세틴의 제국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배수진을 치는 것이 마지막 결전을 단단히 각오하고 비장한 분위기에서 사기를 끌어올리기보다, 왜 이렇게 속절없이 밀려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하는 의구심이 더 클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필승의 전략이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 번은 우리 군의 역량을 총 집결해서 세틴과 당당하게 결전을 벌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칼리파 장군께서도 아마 그 점을 지적하셨다고 봅니다.”
칼리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요.
우리는 동부왕국군의 주력이라기보다 선발대의 성격이 강해서 전면에 나서기를 꺼렸던 게 사실이오.
우리가 소극적이라고 비쳤다면 내가 사과드리겠소.
내가 보기에 우리의 최대 약점은 세틴군에 몇 명이나 있다고 알려진 소드 마스터의 부재요.
마스터 한 명의 무력이 문제가 아니라 불패의 자신감으로 가득 찬 마스터가 이끄는 부대는 그 자체로 전투력이 배가되는 법이오.
지금도 셔플린 자작이 대체로 올바른 전략을 풀어놓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내가 앞장서서 세틴과 정면대결을 벌이겠다고 나서는 장수가 없다는 사실이오.
마스터인 베그던의 이탈이 그래서 참으로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소.
그래서 내가 제안할 것이 하나 있소.
언뜻 생각하기에 우리가 병력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으니 포위해서 섬멸하는 작전이 좋을 듯하나, 제가 본 세틴군을 상대하기에는 적합하지가 않소.
어설프게 포위를 하려고 들었다가는 도리어 뿔뿔이 흩어져서 각개격파를 당하는 신세가 될 가능성이 커요.
어설프기는 완성되지도 않은 진지에 의지해서 세틴을 막아보겠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요.
진지전이 유리한 점도 많으나, 진지를 격파당하면 곧바로 패전의 분위기에 몰릴 수 있소.
여기서부터 자군드라 강 사이에 가장 넓은 평원을 골라 그곳에서 방원진으로 정면 대결을 펼쳐보는 것이 어떻겠소 ?
우리 전군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세틴이 어느 방향에서 공격해오든 힘을 집중하자는 거요.
우리가 방원진을 펼친다면 아마 세틴도 섣불리 공격에 나서지는 못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을 벌어 진지를 단단히 구축하든 자군드라 강변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준비하든 할 수 있겠지요.”
모그란데가 비로소 웃음을 보였다.
“하하, 서로 솔직하게 마음을 나누다 보니 좋은 대책도 나오는구려.
나는 칼리파 장군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네.
이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
누가 보기에도 수긍할 만한 만전의 대책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지금 모그란데군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는 그나마 설득력 있는 방책이라 할 수 있었다.
칼리파의 견해보다 더 나은 대책을 내놓을 자신이 없는 한, 누구도 입을 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렇게 해서 모그란데군의 다음 전략은 평원에서 대군이 방원진을 펼치고 세틴군의 진격에 맞선다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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