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그란데를 만나다
황도 도착을 이틀 앞두고 셔플린과 시오미를 비롯한 접객단이 모그란데를 대신하여 마중을 나왔다.
황도에 입경하는 절차 등을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접객단의 대표는 황실 마법 병단장인 시오미 모그란데였다.
세틴은 거의 2 년 만에 만난 시오미와 감회를 나눌 틈도 없이 군영 중심의 막사에 마련된 회의장에 마주 앉았다.
양측에서 5 명 씩 참석한 회의였다.
시오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국의 반역자 노스롭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평정하고 귀경하는 토벌군과 토벌군을 대표하는 세틴 장군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장군께서 섭정에 반기를 들 거라는 세간의 우려와 다르게 제국군 사령관을 맡아 제국의 안정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내려주신 데 대해 모그란데 섭정께서는 감사의 말을 전해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공식적인 개선 환영 행사는 황도 서문에서 시작하여 황궁 앞까지 행진을 하고, 황궁 정문 앞에서 세틴 장군께서 제국군 사령관에 부임하는 즉위식까지 이어질 예정입니다.
현재 동행하신 3 만 병사를 황도 안에서 모두 수용할 수 없으므로 3천 명을 미리 추려서 서문을 통과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병력은 중앙 제국군 주둔지로 직행하시면 되겠습니다.
모그란데 섭정께서는 노스롭의 반란 진압을 계기로 섭정왕에 오르고자 하십니다.
제국의 가장 큰 우려가 사라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제국 곳곳에서 음으로 양으로 반기를 드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왕작으로 섭정의 지위를 공고히 함으로써 제국을 안정케 하고자 하십니다.
그에 대한 세틴 장군의 의견을 들어오라 하셨습니다.
이는 장군께서 찬성하지 않는다면 굳이 강행하지는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틴이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온전치 않으시고 황자들이 모두 연금되어 있는 상황에서 섭정이 황실과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슨 공이 있어서 스스로 왕위에 오르겠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반대하지 않는다 해도 세상 사람들이 비웃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토벌군의 공이 섭정의 공이라고 주장한다면 굳이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모두가 제국과 황실을 위한 일이니 네 공 내 공을 따질 이유도 없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섭정왕이 되려면 우선 황자들의 연금을 모두 풀고 황태자를 세우는 일을 우선 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북부에서 데려온 병사들을 모두 돌려 보낸다면, 내가 앞장 서서 섭정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주청하겠습니다.”
비록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담겨있는 뜻이 단호하고 분명했다. 셔플린이 말했다.
“세틴 장군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여기서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섭정 전하께 분명하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섭정께서는 브라스트 대공 전하께서 대공비 전하와 함께 황도를 방문해주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대공께서 황도에 오시기만 해도 제국을 빠르게 안정시킬 수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장군의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세틴은 여전히 여유롭고 부드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섭정이 대공 전하를 초청해주신 것은 더없이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대공께서 이미 연로하셔서 장기간 여행을 감당하기 어려우십니다.
또한 이번에 제가 프라움을 떠나올 때, 브라스트의 대외적인 일에 대한 모든 권한을 내게 위임하셨습니다.
대공께 상의할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하면 됩니다.”
두 가지 사안에 대해 세틴의 의도를 미리 알아보려는 말들이었는데, 세틴은 거리를 두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셈이었다.
정국 운영에서 모그란데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할 의사도 없고, 양 가문의 동맹도 가시화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세틴 측에서 참가한 호아니와 세 장군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시오미와 셔플린의 말에 같잖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시오미가 일어서며 말했다.
“서문에서 행군 시작은 모레 정오입니다. 시간에 맞추어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서서 회의장을 빠져 나가던 시오미가 살짝 고개를 들어 세틴에게 옅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2 년 만에 만나 사적으로 단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세틴은 아쉬운 마음이 가득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찰나의 미소였지만 시오미를 위해 애태웠던 많은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 드는 세틴이었다.
접객단이 돌아가고 나자 고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정치를 모르지만 이번 기회에 황자들의 연금 문제와 황태자 옹립을 슬쩍 꺼내 드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의 한수입니다.
모그란데가 혹 떼려다 붙인 격이네요.
북부의 병력을 돌려보내면 생각해보겠다 하실 땐 하마터면 소리내서 웃을 뻔했습니다. 속이 시원합니다.”
세틴이 말했다.
“지금까지 고진 장군께서 그렇게 즐겁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는데 별 일이네요.
하하하. 사실 모그란데가 섭정왕에 오르고자 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말들입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모그란데가 호락호락 황자들을 풀어줄 리 없습니다.
눈엣가시같은 우리를 황도에 오래 머물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우살리드와의 전쟁터로 내몰려 할 테지요.
일단은 숙제를 던져 준 정도로 만족하고 시간을 끌면서 황도의 정세를 바꾸는데 주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적어도 1황자와 2황자 만이라도 연금을 풀어야 합니다.
그분들이 정국을 주도하지는 못하더라도 황도의 민심과 조정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에는 충분합니다.
두 분의 연금 상태를 풀어야 내가 모그란데에게 협력할 가능성이라도 생길 거라는 뜻을 보이려고 오늘 일말의 여지도 없이 강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 한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모그란데가 내 답변을 들으면 자신의 한계를 체감하게 됩니다.
스스로가 나서서 싸우고 누구라도 인정할 공을 세우지 않고서는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갈수록 줄어든다는 사실을요.
나는 우살리드와의 전쟁에 모그란데의 북부군을 앞장 세우거나,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도록 몰아갈 생각입니다.
언제까지 우리만 화살받이가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커티스가 말했다.
“우살리드는 원래 제국에서 손꼽히는 강군입니다.
아마 노스롭 군과는 비교도 안될 겁니다.
우살리드 백작가는 오랜 세월 북방의 야만족은 물론 끝없이 출몰하는 몬스터, 설산의 설인족과 싸워왔습니다.
우살리드가 군을 일으키자 북동부 영주들이 한결같이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고 들었습니다.
우살리드를 평정하려면 적지 않은 희생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모그란데의 군대와 협력하는 것도 공을 다투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겠지만, 우살리드와의 전쟁에 그들을 끌어들인다는 데는 적극 찬성합니다.
장군의 생각대로 움직여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국군 휘하에 병력을 보태주지는 않겠지요.”
상카가 말했다.
“제가 용병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을 모아본 데 따르면, 우살리드의 주력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레인저 부대입니다. 강력한 석궁으로 무장해서 거대한 몬스터까지 석궁 만으로 사냥할 실력을 갖추었다 합니다.
둘째는 설산표범입니다. 그들은 설산표범을 길들여 타고 다닙니다.
레인저 부대의 기동성을 높여주기도 하고, 설산표범은 말 못지 않게 빠르면서 강력한 전투력을 지녀 근접전을 보조합니다.
석궁 만을 무장한 레인저 부대를 대적하기 까다로운 이유입니다.
셋째는 설인족입니다.
설인족은 인간보다 키가 한 배 반 정도는 큰 거인인데 우살리드가 그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합니다.
의사소통이 가능해서 합동작전이 가능합니다.”
세틴이 말했다.
“말만 들어도 섣불리 맞서 싸우기 힘든 상대네요.
그들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확보하기 전에는 전투를 서둘지 말아야겠습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이미 우살리드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기는 했습니다.
지금은 우살리드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가 더 큰 문제입니다.
당장 황도로 진격하겠다고 나선다면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모그란데에게 반기를 들었다면 우살리드도 진격을 망설이지 않았을 테지만, 그도 상황이 변한 만큼 당분간 지켜보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세틴이 마무리를 지었다.
“황도에 입성하면 할 일이 무척 많겠습니다.
나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한 걸음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터라 살얼음을 걷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그동안 우리가 갖지 못했던 것들을 모그란데에게서 하나씩 가져올 수 있으니 두려울 이유는 없습니다.”
황도에 거주하는 주민은 대다수가 귀족이거나 군인의 가족, 상공업에 종사하는 자들이었다.
제국의 신민으로서 자부심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으며, 정치에 대한 관심도 높은 편이었다.
서문에서 중앙의 십자대로를 거쳐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황궁까지는 대략 만 보가 넘는 거리였다.
노스롭의 반란을 진압하고 개선하는 세틴군을 환영하는 인파가 거리와 주변 건물을 메우고 있었고, 환영 열기는 세틴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뜨거운 한 여름의 태양빛이 무색할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환호와 황도 전체를 뒤덮을 기세로 뿌려지는 꽃잎이 황도 주민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세틴군에 대한 환영 열기는 모그란데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황도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모그란데의 대군이 주는 위압감이 황도를 짓누르고 있었고, 제멋대로 황실과 조정을 주물러도 마음 놓고 불만 한 마디 내뱉을 수 없었던 한과 분노를 세틴군에 대한 환영으로 분출하고 있었다.
황도에 모그란데의 대척점에 서서 힘으로 맞설 세력이 들어옴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는 사실을 황도의 주민들이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고, 황궁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그란데는 자신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고서는 살아남기도 쉽지 않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모그란데를 비롯한 대신들이 연이어 등장해서 토벌군과 세틴에 대한 칭송의 말을 늘어 놓았으나 귀담아 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새삼스레 뜨거운 햇빛이 짜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비오듯 흐르는 땀에 지쳐갈 뿐이었다.
모그란데가 세틴에게 사령관의 홀을 전달하는 것으로 제국군 사령관 즉위식이 끝나자 다시 한 번 엄청난 함성과 환호가 터져나왔다.
황궁에 있는 모그란데의 집무실에서 마침내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세틴은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음료를 몇 차례나 청해 마시면서 모그란데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오십 대 중반의 모그란데는 얼핏 보아서 삼십 대로 보일 만큼 모든 얼굴선이 가늘고 깔끔한 인상이었다.
“자네가 이렇게 빨리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네.
이제 와서 내가 진심으로 손을 잡고자 한들 받아들이지 않을 걸 알고 있어.
그렇다고 내 제안을 그렇게까지 단칼에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
세틴이 짐짓 닳고 닳은 정치가의 흉내를 냈다.
“동맹 내놔라, 왕작 내놔라 하면서 뭘 주겠다는 말은 하나도 없더군요.
솔직히 섭정에게 실망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해도 반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보네요.
계속 그렇게 저를 깔보셔도 좋습니다.
내가 손해 볼 일은 없으니까요.”
모그란데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맞는 말이네.
평생 내 앞에서 자네처럼 말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지.
자네 아버지를 포함해서 제국에서 내가 마음대로 주무르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었지.
오늘 황도가 떠나가라 환호성을 질러대는 소리를 듣고서야 깨달았어.
더 이상 내 세상이 아니란 걸 말이야.
돌이켜 보면 6백작령에서 그림자가 실패했을 때 알아보아야 했어.
내게는 참 소중한 전력이었는데...... 정규군도 아닌 지방 영주의 기사단 정도에 무너질 실력이 아니었는데 몰살을 당하고 말았지.
그런데도 브라스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하긴 자네같은 사람이 등장하리라고 누가 알았겠나.
아무튼 충고 고맙네. 이제부터라도 대등한 입장에서 자넬 대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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