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니의 귀환
예상치 못하게 조기 귀환한 호아니를 보며 놀라기도 했지만, 세틴은 우선 반가운 심정이었다.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깊이있는 의논을 할 만한 상대로는 호아니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호아니의 현재 공식 신분은 제국 조정에서 동부왕국에 파견한 칙사였다.
원래 제국에서 외국에 파견한 칙사는 귀국해서 누구보다 먼저 황제를 배알하는 것이 법도였다.
즉, 황제를 만나 보고를 하기 전에는 어떤 공식적인 회합에도 참여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국군의 지휘관 회의에는 참석할 수 없기에 세틴은 서둘러 지휘관 회의를 마무리하고 호아니와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세틴이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전후 사정이야 어쨌든 군사께서 돌아오셔서 무척 기쁩니다.
아실지 모르지만 지금 이곳에서도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요.
내가 내색은 못하지만 속으로 애를 많이 태우고 있었답니다.”
호아니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나서 말했다.
“제가 사령관님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이렇게 일찍 돌아온 이유는 화급한 사정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동부 왕국에 더 눌러앉아 있어 봐야 크게 얻을 것도 없는 상황이기도 했구요.
이곳의 변화라면 모그란데와 우살리드의 연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세틴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군사께서 그것을 어찌 아시오 ?
모그란데나 우살리드도 아직까지는 명확한 합의점을 찾은 것 같지는 않고, 공식적으로 어떤 발표도 없었어요.
우리가 앞장서서 그에 대해 뭐라 말할 처지도 아니지요.
겨우 오늘에야 주요 지휘관들에게는 상황을 공유해야겠다 싶어서 지휘관 회의를 소집한 참이었습니다.”
호아니가 담담하게 말했다.
“동부 왕국에서는 한 마디로 이미 제국은 망해서 없어진 존재나 다름없이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명색이 칙사인 내게도 설설 기기는커녕 찬밥 대우였습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제국에서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다는 식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일찍 귀환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셨지요 ?
제가 동부왕국에 있는 동안 들은 얘기들을 종합하면, 그곳에서는 제국을 몇 갈래로 갈라서 요리하고 자기들이 어떻게 주도권을 잡아 나갈지에 대한 얘기들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모그란데와 우살리드를 연합시켜서 제국 중앙군에 맞서게 하자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르긴 몰라도 만약 모그란데와 우살리드가 연합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면, 거기에는 지금 동부왕국에서 파견나와 있는 자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망해가는 천년제국의 명줄을 그나마 붙들고 있는 것은 유일하게 세틴 사령관 뿐이므로 일차적으로 제국군을 와해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페링 전선에 변화가 있다면 모그란데와 우살리드의 연합 말고는 달리 생각할 것도 없다고 보았지요.”
세틴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동부왕국이 무슨 자신감으로 자신들이 제국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답니까 ?
동부왕국에 무슨 커다란 변화라도 있었던 겁니까 ?”
호아니가 잠시 침묵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동부왕국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지는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울라프라는 자가 있습니다.
울라프는 밝게 빛나는 검은 피부를 가진 머나먼 남쪽 섬나라 출신으로 동부왕국에 온 지는 이십 년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십이 년 전부터 포라쥬 왕국의 국왕 고문이 되었는데, 원래 포라쥬 왕국은 드래곤의 다섯 손가락 중에서 가장 약한 축에 속했습니다.
울라프가 국왕의 고문으로 취임하고 나서 포라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제는 포라쥬가 다섯 손가락을 주도하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지요.
울라프의 고향인 베얀크루는 크기가 우리 제국에 버금갈 정도로 커다란 섬인데 신기하게도 바다 위에서 움직이는 섬이라고 합니다.
베얀크루는 일년 내내 기후가 따뜻한 데다 토양이 매우 비옥하여 풍요로운 섬이라고 합니다.
울라프의 동족인 흑인들은 수 천 년 동안 다크엘프들의 지배를 받아오다, 최근 백 년 이내에 마침내 다크엘프들을 누르고 베얀크루의 지배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답니다.
흑인들이 다크엘프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힘은 그들이 마력을 다루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힘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마력포입니다.
마력포는 마력을 이용해서 커다란 쇠공을 멀리까지 발사하는 무기인데, 그 위력이 천 보 이상 떨어진 곳에서 발사한 쇠공이 단 한 방에 성문을 박살내고 바위로 쌓은 성벽을 무너뜨릴 정도라고 합니다.
울라프는 마력포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마력을 활용하는 다양한 기술을 포라쥬에 전해주었고, 정치적으로는 매우 포용적이고 자유로운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포라쥬의 민중들로부터도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모그란데에게 파견나온 동부왕국군은 전통적인 군대의 모습 그대로입니다만, 동부왕국에서는 마력포를 중심으로 새로운 전투 방식에 익숙한 본대가 대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제가 급히 귀환을 서두른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칫 제대로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동부왕국에 모든 것을 넘겨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컸습니다.”
호아니가 상황을 아주 축약해서 설명했지만, 세틴은 그렇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지구의 역사에서 익히 들었던 여러 상황들이 연결되며 호아니가 전해주는 말들이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울라프의 동족들이 개발했다는 마력포나 다른 기술들이 지구의 서양에서 발전된 과학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 해도, ‘서세동점’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들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세틴이 조용히 말했다.
“군사의 말을 들으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군요.
아울러 우리가 누구와 싸워야 하고, 어떤 대비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힙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우살리드의 부인인 샬롬이라는 여자의 이상한 망상 때문에 우살리드의 북동부군이 전혀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요인이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결국은 대세를 움직이는 힘은 따로 있었던 셈이군요.
그래서 군사께서 보시기에 우리가 울라프라는 자가 주도하는 동부왕국의 세력에 맞서기가 많이 힘들어 보이던가요 ?”
호아니가 신중하게 말했다.
“한 마디로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동부왕국군의 실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본 것도 아니고, 실제 그들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다만, 오래지 않은 기간에 울라프가 포라쥬와 동부왕국들에서 구축한 신뢰와 자신감이 놀라웠습니다.
울라프가 본국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본국으로부터 지원이나 개입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울라프가 어쩌다 동부왕국에 흘러들어온 개인으로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본국과의 연계가 있을 수 있고, 만약에 베얀크루에서 대거 병력과 물자가 넘어와 개입을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포라쥬를 비롯한 동부왕국들이 변화하고 발전했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베얀크루에서 직접 개입하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우리가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틴이 다시 물었다.
“혹시 마력포 말고 소형화된 개인 병기에 대한 얘기는 없었습니까 ?
마력포가 듣기에도 상당히 위력적인 무기임은 분명하지만, 그것 하나로 전장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대비만 한다면 말입니다.”
호아니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런 것이 있는지 여부를 단언할 수는 없으나, 제가 개인 병기로 활용되는 마력포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사령관님께서 말씀하시는 개인 병기라면 석궁처럼 개인이 소지하고 발사할 수 있는 무기겠지요 ?”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우살리드의 레인저부대에 맞설 대책을 생각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던 신무기지요.
시오미에게는 이미 기초적인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고 개발이 가능하지 여부를 위탁해 놓은 상태입니다.
사실 좋은 석재를 구하기 힘들어 성벽이 발달하지 않은 제국에서는 마력포의 위력이 그렇게까지 크다고는 볼 수 없을 거에요.
마력의 폭발력을 이용한다면 차라리 포보다는 개인 무기 쪽이 낫다는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우리도 개발을 서둘러야겠습니다.”
호아니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저는 처음 마력포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참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령관님께서는 도리어 그것보다 한 발 앞선 무기를 생각하고 계시네요.
제가 이렇게 부랴부랴 돌아온 것이 쓸데없는 호들갑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사령관님의 침착함과 대담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세틴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게 생각하실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설 속의 용이 살아 돌아와 하늘에서 불을 뿜어대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절 놀라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미리 충분히 조사하고 연구하고 대비하면 우리가 이기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비록 천년 제국이 망가졌다고는 하나, 우리의 저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한 발 앞서 상황을 파악하고 단단히 대비하면 됩니다.”
호아니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사령관님을 뵈니 마음이 놓이고 자신감도 조금 생깁니다.
솔직히 동부왕국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대비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새삼스럽지만 제국에 사령관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세틴이 말했다.
“어차피 군사께서는 맡은 임무를 마무리해야 하니, 황도로 가서 동부왕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고하시되, 다들 너무 겁먹지는 않도록 잘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시오미에게 군사께서 동부왕국에서 들은 마력포나 기타 마력을 활용한 기술들에 대한 가능한 상세하게 전해주세요.
아까 말한 개인 무기의 개발에 대해서 내가 가능하면 서둘러달라고 했다는 말도 전해 주시구요.”
호아니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조금 다른 얘긴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사령관께서 제위에 대한 마음을 확고하게 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황태자께서는 사실상 황제에 즉위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국을 원활하게 이끌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그란데가 황도에 진을 치고 있을 때는 그렇다 해도, 그가 물러난 이후에도 황태자에 대한 믿음이 갈수록 옅어지고 있습니다.
이건 제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황도의 여론이 대체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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