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되는 노스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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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모그란데에 대한 지지 일색이었던 조정의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모그란데가 황자들을 죽이지는 않았어도 조정에서 몰아내고 감금해버린 상황에서 황자들과 지방 영주들에게 선을 대고 있던 중앙 관료들이 모그란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게 된 국면이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자가 옴비두스 승상이었다. 마법사로서 매우 뛰어난 옴비두스지만 모난 성격과 순탄하지 못한 인간관계로 정치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고 숱한 반목을 일으킬 뿐이었다.
옴비두스의 제자들 중에도 실력 좋은 마법사는 꽤 있었지만 정치력을 발휘할 만한 자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황실 마법 병단이 출범하면서 옴비두스보다 시오미와 더 가까워진 자들도 많아지면서 옴비두스는 정치적으로 사실상 고립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오미가 어려서부터 막내 사매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나름 돈독한 관계를 형성한 제자들이 마법 병단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해까지 더해지면서 시오미와 급격히 가까워진 것이었다.
모그란데가 셔플린을 밀사로 파견한 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반전의 기회를 모색한 것이었다. 노스롭과 세틴의 세력을 자신의 휘하에 끌어 들이고자 했으나, 셔플린의 시도가 허무하게 무산되었다.
시오미는 이에 대해 모그란데는 세틴과 브라스트의 협조 없이는 더 이상 버티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므로 세틴에게 어떤 압박을 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적대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태도를 취할 것으로 예상했다.
길어진 초겨울 밤을 꼴딱 세우며 얘기를 나누고 날이 거의 밝을 즈음에야 침실에 든 세틴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시오미가 보내준 마도구를 꺼내들었다.
‘셔플린에게서 그런 전언을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내게는 당신의 마음이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나는 당신을 거의 잊고 살았어요.
살아남기에 바빴고 헛된 기대를 하고 싶지 않았지요.
모그란데는 나를 첩으로 삼고자 했고, 나는 죽이지 않을 거라면 양녀로 받아달라고 했습니다.
나를 용납해준 양부를 내가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정략으로 당신과 내가 맺어지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전장에서 만날 수도 있겠네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세상이 어떻게 흐르게 될지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당신이 내가 사랑한 유일한 사람으로 남길 바랍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은데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네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다시 없을 특별한 사람이라 직감했습니다.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 줘서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세틴은 온 세상을 선물로 받은 것보다 벅차고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도구를 다시 작동시켜보려 무진 애를 썼으나, 녹음은 일회용인 듯했다.
모그란데는 적어도 스승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딸과 같은 제자를 겁간하려 했던 옴비두스와는 격이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틴이 이미 정치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모그란데를 배신할 수 없다는 시오미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마땅히 존중해야 할 마음가짐이었다.
‘세상이 어디로 흐르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은 세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길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었다.
한참 전쟁이 진행 중인 가운데 포로들을 잘 먹이고 재우고 치료까지 마친 후에 석방해주는 일이 세틴의 군영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아무리 동족이고 같은 백성이라는 의식이 있다 해도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말단 병사들이 소모품으로 취급되는 세상이었다.
그냥 놓아준다는 말에 포로 대부분이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노스롭의 군영으로 돌아가 봐야 다시 죽음의 전장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며칠을 버틸 수 있는 비상식량까지 지급받고 떠나는 포로들 중에 군영으로 되돌아 가는 자는 극소수였다.
5천 가량의 정예병들과 함께 군영 공격을 맡게 된 가우디와 배커는 젊고 호전적인 장수였다. 세틴의 참모로 배속되었을 때, 반발하였다가 전투의 최선봉에 서게 될 거라는 세틴의 말을 듣고서야 수긍했던 바로 그들이었다.
오랜만에 작전의 전권을 쥐고 내로라 하는 정예병들을 지휘하게 된 두 장수들이 신바람을 냈다.
수만의 군대가 주둔하는 군영을 둘러 싼 목책에는 허술한 구석이 없을 수 없었다. 심지어 목장의 경계에 가로막대 정도를 걸친 수준인 곳도 허다했다.
그런 곳들이 가우디 군의 일차 목표였다. 빠르게 접근해서 목책을 우수수 부수고 달아나는 작전에 노스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군부대의 진입이 비교적 쉬운 곳에는 튼튼한 목책과 녹각과 같은 돌진 저지용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런 곳들이 불타고 허물어지는 곳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스롭군이 허물어진 목책조차 제때 복구하지 못하는 정황이 뚜렷해졌다.
가우디군이 점차 과감하게 노스롭 군영 안쪽까지 파고 들어가 닥치는대로 죽이고 부수고 불지르고 돌아다니다 빠져나오는 작전까지 펼치는 가운데 마침내 보카수스 자작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노스롭 군영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지 않아 무조건 항복하고 싶다는 보카수스의 전령이 찾아왔다. 세틴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쟁의 전환점이 다가온 셈이었다.
세틴은 보카수스 자작에게 직접 찾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전령은 노스롭 군이 추격할지 모른다는 변명으로 시간을 좀 달라 했으나 세틴의 태도는 단호했다. 당장 군영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있는 노스롭이 보카수스를 추격할 정신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이튿날 보카수스가 몇몇 가신과 함께 세틴의 군영으로 들어왔다. 보카수스는 삼십대의 비교적 젊은 영주였다. 젊기도 하고 당장 얼마 안 가 보카수스가 세틴의 수중에 들어갈 상황이어서 가장 먼저 용기를 내 전선을 이탈했을 터였다.
가신들이 엎드려 절하며 투항의 의사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 보카수스의 태도가 어정쩡했다.
세틴에게 가볍게 목인사를 하는 정도로 꼿꼿이 서서 말했다.
“보카수스를 다스리고 있는 에밀로 보카수스 자작이오. 나는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으니 세틴 장군이 잘 헤아려주길 바라오.”
세틴이 한참 동안 에밀로를 바라보다가 상카를 향해 명했다.
“에밀로 보카수스를 당장 끌어내 참수하시오. 다시 명령을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형의 집행을 서두르세요.”
에밀로의 낯이 흙빛이 되었다.
“이보시오. 세틴 장군. 항복한 영주를 처형하는 법이 어디 있다는 말이오 ?”
세틴의 호통이 추상같았다.
“그대에게는 제국의 법이 그렇게 우스운 것이었나 ? 제국의 법 어디에 반역을 했어도 항복을 하면 살려주라는 조항이 있지 ? 두말 할 것 없다. 에밀로를 즉시 처형하라.”
마침내 보카수스는 신형이 무너져내리듯 바닥에 엎드려 눈물 콧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이고, 장군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어리석어 장군을 시험하려 했습니다. 장군께서 자비로우시다는 말만 듣고 어줍잖은 체면을 세우려 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가신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주군을 구하기 위해 통사정을 해댔다.
세틴이 ‘저 한심한 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말했다.
“즉시 처형하라는 명은 거두겠소. 하지만 당장 당신같은 사람하고 얘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소. 일단 물러가서 그간의 행적에 대한 취조에 충실히 임하기 바라오. 나중에 부르면 다시 보던가 하시오.”
세틴이 손짓으로 모두를 물렸다.
에밀로 보카수스는 이날의 행동으로 남서부의 영주들보다 못한 처분을 받게 되었다. 계승권, 군사권은 물론이고 재판권까지 박탈 당하고 말았다.
재판권은 영주들에게 핵심적인 권력 중 하나였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사형까지 내릴 수 있고, 각종 분쟁을 조정하거나 처결하는 권한을 잃었으니 에밀로는 말 그대로 이름 뿐인 영주가 되고 말 것이었다.
보카수스에는 별도의 판관이 파견되어 재판권을 행사하게 행사하게 될 예정이었다. 세틴이 재판권을 박탈한 이유가 있었다. 전후 사정을 가늠하고 제대로 처신도 하지 못하는 자가 공정하게 사리를 판단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남은 영주들 넷도 모두 노스롭 군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온지 며칠 지나지 않아 노스롭에서 다시 사절이 찾아왔다.
이번 사절은 노스롭 후작의 장남 건진 노스롭으로 20 대 중반의 잘생긴 청년이었다.
“세틴 장군께 인사 올립니다. 염치없지만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전승의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 일가의 목숨만 보장해주신다면 기꺼이 항복하겠습니다.”
세틴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건진을 바라보았다.
“나는 처음부터 병사들의 희생과 백성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이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소. 이제 와서 목숨을 구걸하는 그대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이미 일가가 완전히 도륙당한 스프링스와 더그움, 두 가문을 어찌할 것이요 ?
그들의 원한을 누가 대신 감당할 수 있겠소 ? 자발적으로 군대를 해산하고 도주를 한다면 내가 며칠의 말미를 줄 수는 있을 것이오. 그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이오.”
건진이 자못 분노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진정 수백 년을 이어온 노스롭 후작가를 그렇게까지 짓밟아야만 한단 말입니까 ? 세간의 평판과 달리 세틴 장군은 참으로 잔인한 분이시군요.”
세틴이 말했다.
“그대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하지만 노골적으로 적대한 것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굴복하지 않는다고 유서 깊은 두 가문을 멸문시킨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닌 듯하오.
한때 제국 제일의 가문이라 불렸던 브라스트 대공가의 소가주로서 가문의 멸망을 안타까워 하는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스스로 저지른 죄업은 누구도 대신 갚아줄 수 없소.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상황이 아님을 아직도 모르겠소 ?”
크게 낙담한 건진은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한 번 봐 주시지요.”
건진이 상카를 거쳐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건냈다.
세틴이 읽어 보니 금은, 보석, 각종 마도구와 마석, 보물급의 무기와 갑옷 등의 목록이었다.
말없이 이런 목록을 보여주는 의도는 분명했다. 아마도 노스롭 가문이 오랫 동안 모아온 보물과 재산의 목록일 터였다. 누구라도 혹할 만한 막대한 뇌물이었다.
세틴이 조용하게 건진을 타이르듯 말했다.
“나는 그대 말대로 필요하다면 주저없이 사람의 목을 치는 잔인하고 냉정한 사람이오. 또한 브라스트에는 이것보다 수십 배는 많은 것을 갖고 있지만 더 많은 것을 탐하는 욕심 많은 사람이기도 하오.
하지만 이것으로 내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기대했다면 참으로 실망이 큽니다. 이것을 갖고 돌아가시오.”
세틴이 두루마리를 건진의 발 아래 집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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