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북부군
세틴은 크게 걱정은 하면서도 저스틴과 상카, 토마스가 하랑가에서 반드시 우살리드를 막아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전격적으로 하랑가 고원을 넘은 우살리드군은 지칠대로 지친 피로한 군대일 수밖에 없었다.
인적 하나 없는 사막과 같은 지역을 미리 준비한 식량과 물로 버티면서 건넌다 하더라도 적어도 6, 7 일은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북부 쪽에서 하랑가 방면을 어떻게 방어할지에 대해서 그쪽의 지형 등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예단할 수 없지만, 저스틴의 부대가 호아니와 베그던의 도움을 받는다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지키는 것은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세틴은 이번 기회에 우살리드를 하랑가 고원에서 고립된 처지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었다.
일단 모그란데를 자군드라 강 건너로 몰아내고, 여세를 몰아 북동부를 장악하게 된다면, 우살리드는 그야말로 갈 곳이 없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었다.
우살리드가 이제 막 하랑가를 넘기 시작했다고 본다면 북부 방면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몇 번의 교전을 치르고, 결국 북부 공략을 포기한 채 다시 북동부로 돌아가기까지 적어도 20 일 이상의 시일이 지나게 된다.
세틴은 그 이전에 모그란데를 몰아내고 자군드라 서편을 완전히 장악함과 동시에 북동부까지 진격할 생각이었다.
정찰대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모그란데군은 생각보다 차분하게 후퇴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서두르는 기색도 없고, 각 부대들이 서로 뒤엉키는 혼선도 크게 보이지 않았다.
현재 모그란데의 본진과 세틴의 진격군 사이에는 약 이틀의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세틴이 진격을 서두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원래 세틴의 사전에는 무턱대고 돌진하는 식의 진군은 없었다.
정찰 거리를 다소 줄이고, 휴식 시간을 짧게 하는 정도에서 단단하게 진군하고 있었다.
모그란데의 군영이 있던 지점에서 하루 행군 거리가 안되는, 야트막한 언덕이 양쪽으로 펼쳐진 지점에서 양군 간의 첫 번 째 교전이 벌어졌다.
모그란데의 지시를 받은 기사단 중 하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해왔다.
이곳은 언뜻 보기에는 별다를 것 없이 평범한 지형이었으나, 언덕 사이로 거의 90 도 가까이 꺾어지면서 경사길이 시작되어서, 기마군의 기습공격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기습을 미리 예상하기 어렵고, 기습을 알아차려도 대처할 시간이 짧았으며,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돌격하는 기사단의 기세를 배가되는 형국이었다.
3 천에 달하는 기사단의 돌격은 그 기세가 어마어마 했다.
자욱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언덕길을 치달아 내려오는 기사단은 수천인지 수만인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고,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만으로도 기겁을 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세틴의 정예군은 수백에 달하는 오우거와 혈전을 치룬 병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수많은 상황에 대비한 전술 훈련으로 단련된 군대였다.
하물며 가장 고전적인 기사단의 돌격에 대한 대비가 없었겠는가.
모그란데군의 기사단이 돌격하는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돌격하는 방향 정면으로는 삼열 횡대로 늘어선 장창병들의 창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만약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면 장창병들도 물론 무사하기는 어렵겠지만, 상중하로 빽빽하게 펼친 창막을 향해 계속 돌진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모그란데의 기사단이 모를 리 없었다.
일단 창막을 펼친 것만으로 기습의 기세는 한풀 꺾이고 말았다.
모그란데의 기사단은 창막을 우회할 길을 찾으면서 속도를 늦췄고, 그들의 머리 위로는 소나기처럼 새까맣게 화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기사들의 무장이 원래 일반 궁병들이 쏘는 화살로 치명상을 입히기에는 무리가 있다고는 해도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는 화살비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모그란데의 기사단은 이내 왼편으로 크게 우회하기 시작했다.
창막을 피해 측면으로 돌아 돌격하려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들의 지휘관이 처음의 돌격이 무위로 돌아간 순간, 이미 기습에 성공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왼편으로 크게 우회하여 후퇴할 길을 찾으려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면의 창막을 지나치는 순간, 자신들을 향해 돌격해 오는 일단의 기병부대를 마주해야 했다.
이미 기세가 꺾이고 도망칠 길을 찾고 있는 기사단에게 돌격해오는 세틴군의 기마대는 맹렬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등에 세틴을 태운 테오가 질주하고 있었다.
테오는 다른 말들에게 명령이라도 내리는지, 적을 겁나게 하기 위함인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나갔다.
세틴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마주친 예닐 곱 기사들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일단 전투에 돌입하고 나면 세틴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적들을, 특히 그 수장들을 도륙하곤 했다.
아군의 기세를 올리고 적의 사기를 꺾는 데에는 초반에 잔혹하고 압도적인 살육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음을 경험으로 통해 익히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틴의 주변에는 맞서 싸우려는 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가 도망칠 길을 찾기에 바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기사단에게는 불운이겠으나, 이런 식의 기습 공격은 세틴이 가장 일차적으로 대비하고 있는 공격이었다.
그러니 기습공격을 감행한 모그란데의 기사단이 초반부터 기세가 꺾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단히 포위를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적의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고 판단되자, 세틴은 항복을 받아내는 쪽으로 급속히 방향을 틀었다.
말에서 내려와 무기를 버리면 살려준다는 함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또한 세틴군의 훈련 과정에서 익히 다져온 매뉴얼에 따른 것이었다.
죽기살기로 끝까지 저항 하는 자들은 몇 되지 않았다.
평생을 기사로 살아왔고 싸움에 대해서는 나름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있다 해도 너무나 압도적인 기세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이런 식의 전투를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자신이 전쟁터에서 그토록 무력한 존재일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세틴군의 창을 든 병사, 방패를 든 병사, 멀리서 활을 겨누고 있는 병사 하나 하나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전사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세틴군의 기세를 직접 맞닥뜨리고 나서야 단순히 병력의 수로 자신들이 우위라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세틴은 전원 기사로 구성된 포로들을 세심하게 관리했다.
다친 자는 치료해주고 모두에게 따듯한 식사와 씻을 물, 그리고 갈아입을 옷까지 제공해주었다.
실제로 죽은 기사는 세틴과 몇몇 장수들이 기선 제압을 위해 처단한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처리가 끝나고 포로들이 식사까지 마치고 나자, 세틴은 그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이도록 했다.
삼천명의 기사 중에 죽은 자가 삼십여 명, 도망친 자가 십여 명에 불과했다.
세틴이 모여있는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제국군 총 사령관, 세틴 브라스트요.
서로 칼을 맞대고 싸운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천년 제국의 백성들이오.
이미 베그던 장군과 일부 투항한 귀족 및 휘하의 병사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간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들은 북부로 돌아가 완전히 망가진 북부를 재건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대들이 익히 들었겠지만, 투항한 장수나 병사들은 모두 여비까지 줘서 고향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오.
오늘 내가 싸우는 모습은 봤다면 나를 살인귀나 악마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오.
내가 내 목에 칼을 들이대는 자에게는 가차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맞서 싸웠던 적에 대해 한없이 관대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오.
그대들에게도 똑같은 대우를 약속하겠소.
끝까지 제국에 맞서 싸우겠다는 사람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항복하고 황실과 조정에 귀순하겠다는 약조를 하는 사람은 곧바로 방면하겠소.
그렇게 거짓으로 약조를 하고 다시 모그란데에게 돌아간다고 해도 개의치 않겠소.
각자 자신의 출신과 지위 등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밝히고 귀순의 의사를 담은 글에 서명만 하면 풀어줄 것이오.
그대들도 명색이 기사요.
기사로서 명예를 스스로 지킬 것으로 믿겠소.”
세틴은 기본적인 방침만 직접 분명하게 천명하고 곧바로 물러갔다.
뒤처리는 이제 토마스의 일까지 떠맡게 된 난다의 몫이었다.
포로 중에는 직접 자신의 기사단을 이끌고 참전한 북부의 젊은 영주들도 몇 명 섞여 있었다.
세틴은 영주들을 따로 불러 모았다.
영주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어떻게든 속여 넘기고 빠져나가려는 자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모인 영주들은 모두 여섯이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 신분을 속이고 다른 기사들과 섞여 지내다가 이곳을 빠져나가 다시 모그란데에게 돌아가려는 자들에 대해 세틴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돌아가서 전투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한다면 오히려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모여있는 영주들에게 영주의 신분을 속이고 오지 않는 자는 없는지 따져 묻지도 않았다.
“여러분을 따로 부른 이유는 귀순을 결정한다는 전제에서 할 말이 있기 때문이오.
내가 할 말은 기왕 귀순하겠다면 결정이 빠를수록 좋겠다는 점과 북부로의 귀환을 서둘러 달라는 겁니다.
베그던 장군과 먼저 귀순한 영주들이 북부로 돌아가 재건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일손과 물자가 부족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돌아가서 내 영지, 남의 영지를 가리지 않고 북부 전체의 안정과 재건을 위해 힘들 보탠다면 여러분이 무사히, 그리고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협조를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영주들 중에서 기골이 장대하고 걸걸한 목소리를 가진 자가 손을 들고 물었다.
“저는 소바리타 남작입니다.
사령관님의 말씀은 귀순 서류에 서명을 하기만 하면 오늘이라도 북부도 돌려보내줄 용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
세틴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다른 어떤 조건도 없소.
북부 재건을 위해 베그던 장군을 도와달라는 말은 단지 내 부탁일 뿐이오.
여러분이 얼마나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상황은 제국 사람들끼리 피흘리고 싸우고 있을 상황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같은 진영에서 익히 봐왔으니 동부왕국군이 본격적으로 국경을 넘어 제국을 침탈해올 날이 머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보다 더 잘 알 것이오.
브라스트과 노스롭, 에메랄드 호변 등을 비롯한 제국 서부는 이미 전란이 완전히 가라앉고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으며, 한 발 더 나아가 활발한 무역으로 생기를 회복하고 있소.
제국 전체가 안정을 되찾는다면 동부왕국 아니라 어떤 적이 몰려 오더라도 우리가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서둘러 북부로 돌려 보내려는 까닭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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