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전
“누나 하고 불러 봐. 예전엔 그렇게 잘도 불렀잖아.”
점심을 먹자고 세틴을 불러들인 프시니아의 말이었다. 공식석상에서의 거창한 말들과는 달리 둘 사이에는 유치찬란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어떻게 내 영혼이 타락했다는 증거가 된단 말이오. 그리고 내가 일곱 살 때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도 않지만, 공주가 그렇게 부르라고 강요하다시피 해서 몇 번 부른 것 뿐인데 이제는 남사스러워서 그리 못하겠소.”
프시니아는 세틴의 말을 듣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아니, 얘 좀 봐. 주변에서 13 공자라고 떠받들어주니 지가 무슨 어른이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네. 설마 너, 내가 널 좋아해서 그런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지 ?”
“착각 안 합니다. 그대 말대로 영혼이 타락해서 그런가 보지요.”
“그것 참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히 뭔가 있어. 어떻게 보면 세틴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혹시 너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니 ?”
“우리 좀 건설적인 얘기를 합시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든 없든 그것이 영혼이 오염되고 타락하는 것과는 또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
“상관이 있지. 불여우같은 여자가 달라붙으면 남자들은 타락하게 마련이거든.”
“그건 내 시녀장과 시녀들을 몰라서 하는 소리요. 세상의 어떤 불여우도 그녀들의 철벽방어는 뚫지 못할 것이오.”
“그럼, 그건 아닌가 ? 내가 세틴에 대한 정보는 누구 못지 않게 알고 있는데 말이야. 너, 대공 자리에 만족하려는 건 아니지 ? 설마...... 더 높은 자리를 노리는 거야 ?”
“그게 원한다고 될 일이요 ? 난 그저 갈수록 어지럽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남고 싶을 뿐이오.”
“속마음은 ‘무슨 수를 써서든 황제가 되고 말겠다’ 이건 거 같은데...... 말하는 거 보면 꼭 그런 건 아닌 듯 하기도 하고. 이 누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봐. 혹시 알아 ? 엘프들이 적극적으로 도우면 네가 황제가 되는 것도 꿈만은 아닐 수 있지.”
세틴은 푸시니아가 자신을 시험하는 것인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푸시니아 공주. 그대가 일곱 살 세틴을 염두에 두고 얘기를 하는 한, 진실한 대화는 힘들겠소. 열 다섯의 브라스트 대공가 13 공자를 있는 그대로 보고 대화를 한 준비가 되면 다시 봅시다. 지금은 내가 우롱당하고 있는지, 조롱을 받고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소.”
푸시니아를 만나고 돌아온 세틴은 여러 가지로 착잡하고 우울한 심정이었다. 푸시니아가 장난스럽게 던진 말들이 하나같이 세틴의 복잡한 심경을 건드린 말들이었던 것이아. 막상 프시니아에게는 밉다거나 억울하다거나 좋다 싫다는 감정이 전혀 없었다. 새삼 시오미의 행방과 안위에 대한 걱정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났고, 진정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은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졌다.
만 6 년 동안, 알바 자리 하나로 버티면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김성진이었다. 가슴 벅찬 기대를 안고 본격적인 공무원 생활을 해보기도 전에 생을 마감한 아쉬움이 어쩌면 지금 세틴의 행동을 규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오를 수 있는 데까지 오르고 싶었다. 푸시니아에게는 욕망으로 가득 차서 무슨 짓이든 벌일 인간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틀 뒤에 리스톤 백작이, 그리고 그 다음 날 거윈 백작이 나바니아로 왔다. 올란드 후작은 이틀 만에 리스톤과 거윈의 구호 물자에 대한 일들을 모두 마무리했다.
프라움으로 향하는 행렬은 규모가 꽤 커졌다. 사절단에 3 백작이 각각 수행원과 경비인력으로 100 명 가량을 동반했기 때문이었다. 기사만 하더라도 다해서 50 명이 넘는 대병력이었다. 그린테일 강에 도착하기까지 나바니아의 관사에서 3 번을 숙영해야 했다.
비교적 평탄한 지형인데다 군사인력만 해도 전쟁이라도 나갈 규모여서 행군 중에 습격을 받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나바니아의 관사들 주변에는 많아도 인가가 100호를 넘지 못했다.
그린테일 강 도착을 앞두고 점심식사를 준비하던 야영지에서 세틴이 올란드 후작에게 최수뇌부 만을 소집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날 밤 나루터에서 숙박지를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절단 수뇌부 4 인과 세 백작까지 일곱 사람이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막사에 모였다.
세틴이 사람들을 소집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틀 전 저녁부터 우리 행렬을 감시하는 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2, 300 보 이상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감시자들이 더 늘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밤에 일을 벌이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바니아 백작께서도 나루터 마을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오늘 우리가 관사에 주둔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주변 강가 적당한 곳에 야영지를 꾸리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의논하고자 모이자고 했습니다.”
나바니아 백작이 말했다.
“오늘 밤 습격이 확실하다면 오히려 관사에 머무는 편이 대처하기가 쉽지 않겠소 ? 전에 말했다시피 그린테일 주항의 관사는 방비가 꽤 튼튼하고 규모도 작지 않습니다.”
리스톤 백작이 그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13 공자가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런 모양인데, 이런 일에는 나바니아 백작의 판단에 맡기는 게 나을 것이오. 13 공자는 그린테일 주항을 가본 적도 없지 않소 ? 아무려면 관사보다 야영지가 방비가 나을 수는 없지 않겠소 ?”
세틴을 무시하는 듯한 리스톤 백작의 말에 셔틀리가 나서려는 걸 올란드 후작이 저지하며 말했다.
“일단 13 공자의 말을 다 들어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공자, 이 문제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소.”
세틴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동요하거나 흥분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주항의 관사는 군사적인 목적보다 징세와 치안을 위한 시설이라고 들었습니다. 잡다한 사람들의 출입이 잦을 것이고, 주변에 수많은 민간 건물들이 인접해 있습니다. 만약의 경우에 그곳에 상주하는 인원들의 혼란은 극심할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병법에 싸울 시간과 장소를 누가 정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저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관사가 아닌 야영지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대비에 유리한 장소를 고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제 생각에 그림자는 오늘의 거사를 미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일 강을 건너고 나면 그들은 적어도 하루는 늦게 우리 뒤를 쫓아오며 일을 꾸며야 하는데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이 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 우리에 앞서서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고 기습을 한다는 건 어렵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입니다. 지금 우리 행렬은 인원의 대다수가 군사인력입니다. 야영지를 꾸리더라도 일반 야영지가 아니라 군영을 설치할 수 있죠. 적당한 지형을 찾아 군막을 꼼꼼히 배치하기만 해도 저들을 함정에 빠트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이유입니다.”
거윈 백작이 말했다.
“가부를 떠나서 13 공자의 생각이 자세하고 치밀한 데 놀랐습니다. 나는 군사에 대해 워낙 무지한지라 딱히 할 말은 없소. 다만, 적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는 게 아무래도 꺼림칙하기는 하오.”
나바니아 백작이 말했다.
“13 공자의 말씀을 듣고 보니 주항의 관사가 허술하기는 합니다. 담장이 높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니 출입할 수 있는 문도 여럿이지요. 관사에 상주하는 인원이 적지 않은데 그들에게 기습이 있을 것이니 대비하라거나 피신하도록 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소. 문제는 적당한 야영지를 물색하는 게 가능하냐는 점이오. 당장 오늘 밤에 어디로 갈지를 도착해서야 정할 수는 없지 않겠소.”
세틴이 말했다.
“이틀 전, 감시하는 눈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오늘 거사를 치르게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내가 몇 가지 기준을 주고 이런 일에 능숙한 수하들을 미리 파견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주항에 도착하기 전에는 그들이 답을 가지고 합류할 것입니다. 야영지가 적절할지는 그때 다시 판단하시지요.”
“하지만 멀쩡한 관사를 놔두고 야영이라니, 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소. 우리가 그깟 도적떼가 무서워 피한단 말이오 ?”
리스톤이 끝까지 투덜거렸다.
“아니, 하루 정도 야영을 할 수도 있지. 누군들 불편한 야영을 좋아하겠소, 당신 몸만 귀한 줄 알지. 지금 당신보다 귀하신 몸들이 하나 둘이요 ? 촌구석에서 썩다 보니 귀까지 썩은 모양인데 그림자는 그깟 도적떼가 아니오. 그놈들이 얼마나 악랄하고 집요한지 들어보지도 못했소 ?”
거윈이 다시 리스톤을 타박했다. 리스톤은 자기 편을 들어줄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더 길게 말을 이어갈 생각은 없는지 거윈을 노려보며 혀를 찰 뿐이었다.
세틴은 이틀 전 깊은 밤에 저스틴, 상카, 울브린, 토마스를 지형 물색을 위해 파견하였다. 그들은 일행이 주항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정도 전에 복귀했고, 마침 적당한 곳을 찾아서 돌아왔다.
저스틴의 보고를 들은 수뇌부는 야영을 결정했다. 주항에서 15 분 정도 걸리는 하류 지점에서 그린테일강은 크게 휘어지고, 높게 발달한 주상절리대가 휘어지는 강물에 오랜 세월 움푹 파이면서 형성된 장소가 있었다. 주항에서 그곳까지는 꽤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일행은 주항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야영 장소로 이동했다. 선발대의 선택은 적절해 보였다. 안쪽으로 크게 휘어진 절벽은 위쪽에서 공격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였고, 야영지로 접근하려면 백사장이나 강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지형이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불을 밝히기도 어려웠고 군데군데 기름을 써서 밝힌 횃불은 제자리에서 표지의 역할을 할 뿐 컴컴한 밤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습을 예상한 사절단 일행은 상하 할 것 없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모종의 준비를 갖춘 채 대기하고 있었다. 야습은 사람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하고, 어쩌면 이대로 그냥 지나갈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싹트는 새벽에 시작되었다. 어디선가 사람 머리통 만한 불덩이 세 개가 동시에 날아든 것이 신호탄이었다.
매우 강력한 파이어볼 세 방의 뒤를 이어 수 십 발의 불화살이 몇 차례 날아들었다. 강 쪽과 백사장 쪽에 다닥다닥 붙여서 설치한 군막에 화재를 일으키려는 의도로 보였다. 그러나 불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데다, 세틴의 지시로 군막의 외곽 방향에는 두텁게 진흙을 발라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림자의 첫 번째 노림수가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었으나, 암살자들에게서는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작지만 날렵한 쾌속선에서 속속 상륙한 암살자들이 일시에 군막을 뛰어넘었다.
군막을 뛰어 넘은 암살자들이 마주 한 현실은 질서정연하게 도열하여 창으로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수많은 병사들과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곧바로 시작된 전투는 암살자들에게 불리하기만 했다. 외곽 막사와 2 열 막사 사이에는 네 길(사람의 평균적인 신장에 해당하는 길이 단위) 정도의 공간이 있었는데. 사절단은 외곽보다 안쪽이 높아지는 지형을 만들어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막사를 뛰어넘자마자 병사들의 창에 고슴도치 신세가 된 암살자들도 여럿 있었으나. 대부분의 암살자들은 병사들의 견제와 불리한 지형에도 기사들과 대등하게 싸울 정도로 높은 무위를 가지고 있었다.
함성과 비명,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 이어지는 걸로 보아 전투가 쉽게 끝날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병사와 기사 절반 이상을 투입하여 나름 철저히 대비한 외곽 막사 근처의 전투조차 쉽사리 이길 수 없다면, 예상보다 어려운 싸움이 될 터였다.
세틴이 기사단장들에게 말했다.
“저것이 그림자의 전력은 아닐 것이오. 필시 우리의 본진을 노리는 추가 병력이 있을 터이니 단장들은 본진을 사수하는 태세를 재정비 해주시오. 지금 전투는 내가 나가 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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