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칸의 서거
상카가 세 가지를 확실하게 기억하기 위해서 몇 번을 중얼거리더니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런데 사령관님, 큰 일이라면 큰 일입니다.
1, 2 황자께서 모두 요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셨습니다.
그리 오래 사시지 못할 듯하다는 말이 황도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원래 허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은 분들이었는데, 최근에는 아예 거동을 못하신다고 합니다.
황도에서 사령관님께 반하는 세력들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것도 사실 두 황자님들이 제 역할을 하기 어려운 영향이 크다고 합니다.”
세틴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참으로 안타깝고 불길한 일이네요.
그간 황도에 별다른 기반이 없는 내게 그분들의 도움이 결정적인 활로를 뚫어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중요한 시점에 건강 때문에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두 분 황자들께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군사께 몸을 사리라고 전해 주세요.
그들이 어떤 식으로 분탕질을 하더라도 섣불리 나서서 제지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조차 할 필요도 없다구요.
내가 황도로 가면서 각지의 총독들을 모두 황도로 불러올릴 생각입니다.
지금 황실과 조정의 세수 대부분을 총독들이 감당하고 있으니, 나와 총독들이 황도에 들어가게 되면 판도가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군사께 그 때까지는 은인자중하면서 저스틴 형과 보조를 맞추고, 저스틴 형에게는 ‘나는 정사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태도를 견지하도록 전해 주세요.”
말을 하면서도 세틴의 얼굴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1, 2 황자는 단지 세틴의 편을 들어 주어서가 아니라,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이 더 이상 움직이기 어렵게 되었다면,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다시 이어진 연회 자리는 훨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특히, 세틴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계획과 일을 거의 일임하다시피 맡겨두고, 인편이나 서신으로만 소식을 주고 받던 놀란과는 할 얘기가 끝도 없이 많았다.
결국 다시 대화의 주제는 동부왕국으로 돌아왔다.
놀란이 말했다.
“호아니 군사와는 동부왕국의 동태와 향후 전망에 대해 여러 차례 서신으로 의견을 주고 받았습니다.
군사께서는 동부왕국이 결국은 제국을 들어 엎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계십니다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우선 포라쥬 왕국에서 세를 잡고 있으면서 동부왕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울라프라는 인물은 제가 알기로 야심이 크거나 호전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울라프가 다섯 왕국 전체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영향력을 확보한 상황도 아니구요.
그리고 동부왕국이 크게 변화하고 발전했다 할지라도 그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비교하자면 드래곤의 다섯 손가락을 다 더해도 브라스트 공국보다 크지 않아요.
그들이 완전 일치단결해서 힘을 모은다 해도 한계가 분명합니다.
또한 제국이 전국적으로 혼란에 빠져 있다면 모를까 이미 사령관님이 대부분의 우환거리를 제거해버린 상황에서 제국과 정면 대결을 하자고 덤빌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세틴은 놀란의 얘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다가 이 대목에서 물었다.
“당장 제국을 향해 군사 행동에 나서지는 않을 거라는 결론인가요 ?”
놀란이 생각을 가다듬어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선발대로 모그란데에게 파견되었던 5 만의 동부왕국군 병력이 대부분 돌아가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여파는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함부로 제국을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경각심을 갖게 되겠지요.
다른 하나는 제국에 왔다가 전몰한 병력에 대한 복수심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양 측면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크게 작용할지는 제가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자의로 제국의 분란에 끼어 들었다가 화를 당한 것이니, 객관적으로 보면 오히려 제국에 납작 엎드려 사죄를 해도 부족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달리 생각할 수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모그란데가 5 만 병력을 끌어들일 때는 제국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파병을 요청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사령관님께서 마우니 전투에서 동부왕국군을 철저하게 응징하신 일은 지당한 결정이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제 생각에 동부왕국들이 뜻을 모아서 당장 군사행동에 나설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저쪽에서 마우니에서 전몰한 동부왕국군에 대한 사과와 배상금을 요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처리가 향후 동부왕국의 움직임을 좌우하리라 예상해 봅니다.”
세틴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생떼에 불과할지라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네요.
어떻게든 나를 깎아 내리려는 자들에게는 좋은 빌미가 될 수도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국 내에서야 워낙 명분이 없는 얘기라 노골적으로 나를 공격하기는 어렵겠지만, 동부왕국을 달래야 한다는 핑계로 써먹을 수는 있을 거에요.
그건 그렇고, 놀란 경이 보시기에 동부왕국에 도입되고 있다는 신무기와 신문물은 어떻습니까 ?”
놀란이 말했다.
“저도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제가 직접 눈으로 보거나 경험한 사실 몇 가지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교역로의 안정을 위해서 전함을 건조하고 수군을 육성하고 있으니, 그간 제가 두 차례 동부왕국에 들러 그쪽의 전함들을 유심히 보고 자세히 알아 보았습니다.
동부왕국들은 모두 반도이고 해상 무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다 보니 군의 주력도 수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깜짝 놀랐던 부분은 그들의 전함에는 마력포가 장착되어 있고, 일부 소형선에는 마력 엔진이 장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직접 위력을 확인해 보지는 못했으나, 전함에 장착한 마력포는 상당히 먼 거리에서 단 한 방에 적함을 침몰시킬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수군은 그들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불화살을 쏠 수도 없는 거리에서 마력포로 공격해 온다면 속수무책입니다.
그리고 마력 엔진을 장착한 소형선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는데, 돛도 없고 노도 없이 엄청나게 빠르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는 큰 출력을 낼 수 있는 마력엔진을 만들 수 없어서 소형 쾌속선에만 사용하고 있다고 하지만, 비록 소형선이라도 그런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면 활용도가 무궁무진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합하자면, 우리가 해상에서는 동부왕국군을 상대하기 힘듭니다.
제가 요즘 제일 고심하고 있는 게 바로 이 문제지요.
이걸로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경이 직접 보고 경험한 사실이고, 경이 현재 가장 주력하고 있는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으니, 동부왕국에 도입된 신문물의 가치와 위력을 가늠해 보기에 충분합니다.
전에 군사께 들었을 때 마력엔진에 대한 얘기는 없었는데, 마력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배가 벌써 돌아다니고 있다니 놀랍습니다.
우리 황실의 마법연구소에서도 마력을 이용한 무기나 다른 활용에 대해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는 있으나, 언제쯤 성과가 나올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조금 늦더라도 어떻게든 우리도 신문물을 도입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 보아야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우리가 고수하던 방식과 무기로는 맞상대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놀란 경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사용하는 것을 도입할 방법을 찾아 보세요.
필요하면 돈을 주고 구입할 방도도 알아 보시구요.”
놀란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몇 번 시도를 해보았지만, 신문물이 제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어서 말도 꺼내기 힘들었지요.
앞으로도 계속 방법을 찾아 보겠습니다.”
세틴은 마음 같아서는 세벤 항구에 머물면서 북동부로 군상 체계를 연결하고, 동부왕국과 어떤 식으로든 접촉을 해서 어느 정도 마무리를 짓고 나서 황도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여러 보고를 종합해봤을 때, 세틴의 귀경이 늦어지면 황도에서 어떤 사단이 벌어질지 불안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오디어스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게 세틴의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서둘러 귀경하겠다고 하면 또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몰라 적당한 명분을 고심하고 있던 차에 1 황자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오미가 당일 곧바로 전해준 소식이었다.
세틴은 친위대 3 천 병력만 데리고 1 황자의 조문을 위해 귀경하겠다고 하면 막을 명분이 없을 거라 생각하여 상카와 함께 귀경길에 올랐다.
빠른 행보를 위해 친위대는 모두 기마 편제를 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세틴은 세벤 항구를 떠난지 불과 닷새 만에 누가 말리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황도에 입성했다.
입성하자마자 곧바로 1 황자의 빈소로 직행한 세틴에게 묻거나 따지는 자도 없었다.
황태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황제를 제외하고는 현재 황실에서 제일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일 황자, 월칸 하만의 서거는 세틴의 귀경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따지기에는 너무 큰 사안이었다.
세틴은 월칸의 빈소에서 4, 5, 6 황자와 조우했고, 그들은 한결같이 세틴에게 더없이 우호적인 태도였으며, 월칸의 사망 소식에 생각보다 훨씬 빨리 귀경을 서두른 세틴을 치하해 마지 않았다.
세틴이 조문을 마치고 세 황자와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세틴의 귀경 소식을 들은 오디어스가 삼십 명이 넘는 조정 대신과 관료들을 거느리고 월칸의 빈소에 나타났다.
세틴이 서둘러 오디어스에게 극진한 예를 올렸고, 오디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예를 받으며 상석에 자리했다.
“올 거면 기별이라도 할 것이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가 ?
큰 형님의 조문을 올 거면 내게 미리 통보를 하고 허락을 구했다면 내가 설마 하니 막기라도 했을까.
어쨌든 이미 황도로 돌아왔으니 밀린 얘기는 차츰 하기로 하세.”
오디어스의 말투에 불쾌감과 질책하는 느낌이 가득했다.
세틴이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돌아가신 분을 조문하는 일을 황태자 전하를 알현하기 보다 우선한 것이 크게 예를 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세틴이 말을 하면서 살펴보니 오디어스의 곁에 꽤나 당당한 자세로 시립해 있는 자가 눈에 들어왔다.
황궁에서 내관들과 하인들을 다스리는 시종장 중에 한 명인 듯했으나, 황궁 내의 사정을 잘 모르는 세틴은 본 적이 없는 자였다.
세틴은 직감적으로 이 자가 황태자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자로구나 하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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