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트릿의 장례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세틴이 말했다.
“하나만 주의하시면 됩니다.
지금 총독의 자리에 있으면서 당면한 문제들을 중심으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좋지만, 제국군이 한통속이 되어 나머지 모두를 몰아붙이는 모양새가 되지는 않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총독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맡고 있는 지방의 이익과 입장을 대변하는 자세를 견지하셔야 합니다.
총독이 맡고 있는 역할이 기본적으로 군사인 만큼 제국군의 통제를 받는 자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지금까지는 여러 강적들을 상대하느라 제국군 중앙에서 총독들에게 크게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군의 입장을 내세우기보다는 변화하고 있는 지방의 모습을 강조하고, 그런 역동성을 더욱 잘 살리기 위해서 조정의 협력과 대책을 요구하는 모양새가 되어야 합니다.
조정의 관료들 중에서도 심지가 굳고 제국과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비판과 우려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것만 주의하신다면 우리가 사전에 일일이 입을 맞춰서 뭔가를 관철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베르토프와는 남서부의 구체적인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이나 더 나누었다.
세틴도 처음으로 총독을 세웠고, 이후에 군상 체계를 도입하면서도 상당히 중심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는 남서부에 대한 관심이 컸다.
다음으로 만난 숄츠는 원래 제국군 소속이면서도 중앙 조정 관료 출신으로 옴비두스를 만나러 동부에 가면서부터 인연을 맺은 사람이었는데, 베르토프와는 결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노스롭은 지역 전체가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히다시피 한 곳이라 잔뜩 주눅이 들어있는 귀족들을 통제하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동안의 보고에 따르면 군상 체계가 도입되면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큰 혜택을 받은 곳이 바로 노스롭이었다.
남쪽 바다를 향해 길쭉하게 뻗어나간 반도인 데다 지리적인 이유로 제국 남서부와도 교류가 쉽지 않았던 노스롭은 제국에서 가장 폐쇄적인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숄츠가 워낙 행정에 밝은 사람이라 군상 체계를 침체되어 있는 노스롭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계기로 잘 활용했고, 돌로만 고원을 비롯한 각지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특산물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외부로 반출하는데 온힘을 기울였다.
특히 브라스트와 남서부, 남부로 통하는 해운을 적극 활용하여 노스롭이 해운의 중심지로 부각되는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했다.
조정 관료 출신인 숄츠는 비교적 일찍부터 세틴과 만났기에 세틴의 의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총독이기도 했다.
세틴이 숄츠와 나눈 이야기는 주로 노스롭의 발전 방향과 지방의 행정 체계를 어떻게 정립할지, 그리고 지방 귀족들의 처리 문제였다.
원래 노스롭은 평지가 많은 서부 해안을 따라 발전해왔고, 산지가 많은 동부는 버려지다시피 한 땅이 많았는데, 숄츠가 총독으로 부임하고 군상 체계가 정립되면서 양질의 목재를 생산하는 벌목장이 크게 늘었고, 광산 개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노스롭의 지리적 입지는 브라스트와 남부, 나아가 동부왕국을 잇는 해상 운송 및 해군의 중심지로 적격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놀란과도 이미 의견 일치를 보고, 노스롭 최남단에 대형 항구를 개발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세틴이 구상을 해놓고도 추진하기를 주저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지방 행정의 통합이었다.
대략 지금 총독이 맡고 있는 지역 정도를 한 주로 잡는다면 주의 행정을 총괄할 별도의 관리를 파견한다는 구상이었는데,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닐뿐더러 구체적인 추진 동력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 면에서 숄츠야말로 가장 적절한 의논 상대라 할 수 있었다.
이미 중앙 조정의 행정을 충분히 경험한 데다 총독으로 한 지방을 다스리는 일을 2 년 가까이 해오면서 지역의 실정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숄츠는 행정, 군사, 교육을 세 축으로 한다는 세틴의 구상에 일단 동의를 표했다.
또한 주 단위의 행정 관리를 파견한다면 기존 귀족들의 반발이 가장 클 것인데, 노스롭은 이미 귀족들의 기득권이 가장 철저하게 제거된 지역이었기에 그 점에서 유리했다.
숄츠는 이미 사실상 행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노스롭의 경우는 별도로 군사와 교육을 담당할 사람을 파견해서 체계를 구축하면 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국에 동일한 행정 체계를 구축한다면 노스롭을 전범으로 삼을 수 있었다.
세틴은 숄츠에게 총독회의에서 행정 체계 문제를 선도적으로 제기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일 것을 주문했다.
또한 그를 위해 꽤나 장시간에 걸쳐 세부적인 사항들을 함께 검토해야 했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각 지역을 다스리는 실세였던 귀족들을 앞으로 어떻게 대우하고, 그들의 불만을 어떻게 잠재울까 하는 문제였다.
천년 제국이 전국에 걸쳐 한 바탕 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대부분 지역이 전란을 겪었으며, 그 와중에 수많은 귀족들이 반란 세력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기득권을 상실했으나, 여전히 귀족들이 기존 체계를 고수하고 있는 지역들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브라스트 대공령이 대표적인 예였고, 북서부 일부와 가리온의 남부가 가장 넓은 지역이었다.
대공령이야 멀린이 이미 연로하기도 했고, 세틴이 하고자 하는 일에 적극 반대하고 나설 가능성도 없었다.
북서부는 좁은 지역이고 베른을 비롯한 일부 젊은 영주들이 제국군에 합류한 마당이라 역시 큰 어려움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총독회의를 계기로 조정과 대부분 지방이 합심하여 추진하는 개혁이라는 명분을 세우면, 가리온이 강하게 저항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예상되었다.
따라서 이 지방 행정 체계의 개혁이 바로 총독회의를 통해 세틴이 관철하고자 하는 가장 큰 사안이라 할 수 있었다.
숄츠의 견해는 귀족들을 너무 가혹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는 것으로 요약되었다.
대표적으로 귀족이라는 신분과 그들의 재산 등에는 직접 손을 대지 않고, 행정적인 권한을 자연스럽게 흡수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이미 크게 발전하고 있는 상업과 무역에 관심을 보이는 귀족들도 많으니 그들에게도 일정한 지분을 가지고 참여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세틴도 숄츠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반발하는 귀족들이 주로 들고 나오는 신분 체계의 혼란이나 농업 생산의 안정성이 저해되는 문제 등에 대한 대책을 주로 질문했다.
실제로 세틴도 자의반 타의반 꽤 많이 가지고 있는 장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농업 생산 기반이 무너진다면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숄츠의 생각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현재 장원 중심의 농업 생산은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로 속박되어 있는 장원 소속의 농민들이 담당하고 있는데, 숄츠는 장원 체계는 무너지는 편이 낫다는 견해를 보였다.
숄츠에 따르면 상업과 특산물 생산 등이 발전하면서 장원에서 도망치는 농민들이 늘어났고, 귀족들은 그들을 다시 잡아들일 힘을 이미 잃은 상황이라 장원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면서 소유하고 있는 장원을 일정한 금액을 받고 남에게 임대하거나 팔아치우는 귀족들이 늘어나고, 농민들을 장기간 계약으로 고용하여 전문적으로 장원을 경영하는 자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스롭 전체가 이런 문제로 큰 홍역을 치렀지만, 농업 생산이 크게 낮아지거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숄츠는 오히려 과거 장원 관리자 출신이 주로 담당하는 전문 경영인이 과거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장원을 운영하는 사례도 많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틴은 역시 총독들을 미리 만나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숄츠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막연하게 걱정만 하던 문제들이 현장에서는 이미 빠르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틴은 숄츠와 밤을 새워서라도 얘기를 하고 싶었으나, 골트릿의 장례문제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저녁식사도 거르고 골트릿의 집을 찾은 세틴을 골트릿의 부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골트릿이 의식조차 희미한 상태로 와병한 기간이 짧지 않아서인지 부인은 그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라지지 않을 고통의 시간을 더 오래 견디는 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어요.
선하고 남을 미워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니 좋은 곳으로 갔을 거라 믿어요.
사령관이 상주를 맡겠다던 약속을 지킨다고 황태자와 조정 중신들 앞에서 얘기한 일을 들었어요.
나는 그저 그이를 진심으로 추모하는 분들이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기만 하면 장례는 조촐하게 치러도 좋다고 생각해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쁘고 중요한 일들을 처리해야 할 사람이 그이의 장례 때문에 발이 묶이는 것도 마음에 걸리네요.”
세틴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저도 숙모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외숙부님의 장례를 격식에 맞게 제대로 치러야 할 이유가 있어요.
이제 절체절명의 위기는 어느 정도 지나갔다고 하지만, 제국이 흥하느냐 다시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느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골트릿 숙부께서는 다른 어떤 황자들보다 제국의 유력자들이나 관료, 학자 할 것 없이 큰 영향을 끼친 분입니다.
명분상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제를 떠나 보내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마음을 가진 분들도 많습니다.
내일부터 조정에서 전문 관리들이 나와 장례 준비와 절차를 모두 진행할 것이니 숙모님은 그저 편안히 지켜 보시면 됩니다.
마침 모레부터 총독회의라는 큰 행사가 진행됩니다.
장례식은 총독회의 중간 쯤인 7 일 후에 거행될 예정입니다.
지방의 내로라 하는 총독들까지 전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장례식을 치를 생각입니다.
그동안 간병하시느라 숙모님도 몸이 많이 상하신 듯합니다.
이제 숙부님도 편안한 잠에 드셨으니 숙모님 건강부터 챙기시면 좋겠습니다.”
골트릿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의 뜻이 그렇다면 좋을대로 하세요.
난 조용히 혼자 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이를 추모하고 싶어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가급적 나를 찾지 않도록 관리들에게 얘기해 두세요.”
세틴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관례에 따라 꼭 정해진 절차에만 잠깐씩 얼굴을 비치시면 됩니다.”
세틴은 미리 파견 나와 골트릿을 장례를 담당할 관리들과 꽤나 장시간 회의를 통해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장례 절차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세틴이 잠깐이나마 골트릿의 빈소에 들를 수 없는 날도 있을 터여서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조정에서 배정된 예산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보충할 수 있도록 5 만 골드라는 거액을 내놓았다.
필요한 곳이 있으면 알아서 지출하고 명세만 명확히 남겨두라면서 담당 관리들의 사기를 올려 주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