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군의 조건
놀란이 말했다.
“제가 수준이 높지는 않으나 파워 마법에 주력하고 있기는 합니다. 전장에서 마법을 활용한다면 가장 적합한 계열이지요. 화염이나 전격을 주로 사용하는 계열이 파워 마법입니다.
하지만 전쟁사를 통틀어 보아도 마법사들이 전세를 완전히 뒤집을 만한 활약을 펼쳤다는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현실적으로 최고위급이라 할 수 있는 7써클이나 8써클 마법사라 하더라도 단독으로 실행하는 마법은 수 명에서 수 십 명을 해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도 상당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고, 한 번 마법을 실행하고 나면 상당 기간 무력화되기 마련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마법 전력을 극대화하려면 많은 준비와 적절한 전술이 결합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미리 마법 효력을 극대화할 마법진을 설치한다거나, 다량의 인화 물질을 함정처럼 설치한다거나 하는 등입니다.
그런 것들을 미리 파악하고 대비하지 못한다면 생각보다 결정적인 효력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짐작컨대 황실 마법 전단에서 이런 전술들을 개발하는데 주력하고 있을 것입니다.
워낙 제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진 분야입니다. 차차 의논해 보지요.”
세틴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해했다.
“역시 놀란 백작께 말씀드리기 잘했습니다. 방금 하신 말씀만 들어도 눈앞에 안개가 걷히는 느낌입니다. 우리 군사참모부에 몇 명의 마법사들이 있으니 같이 연구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푸시니아가 입을 열었다.
“엘프의 비전을 함부로 누출할 수는 없는데...... 그리고 인간은 체형 자체가 달라서 엘프의 활을 제대로 쓸 수도 없다고. 사람도 많이 죽이고 나쁜 짓도 많이 했을 텐데 영혼이 전보다 나아진 것 같아서 상을 주고 싶기는 하지만 유감이네.”
세틴이 말했다.
“하하, 듣던 중 반가운 말입니다. 무시하는 척 하긴 했어도 영혼이 오염되었다는 말에 꽤나 상처를 받았거든요. 당연히 엘프의 활을 그대로 인간이 사용할 수는 없겠지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저는 몇 가지 새로운 유형의 원거리 무기를 개발하고 싶습니다. 크게 세 가지인데요. 사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린 무기, 강력한 방어벽을 무력화 할 대형 무기, 근거리에서 살상력을 극대화한 소형 무기입니다.
사거리는 전술적 우위를 점하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대형 무기는 여럿이 협력하여 발사하는 거대한 활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용도는 흔히 등장하는 목책이나 방패벽을 돌파하는 목적입니다. 근거리 무기는 돌격하는 기사나 기병대를 상대하기 위한 소형 활입니다.
푸시니아가 그런 무기들을 직접 개발하지는 못하겠지만, 각종 활의 재질이나 형태에 대해서 모우징에게 조언을 해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
푸시니아가 말했다.
“아, 몰라. 활을 쓸 줄이나 알지 한 번도 내 손으로 만들어 본 적이 없다고. 같이 온 엘프들에게 얘기는 해볼게.”
모우징이 물었다.
“원거리 무기를 개발하는 건 해볼 수 있겠지만, 말에게 갑옷을 입힌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들어보네. 무슨 생각인지 자세히 말해 보게.”
세틴이 말했다.
“기동력과 돌파력이 좋은 기병은 전장의 핵심 전력입니다. 그런 기병의 취약점이 바로 말이 적군의 원거리 공격에 노출된다는 점입니다.
정면보다는 측면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특히 취약한데 몸통 부위는 기승자가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고, 다리는 화살로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마갑은 머리와 목을 보호하는 것이 주 목적입니다. 머리와 목에 지나치게 부하가 걸리면 문제가 되므로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마갑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입니다.”
모우징이 싱겁게 웃었다.
“허, 날아오는 화살을 튕겨낼 정도로 질기면서도 가벼운 갑옷이라..... 그런 갑옷이라면 왜 굳이 말에게 줄까. 사람에게 입히는 편이 낫지.”
세틴이 말했다.
“물론 병사들에게도 될수록 더 좋은 갑옷을 입혀야 합니다. 내가 드워프들의 무구 제작 능력을 너무 무턱대고 믿었나 봅니다.”
모우징이 말했다.
“자존심을 건드려 봐야 소용 없네. 정성들여서 무두질을 하고 가공을 잘 하면 좋은 갑옷이야 만들 수는 있지. 하지만 웬만한 가죽으로 쓸만한 갑옷을 만들려면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지.
가죽이 좋으면 그만큼 빨리 만들어낼 수 있어. 가볍고 질기기로는 오우거 가죽을 따라갈 게 없다네. 오우거 가죽만 충분히 확보해주면 그깟 갑옷이든 마갑이든 얼마든지 만들어 주지.”
세틴이 침음성을 흘렸다.
“오우거 가죽은 브라스트 전체에서도 일 년에 서넛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정말 쉽지 않겠군요. 그러면 일단 현재 보급 창고에 있는 가죽을 활용해서 마갑을 소수라도 만들어 주세요.
가능하면 번쩍이는 광채가 나도록 가공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말입니다.”
“시제품은 자네가 타는 말에 맞출까 ?”
“아닙니다. 테오는 마갑이 필요하지도 않고 아마도 착용을 거부할 겁니다. 그 녀석은 웬만한 화살은 알아서 피할 수 있고, 설사 화살에 맞는다 해도 테오의 털과 가죽을 뚫기는 어려울 거에요. 시제품은 뱅골 도이어 기병대장의 말에 맞추어 주세요.”
연회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6 백작령에서 합류한 이들은 특히 호아니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고, 그의 식견과 입담에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빈 놀란은 호아니에게 세틴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실시되고 있는 영지 개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해댔다.
놀란이 특히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개혁의 방향이라기보다 그것을 현실적으로 차근차근 진척시켜 나가는 세틴과 호아니의 수완이었다.
반란 진압이라는 명분을 활용하여 귀족들을 완전히 배척하지 않으면서 개혁의 과정에 스스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세틴과 호아니에게 진심으로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자신도 제국이 변해야 한다는 신념은 있었으나, 그 실체가 무엇일지는 막막하기만 했고, 설사 명확한 방향을 잡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현실화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게 놀란은 세틴군의 핵심으로 급속히 빠져 들어갔다.
의기투합한 세틴과 호아니, 놀란 세 사람은 연일 수많은 주제들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놀란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장군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브라스트 아카데미가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매우 안타깝다는 말씀을 드렸었죠.
저는 지금 각 영지에 군사부를 설치한 것도 좋지만, 영주에게서 독립적으로 학교가 운영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국을 일신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인재들이 훨씬 많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신분을 떠나서 자질이 우수한 아이들을 일찌감치 선발하여 교육하고, 나라에 추천도 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지역마다 이런 일들을 전담할 교육부가 설치되어야 합니다. 보카수스에서 시험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재판관할권도 결국은 모든 지역에서 분할해야겠지만, 저는 전국적으로 교육 체계를 갖추는 일이 장기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호아니가 이에 화답했다.
“저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지금은 어느 하나 서둘 수 없습니다. 긴 시간을 두고 차츰 갖추어 나가야겠지요.
현재는 기존 영주들의 계승권을 지우는 데만 집중해도 쉽지 않습니다. 남서부와 노스롭 반도의 영주들은 반역에 가담했다는 명분으로 비교적 쉽게 계승권을 박탈할 수 있었지만, 세틴 장군의 영향권에 들어와 있는 브라스트와 서부의 에메랄드호 주변 영주들만 하더라도 계승권을 내놓으라 하면 누구 하나 순순히 응하겠습니까 ?”
놀란은 다소 맥이 빠진 목소리였다.
“제가 이야기에 취하다 보니 너무 앞서 나갔나 봅니다. 저야 대의를 위해 얼마든지 계승권을 포기할 수 있지만, 6 백작령의 나바니아만 하더라도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요. 반란을 잠재운 공을 내세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우선은 세틴 장군께서 감히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힘을 갖추셔야 합니다. 그러자면 제국 전역에서 누구도 머리를 치켜들지 못할 위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군께서 노스롭 반도를 평정하고 난 이후에 어떤 행보를 보이실지 저는 무척이나 기대가 됩니다.”
세틴이 말했다.
“나는 기대보다 걱정이 큽니다. 무엇보다 나는 누구도 감히 맞서지 못할 무적의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불가피한 싸움이라면 결코 지지 않을 대비는 해야겠지만, 무력으로 모그란데와 갈리온과 우살리드를 모두 제압하려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할까요.
지금까지 노스롭 토벌만 해도 적과 아를 가리지 않고 가급적 병사들의 피해를 최소로 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했지만, 죽고 다친 자들의 수가 적지 않고, 생업을 망친 백성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열 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적지 않은 사람들을 내 손으로 죽이며 시작한 길이지만, 단숨에 제국을 갈아엎는 폭풍이 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고 싶을 큰 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모그란데와 일시적으로라도 화합하여, 힘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어 보이는 우살리드를 잠재우는 쪽으로 큰 가닥을 잡았으면 합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당장 황도에 피바람이 몰아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국이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지게 될 겁니다. 그런 면에서 장군께서 생각하신 방향에 깊이 공감합니다. 다만, 모그란데가 어떻게 나올지 그게 걱정입니다.”
이때, 상카가 들어와 긴급보고를 전했다.
“장군님, 노스롭이 돌라만으로 보낸 사절단을 고진장군의 정찰대가 모조리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사절단의 대표는 노스롭의 막내 아들인 파이트 노스롭이라 합니다.”
세틴이 다급히 물었다.
“그들은 여기로 압송하고 있겠지요 ? 언제쯤 도착한답니까 ?”
“오늘은 어렵고 내일 오후에 도착할 예정이라 합니다.”
노스롭이 자신의 아들을 보낼 정도면 노스롭이 돌로만과 연계를 시도하리라는 트로운의 예견이 들어맞은 셈이었다. 사절단을 생포함으로써 일단 연계 시도를 좌절시킨 셈이었으나, 세틴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트로운의 말을 듣고 미리 손을 쓰지 않았다면 노스롭 토벌이 미궁으로 빠져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다음날 잡혀온 사절단을 모두 개별적으로 분리하여 취조토록 하는 한편, 세틴은 파이트를 직접 만나 보기로 했다.
파이트 노스롭은 세틴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의외로 태도가 의연하고 담담한 표정이었다. 티 없이 하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유난히 빛을 발하고 양 볼에 얕은 보조개가 매력적인 미남이었다.
세틴은 파이트를 묶은 줄을 풀어주게 하고 마주 보고 의자에 앉도록 배려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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