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니아로
“그런가. 야망 따위가 아니라고 변명할 생각은 없네. 하지만 시오미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에는 추호의 변함이 없어.”
바네사가 다른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겉돌기만 하는 대화에 자기들이 도움은커녕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세틴과 시오미 사이에서 꽤 긴 침묵이 흘렀다. 세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시오미를 한 사람으로, 그리고 여인으로 좋아하는 건 분명해. 아직까지 결혼을 생각해본 적도 없고, 연애다운 연애를 해본 적도 없어서 내 마음을 시오미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시오미는 이런 상황이 견디기 힘든 건가 ?”
“힘들죠. 고아나 다름없는 날 키워주고 마법을 가르쳐준 스승님을 떠났어요. 신세 한탄이나 하려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 의지할 데라곤 없죠. 그런 날 받아주고 아껴주는 공자께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제 생각을 분명하게 말씀드릴 게요. 제가 아무리 곤궁한 처지라지만, 저는 잘 나가는 귀족의 수많은 여인들 중 하나가 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어요. 차라리 글도 모르는 농사꾼이라도 나만 아껴주는 사람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세틴은 새삼 시오미의 입장에서 서로의 관계를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오미의 확고한 이성관에 비해 자신은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시오미에게 시원한 답을 주기에는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했고, 설사 시오미를 잃는 일이 있더라도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었다.
“시오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평생 너만을 아껴줄게’라고 말할 자신은 없어. 내가 생각해도 난 아직 어려. 하나만 약속할게. 늦어도 3 년 후에는 시오미의 물음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너에게는 지금 당장이 중요하겠지만 내게도 준비라는 게 필요해. 그때 가서 너에게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걱정으로 나도 똑같이 하기는 해.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이 정도야.”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솔직하게 말해 주어서 고마워요. 덕분에 저도 홀가분하게 결정할 수 있겠네요. 내일 당장 떠나겠어요.”
그렇게 시오미는 떠나갔다. 세틴은 시오미에게 여비를 넉넉하게 챙겨주도록 했고, ‘3 년의 기약’은 시오미가 떠나더라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점을 여러 차례 힘주어 말했다.
일찍이 실연의 아픔을 겪은 바 있는 바네사는 세틴이 너무 큰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세틴은 의외로 의연했다. 세틴보다는 서른 넘게 살며 경험을 쌓은 김성진의 자아가 더 컸기 때문일 터였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일에 연연하지 않아. 언젠가 시오미가 우리 곁으로 돌아와 주기를 기다릴 뿐이지.”
바네사는 범인과 다른 13 공자의 대범함에 혀를 내둘렀다. 유난히 정이 많고 사람들에게 정을 잘 주는 세틴에게서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브라스틴에서의 일은 순조롭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브라스틴을 떠나기 전날 밤, 후작과 세틴이 다시 브라스틴 백작을 마주했다.
“지금 내리는 비가 13 공자의 덕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더구려.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13 공자의 앞길에 큰 호재가 될 것이오. 일부러 만들어서 퍼트린 소문도 아니고, 공자가 고대 유물의 힘을 얻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니 누가 보더라도 그럴 듯한 모양새요. 이번 일로 공자의 눈이 높아져서 우리 아카시는 안중에도 없는 건 아니죠 ?”
오커스트의 너스레에 세틴이 진중하게 대답했다.
“영애와는 아주 즐겁고 보람있는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소탈하고 진실한 마음가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혼사 문제는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율리가 화제를 바꿨다.
“브라스틴을 떠나기에 앞서 나바니아와의 분쟁에 대한 백작의 생각을 듣고 싶소. 내일 이곳을 떠나 나바니아로 향할 예정이라 사절단이 그 문제에 대해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겠소 ?”
오커스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하하하. 그거 별 일 아니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제 코가 석 자인데 분쟁이라 할 게 뭐가 있겠소. 나바니아의 망나니같은 아들놈이 감히 우리 아카시에게 청혼을 했지 뭐요. 말도 안되는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야단쳐서 쫓아버렸더니, 저쪽에서 계속 생떼를 쓰고 있을 뿐이지. ‘모처럼 두 집안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한 제안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하며 발끈하고 있다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아카시를 그런 놈한테 ? 어림없는 소리요. 그래서 내가 보란 듯이 대공가에 청혼을 하려는 거요.”
후작이 물었다.
“내가 듣기로 나바니아에서는 백작이 갚지 않는 빚을 문제삼고 있소. 혼인 문제는 그렇다 쳐도 빚을 졌으면 갚는 게 당연한 도리 아니겠소 ?”
“빚이 있었던 건 사실이오. 나바니아가 내게 돈을 빌려줄 리는 만무하고, 빚이라는 게 나바니아산 검 몇 개, 활 몇 개 산 대금이오. 그게 3만 골드 정도 되는 수량인데, 난 식량으로 그 빚을 다 갚았지.”
“나바니아에서는 일방적으로 책정한 식량 대금을 절반밖에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오. 여전히 1만 5천 골드의 부채가 남아 있다는 거지요.”
“자기들은 일방적으로 무기 대금을 책정해도 되고, 나는 식량 대금을 책정할 수 없다는 말이오 ? 요즘같이 식량이 귀한 시기에 말이오. 평소 브라스틴과 나바니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악용해서 나를 모함하는 소리에 불과하오. 백 번을 양보해서 빚이 남아 있다 한들 그걸 빌미로 아카시를 팔아넘기라는 수작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지.”
“저쪽에서는 브라스틴 백작이 먼저 넌지시 혼인의 의사를 내비쳤다고 주장하고 있소만.”
“내가 ? 그런 소리는 어디 가서 입도 뻥긋 하지 마시오. 난 그런 적 없소. 내가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망나니에게 천금보다 귀한 내 딸을 내주겠소.”
“알겠소이다. 백작의 생각은 이만 하면 충분히 들었소. 내가 감히 두 집안 사이의 일에 끼어들 생각은 없지만, 나바니아에 가면 두 집안 사이가 원만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 보겠소.”
“어려울 거외다.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 작자들이요. 나는 나바니아와 원만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도 없소. 그쪽에서 찾아와 백배 사죄를 한다면 몰라도.”
모처럼 시작된 겨울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희망의 단비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반가운 비였지만, 먼 길을 가야 하는 사절단에게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마차를 탄 고위층과 기본적으로 방수 기능이 있는 가죽갑옷을 장착한 기사들에게는 덜했으나, 추운 겨울 날씨에 줄곧 비를 맞아야 하는 일반 병사들과 하인들에게는 죽을 맛이었다. 길마저 질척거리는 진창으로 변하여, 걷기도 마차를 끌기도 배는 힘이 들었다.
세틴은 테오의 등에 올라 흑룡기사단과 함께 대열을 선도하고 있었다. 그날 밤 세틴이 재커드의 혼을 무난히 수습한 이후로 테오는 세틴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에게보다 순종적인 태도로 은근슬쩍 아양을 떨기도 했다.
빗줄기는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테오의 털을 전혀 적시지 않았기에 기사단과 같이 챙이 넓은 방갓을 갖춰 쓴 테오는 빗속에서도 쾌적한 행군을 할 수 있었다. 테오는 진창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힘이 좋았고, 발이 진창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어도 몸에 튀는 흙탕물을 슬쩍슬쩍 피할 정도로 여유만만이었다.
행군은 느려 터진 데다 자주 쉬어야 했고, 평소보다 일찍 야영지를 차려야 했기에 길은 더디기만 했다. 사절단 일행을 브라스틴을 떠난 지 이틀 째에 큰 난관에 봉착했다. 나바니아로 가려면 그린테일 강을 건너야 했는데, 며칠째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난 그린테일 강이 바다처럼 넓어져 있었다. 원래도 강의 하류여서 넓은 강폭이 더욱 확장되었는데, 강을 건널 수 있는 배는 기껏해야 2-30인 정도가 탈 수 있는 나룻배 하나 뿐이었다.
브라스틴에서 나바니아 방면으로는 나바니아, 리스톤, 거윈 세 백작령의 물동량이 적지 않아서 주도와 주항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 도로와 항구를 이용하려면 오스틴 방면으로 이틀을 더 돌아가야 해서 택한 지름길이 지금 사절단이 가고 있는 길이었다.
사절단이 모두 강을 건너려면 나룻배가 적어도 다섯 번은 왕복해야 했기에 나루터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나마 나루터에는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벽 없는 창고가 여럿 있어서 사절단이 비를 피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다음날 사절단 수뇌부와 기사단, 관리들, 그리고 세틴의 식구들이 먼저 배에 올랐다. 짐을 싣는 선창 외에는 따로 선실도 없는 배여서 일행은 예외 없이 갑판에 선 채로 강을 건너야 했다. 20여 명이 배에 오르자 갑판이 꽉 찬 느낌이었다. 말과 마차는 따로 실어 나를 예정이었다.
강폭이 워낙 넓어서인지 불어난 물에도 물살이 그리 거세지는 않았다. 커다란 돛 하나에 의지하여 나룻배는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양쪽 강안이 모두 가물가물 하게 보이는 중앙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뱃사람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배 바닥에 구멍이 났다는 것이었다. 뱃사람 말로 암초가 있는 지역도 아니고 저절로 구멍이 날리는 없으니 필시 누군가 수작을 부렸을 거라는 것이었다.
잠시 후 배에서 꽤 먼거리에서 누군가 들락날락 자맥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고기마냥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은 자였는데, 물 밖으로 떠올라 손을 흔들어 보이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었다. 그는 배가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볼 심산인지 멀리 도망가지도 않고 물을 들락거리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뱃사람 둘이 물을 퍼내고, 구멍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배에는 빠르게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강 한 가운데에서 배가 가라앉는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셔틀리가 기사단을 지휘하여 물퍼내는 것을 돕자, 가라앉는 속도는 약간 느려졌다.
세틴은 사건의 원흉으로 보이는 자를 우선 없애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자를 놔두고는 물을 퍼내고 구멍을 막아본들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또다시 그 자가 신기에 가까운 자맥질을 하며 거의 상체의 반이나 물 위로 불쑥 솟아오르는 순간, 화살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누구도 세틴이 활을 꺼내드는 것도, 발사하는 것도, 화살이 날아가는 것도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자맥질 하던 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핏물을 토하며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세틴이 서서히 활을 내려놓는 모습을 발견하고서야 그자가 세틴의 화살에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찍이 세틴의 활솜씨를 직접 목도한 바 있는 토마스를 제외하고는 세틴이 언제 어떻게 활을 꺼내서 쏘았는지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원흉을 제거하고 나자 사태는 빠르게 수습되었다. 흑룡기사단이 물을 퍼내는 일에 익숙해지고 뱃사람들이 구멍을 막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은 덕에 완벽하지는 않아도 항해를 계속할 수 있을 정도로 임시 조치가 이루어졌다.
일행은 맞은편 나루터에 도착하고 나서야 저승 문턱까지 갔다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후작이 회의를 소집했다.
“13 공자의 침착한 판단과 신기에 가까운 대처로 우리가 목숨을 건졌소. 당장 위기는 넘겼으나 조짐이 심상치 않으오. 그린테일 강에서 활약하는 수적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어요. 비록 단 한 명이기는 하나 우리 모두를 수장시키려는 시도를 한 데에는 필시 배후가 있을 것이오. 오늘 나타난 자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일을 벌였다고 생각할 만한 정황은 없지 않겠소 ?”
셔틀리가 말을 이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전에 나타났던 티리아라는 마법사와는 또 다른 부류인 듯합니다. 오늘 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사절단의 일을 방해하려는 수법입니다. 앞으로의 행로가 험난할 것같은 예감이 듭니다. 바다와 다름없이 드넓은 강 한 가운데서 배가 가라앉았다면 우리 모두는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발탄 남작도 말을 덧붙였다.
“저는 13 공자의 담력과 활솜씨 덕분에 한 목숨 건졌다는 사실을 이제야 실감할 정도로 정신을 못차리겠습니다. 도대체 어떤 세력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절단을 해치려 할까요 ?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짧은 소견일지는 모르나, 내 생각에는 6 백작령의 백작 중에서 사절단을 이런 식으로 해쳐서 어떤 이득을 보려는 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새날의 빛’의 소행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으니, 또 다른 외부 세력이 개입했을 것입니다. 이는 단지 사절단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국 내에 대공 전하를 견제하려는 세력이 꽤나 심혈을 기울여 일을 꾸미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오늘 그자를 사로잡아서 배후를 추궁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세틴의 말이었다. 후작이 말했다.
“잠정적으로 공자의 생각이 맞다는 전제 하에 대비를 해야겠소. 현재 제국과 확실한 연결 고리가 있는 백작은 놀란과 리스톤이오. 이미 만난 놀란은 호르바트와 혼인으로 맺어진 사이이고, 리스톤 백작은 제국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사람으로 역시 혼인 동맹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오. 둘 중 누군가가 제국의 세력과 연계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겠소. 이것 참 갈수록 첩첩산중이구려. 가장 힘든 브라스틴을 넘어섰다고 그나마 안도하던 차에 이런 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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