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 오디어스
시오미와 약속이 있는 세틴은 황궁을 빠져 나와 오골보르로 직행하고 싶었으나, 오디어스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디어스는 전과 달리 세틴을 무척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얼굴이 수척해졌다며 건강 걱정까지 해주었다.
황태자가 되기로 정해진 이상 모그란데와 맞서기 위해서 세틴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의도가 보이는 행태였다.
“황태자에 오르게 됨을 미리 경하드립니다.
이제야 황실이 정상을 되찾게 되어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황실이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모든 힘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세틴의 인사말에 오디어스는 기꺼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황태자가 된다 해도 황실이 당연한 권위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제 세상 만난 줄 알고 설치는 도적들이 한둘이어야지.
나는 오직 너만 믿는다.
지금 모그란데를 견제할 만한 사람은 너밖에 없어.
모그란데를 만나고 왔다고 ?
그가 무슨 소리를 하던가 ?”
세틴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자신과 황태자 사이에서 누구 편에 설지를 노골적으로 물었습니다.
저는 제국군 사령관으로서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고 답했습니다.
저는 항상 외삼촌 편이지만, 중립을 고수하는 모양새를 취하려 합니다.
모그란데는 자신이 궁지에 몰린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허튼 짓을 저지르고 남을 사람입니다.
저도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혹시 모그란데와 황궁 근위대를 어찌 할지에 대해 얘기가 오간 게 있습니까 ?”
오디어스는 언짢은 표정이었다.
“죽어도 못 내놓겠다더군.
이게 날 황태자로 세워놓고 수족을 꽁꽁 묶어두겠다는 소리지 뭐야.
마지막까지 그것 만은 어떻게든 받아내려 했는데 결국 포기했다.
사실상 황궁 근위대조차 내 손안에 쥐지 못한다면 말이 황태자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모그란데가 언제까지나 나를 제 발 아래 두겠다는 속셈인 거야.”
세틴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외삼촌께서 하나만 약속해주시면 제가 근위대를 빼앗아 오겠습니다.”
오디어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무엇을 말이냐 ?”
세틴이 담담하게 말했다.
“근위대에 관한 모든 사항을 저에게 일임해주십시오.
원래 황궁 근위대는 철저한 정치적 중립을 전제로 제국군이 관할해왔습니다.
무엇보다 황실이 반석 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더 이상 예기치 않은 변고나 수작질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저도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황궁을 맡겨주시면 어떤 경우에도 황실의 안위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근위대가 되도록 보장하겠습니다.”
오디어스는 반신반의였다.
“내가 널 믿는다 해도 모그란데가 순순히 내어놓을까 ?”
세틴은 여전히 담담했다.
“이미 그 문제에 대해 대략적인 합의를 보고 오는 길입니다.”
오디어스가 생각에 잠겼다.
세틴이 자신에게 불리한 무언가를 모그란데에게 약속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했고, 근위대가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되지 않는 상황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근위대가 모그란데의 손을 벗어난다는 자체가 그에게 손해날 일은 없었다.
세틴이 다른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해도 무조건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근위대를 내게 넘기는 편이 낫지 않을까 ? 내가 널 못 믿는 건 아니다만......”
세틴은 조용한 가운데 단호한 어조였다.
“외삼촌께 믿을 만한 장수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
기사급은 몇이나 되구요.
여기저기서 끼어드는 간자들을 단속할 대책은 있으신가요 ?
저는 근위대에 제국군에서도 강철 군기로 유명한 저의 친위대 일부를 투입할 생각입니다.
저에게 근위대를 맡겨주시면 외삼촌께서 모그란데에게 무력으로 위협당할 걱정은 하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당연히 제가 외삼촌을 무력으로 위협할 일은 결코 없습니다.
꼭 생각하셔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모그란데가 황자들을 잡아들이고 연금한 명분이 무엇이었습니까 ?
미령하신 폐하를 상태를 숨기고 황명을 조작했다는 것이었지요.
삼촌께서 근위대를 고집하시면 또다시 그런 시비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오디어스가 두 손을 들었다.
“내가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네 말대로 엄정하게 중립을 지키는 제국군에 맡기는 편이 누가 보기에도 제일 낫겠어.
네 뜻대로 하겠다.”
황제가 노망이 든 사실을 숨기고 황명을 조작했던 전력이 오디어스에게 가장 큰 약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이 문제까지 지적을 당하자 오디어스는 더 버티지 못했다.
왠지 세틴에게 한 방 먹었다는 느낌에 오디어스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내가 황태자가 되면 조정의 일대 개편이 불가피하다.
모그란데는 어떻게든 황자들의 연금 해제에 앞장섰던 대신과 귀족들을 배제하려 하겠지.
혹시 너는 특별히 대신으로 추천할 만한 사람이 없느냐 ?”
일종의 거래를 제안하는 의도가 보이는 질문이었다. 세틴은 간단히 잘라 말했다.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가능하면 파벌 색이 약한 사람들이 중용되었으면 합니다.
모그란데, 갈리온, 설리반 정도가 가장 강력한 파벌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들을 모두 배제할 수는 없겠지요.
저는 삼촌께 무리해서 사람들을 많이 밀어 넣는 모양새는 피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삼촌께서 원하는 사람들을 대거 등용하려면 다른 파벌의 사람들이 끼어드는 것을 막을 명분이 없을 겁니다.
자연히 조정을 다시 파벌싸움이 난무하게 되겠지요.
대신에 일, 이황자님의 도움을 많이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두 분이 권력이 욕심이 없다는 건 삼촌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두 분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조정에 황태자의 사람이 많은 것보다 나을 겁니다.”
오디어스는 혹 떼려다 혹을 붙인 격이었다.
세틴에게 사람을 추천받으면서 자기 사람을 밀어 넣는 데 협조를 구하려는 의도에서 세틴의 생각을 떠보고자 했는데 일거에 구박만 받은 셈이었다.
오디어스는 새삼 이 젊은 조카가 정말 만만치 않다는 걸 절감했다.
파벌을 배제한 채 능력과 명망 위주로 조정을 구성하고, 두 황자의 도움을 받는다는 그림이 정론이기도 했다.
이후에도 오디어스는 여러 주제로 세틴의 마음을 떠보고 협력관계를 강화해보겠다는 의도를 보이며 갈 길 바쁜 세틴을 붙잡아 앉혔다.
관저에서의 일정을 핑계로 간신히 빠져나온 세틴은 준비해온 마차에 올랐다.
오디어스의 사저에서 사령관 관저까지 거리가 멀지는 않았으나, 도중에 세틴이 변복을 하고 마차를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간 사실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시오미는 오골보르 상단주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오미가 오래 기다릴 것을 걱정한 세틴이었으나, 시오미는 웃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세틴이 오디어스에게로 간 사실을 알고 있었고, 세틴이 오디어스의 사저에서 나올 때에야 오골보르로 왔다는 것이었다.
무디스가 열어준 금고방에서 금고를 열고 시오미가 유물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방울새의 속삭임’과 ‘구름 속으로’를 어럽지 않게 골라내어 살펴보았다.
두 유물을 유심히 살펴본 시오미가 말했다.
“둘 다 상태가 꽤 좋네.
바로 사용할 수 있겠어.”
유물들의 상태가 양호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황자의 소유라고는 하나 사실상 황실의 재산이나 다름없고, 황실의 직속 상단인 오골보르가 관리해온 유물이었다.
시오미는 목걸이 하나를 스스로 걸어 옷 안쪽으로 밀어 넣고 다른 하나를 세틴에게 걸어주었다.
그리고 먼저 ‘구름 속으로’ 사용법을 설명해주었는데, 사용 횟수가 3 번 남았고 재충전이 가능한지는 나중에 연구해봐야 알 수 있다 했다.
‘방울새의 속삭임’의 사용법은 의외로 간단했으나 탄성이 나올만큼 정교했다.
납작하게 가공된 보석이 박힌 펜던트의 상단에 돌출된 작은 원통을 180도 회전해서 살짝 뽑아내면 작동이 시작되고, 다시 밀어 넣어 원래 위치로 돌리면 끊기는 방식이었다.
실수나 우연으로 작동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다.
착신 신호는 펜던트에서 몸에 접촉하는 부위가 살짝 뜨거워지는 식이었다. 비밀스러운 통신에 필요한 배려가 돋보였다.
시오미가 즐거워 하며 말했다.
“오늘 밤에 시험해 봐.
내가 먼저 신호를 보낼게.
그리고 소리는 아주 작게 들릴 것 같아.
거의 귀에 대고 들어야 할 수도 있어.”
언제든지 시오미와 교신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세틴도 마음이 들뜨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 있는 걸 다 주고 싶지만, 지금 가져가도 관리가 어렵겠지 ?
일단 몇 개만 골라서 연구해 봐.
천천히 살펴보고 있어.
온 김에 상단주와 상의할 일이 있으니 잠시 나가 볼게.”
세틴은 무디스에게 유물의 매각과 현금 인수가 순조로운지를 확인했고, 20만 골드를 시건 요새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 정도면 군상 체계 구축에 한층 가속이 붙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다.
시오미는 크기가 아주 작은 유물로 3 개를 골라놓고 있었다.
시오미를 먼저 보내고 세틴은 무디스와 여러 가지 일을 의논하다 어두워져서야 관저로 돌아갔다.
침실에서 쉬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에 세틴은 비밀스러운 움직임으로 침실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오랜만에 찾아온 난다가 바네사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세틴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와, 난다. 요즘 얼굴 보기 힘드네.
웬일로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야 ?”
벌떡 일어서서 군례를 올리는 난다는 어느덧 칼같은 군인의 모습이 역력했다.
“됐어, 얼른 앉아.
우리밖에 없는데 무슨 군례야.
온 김에 오늘 저녁 식사나 같이 할까 ?”
난다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녁 식사는 부하들 몇 명하고 선약이 있어서 어려워요.
몇 가지만 여쭤보고 갈게요.”
세틴이 마주 보며 웃었다.
“하하, 부하들을 먼저 챙기는 게 보기 좋네.
무슨 일인데 ?”
“동부 역참 복구 사업에 꼭 제가 가야 해요 ?”
세틴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응, 난다가 아니면 안돼.
단순한 역참 복구가 아니라 적어도 세 군데 정도는 유사시 병참 기지로 쓸 수 있도록 해놓아야 해.
당장 우살리드도 문제지만, 동부 왕국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첩보가 있어.
앞으로 동부가 우리의 주전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병참 기지이면서 필요할 때 바로 군영을 설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준비를 해야 하니 사업이 꽤 크지.
투입할 인원과 물자도 만만치 않을 거야.”
난다는 약간 난감한 기색이었다.
“이제 막 짜놓은 행정 체계가 제대로 작동될지..... 시간이 필요해요.”
세틴이 말했다.
“자리를 비우면 네 성에 찰 만큼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긴 하겠지.
하지만 나도 있고 군사도 있으니,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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