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자꾸 선택하라는 건데 ?
카스텔라로부터 세틴을 만나고 온 이야기를 들은 오디어스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와 모그란데 공작은 애초에 멀린을 양립할 수 없는 자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런 브라스트와 혼인동맹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안이었다. 그런 차에 카스텔라의 돌출행동이 곱게 보일 수가 없었다. 제깐에는 자신과 브라스트의 동맹이야말로 제국을 안정시킬 유일한 방법이라 보았다 했으나, 평소 카스텔라의 성격을 알고 있는 오디어스는 세간에 떠도는 제국 제일의 신랑감이라는 말에 홀딱 넘어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카스텔라가 눈물 콧물을 한 바가지나 쏟아내고 쫓기듯 물러나자 카우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오디어스를 위로했다.
“전하,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황녀께서도 나름대로를 전하를 위하느라 어려운 결심을 하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소신에게 좋은 계책이 떠올랐는데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
오디어스가 재촉하듯 말했다.
“그래. 말해 보게.”
“황녀께서 세틴을 찾은 것은 어디까지나 사촌간의 정리로 방문하여 의사를 타진했을 뿐, 정식으로 혼담이 오간 것은 아닙니다. 이쪽에서 먼저 혼담을 꺼내는 것은 신분으로만 보아도 체면이 서지 않는 일입니다. 더구나 아이들 장난같은 제국 제일의 신랑감 운운하는 분위기에 우리가 동조하는 모양새가 되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카우스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세틴을 새날의 빛에 투항을 권고하는 황제의 사절로 보낼 방법을 고심하지 않았습니까 ? 기왕 이렇게 된 참에 브라스트 쪽에서 우리에게 청혼을 하거나, 새날의 빛에 파견할 사절의 임무를 맡거나 선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가는 겁니다. 멀린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는 손해볼 일이 없습니다. 청혼을 한다면 두고 보다가 받아들이든 거부하시든 전하께서 편한대로 하시면 됩니다. 사절의 임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앓던 이가 빠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묘안일세. 하지만 다짜고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방법이 있습니다. 세틴이 오매불망 폐하를 친견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합니다. 사실 칙명에 ‘짐을 보필하라’ 했으니 폐하를 알현할 명분이 충분하다 생각할 것입니다. 폐하의 건강과 안정을 위해 황궁에 아무나 들일 수 없다며 몇 차례 거부를 하면 제 아무리 멀린과 세틴이라 해도 똥줄이 탈 것입니다. 그러다 ‘특별히 이번만’ 허락한다며 알현을 시킵니다. 세틴은 황제를 친견하고 나왔고, 세틴을 만나본 황제께서 두 가지 명령을 내리셨다. 카스텔라의 신랑감으로 적절해 보이니 즉시 혼인을 추진하고 제국의 골칫거리인 새날의 빛을 회유할 좋은 인재를 얻어서 기쁘다며 사절로 갈 것이다. 이러면 빠져나갈 구멍이 있겠습니까 ? 이후에 반발도 무마할 겸 둘 중에 하나 만이라도 반드시 이행하라며 숨을 터주면 제깟 게 무슨 수로 버티겠습니까.”
오디어스가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황도의 모든 사람들이 조정에 대해 제일 불만인 게 새날의 빛의 발호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었다. 네 명의 황자를 중심으로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데다 누구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
“좋네. 자네 말대로 추진하게. 이번에는 실수 없이 잘 해야 하네. 내가 보기에도 세틴 그 어린 녀석이 보통내기가 아니야. 그래 봐야 제깟 것이 독안의 쥐 신세를 면키 어렵지만, 요즘 황도의 여론이 심상치가 않아. 까딱 잘못 처리했다간 우리가 제국 제일의 신랑감을 모해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어. 한치의 오차도 없어야 할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카우스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목이 빠져라 기다렸지만, 웬일인지 세틴에게서는 황제 폐하를 알현하겠다는 청원이 없었다. 세틴이 저들의 계획을 알아서가 아니라 청원을 넣어봐야 돌아올 대답이 뻔하다고 판단한 세틴이 서둘지 않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열흘이 넘는 시간이 흘러가자 거꾸로 애가 닳은 카우스가 세틴을 찾아왔다. 황제가 요즘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고 정신이 온전한 시간도 늘었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세틴을 보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소가주는 폐하를 알현할 준비를 하시오. 3황자 전하와 셀린 황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황제를 친견한 사람이 없소. 이번에 특별히 3황자 전하께서 소가주를 배려하신 것이니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오.”
의외로 세틴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것 참 고맙구려. 언제 어떻게 준비를 하면 되오 ?”
“모레 아침 일찍 황궁에서 마차가 올 것이오. 별도의 수행인이나 무기 지참은 불가하오. 폐하께서 병중이시니 복장도 간소하고 단정하게 하면 되오. 황궁에 도착하면 폐하를 알현하는 예법을 별도로 알려줄 것이오.”
그렇게 해서 세틴은 예상보다는 쉽게 황제를 만나게 되었다. 갑작스레 황제를 만나게 해준다는 것이 필시 무슨 꿍꿍이가 있으려니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황이 닥치는 대로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 후 새벽부터 준비를 마친 세틴에게 바네사가 신변의 안전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했으나, 세틴은 황궁에서 그런 일을 꾸밀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말로 달래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3황자가 어설프게 세틴을 건드려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멀린의 원한을 살 뿐아니라 황도의 여론도 최악으로 치달을 터였다.
제국의 황궁은 전체 규모는 아예 짐작도 하기 힘들 만큼 거대 했고, 정문에서 하차하여 만난 광장을 다리가 퍽퍽해질 정도로 걷고 나서야 지나칠 수 있었다. 높은 담장 사이로 난 미로같은 골목길과 작은 문들, 특색있게 꾸며진 작은 정원들을 수도 없이 지나서야 현재 황제가 머물고 있다는 거대한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늙은 것 같기도 하고 젊은 것 같기도 한 황실 시종이 예법 교육을 실시했다. 절하는 법, 묻지 않는 말은 절대 하지 말 것,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말 것 등등이었다.
세틴은 정해진 자리로 가서 무릎 꿇고 양손을 바닥에 댄 채 미리 전해 들은대로 인사를 올렸다.
“브라스틴 대공가의 소가주 세틴이 위대하신 황제폐하게 문안 올립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따로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고개를 들지 말라는 명에 따라 엎드려 있는데 시종이 누워있는 황제의 귀에 대로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현실은 꽤 넓고 황제의 침상과 세틴 사이에는 거리도 꽤 멀었는데, 쥐죽은 듯 조용한 데다 방안에 별다른 기물도 배치되어 있지 않아서인지 소리가 잘 들리는 편이었다.
“뭐라 ? 조스핀이 왔다고 ?”
별안간 황제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시종이 이번에는 제법 큰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그런 것이 아니오라 조스핀 황녀의 막내 아들 세틴이 문안을 여쭈러 왔나이다.”
황제가 아픈 사람 같지 않게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 조스핀이 아들을 낳았다고 ? 조스핀이 아들을 낳았으면 경사는 경사로구나. 쯧쯧 그 어린 것이 아들을 낳는다고 얼마나 고생했을꼬.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멀린, 그 도둑놈한테 절대로 조스핀을 안보내는 건데...... 내가 조스핀이 무탈한지 찾아볼 수도 없지 않느냐. 아니다, 이럴 때가 아니야. 황명이다. 멀린은 즉시 조스핀과 아들을 데리고 상경하여 짐을 만나러 오라.”
시종이 계속 해서 ‘그런 게 아니오라’를 연발하며 설명을 시도했으나 황제는 막무가내였다. 세틴이 보기에 황제는 생각보다 목소리가 쩌렁쩌렁 한 것이 몸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 한 마디로 심각한 치매였다.
황제가 조스핀을 데려오라는 악다구니만 해대는 바람에 더 이상 알현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시종도 포기했는지 세틴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세틴이 알현실에서 물러 나오니 3황자의 명이라며 잠시 대기하라는 전언이 있었다. 덩그러니 넓기만 한 회의실의 의자에 앉아 한 시간 이상 기다리고 있으니 3 황자가 카우스 백작과 여러 시종을 데리고 회의실에 들어왔다.
“폐하께서는 네가 물러나간 뒤에 내가 몇 마디 말로 위로하니 온전한 정신을 되찾으셨어. 황명을 전하겠다. 네가 제국법의 조항을 들어 황제와 황태자 외에는 무릎꿇지 않는다 들었다. 그냥 앉아서 듣거라. 폐하께서는 두 가지 명을 내리셨다. 폐하께서 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겠다. ‘조스핀의 아들 세틴을 보니 무척 반가웠다. 기개가 헌앙한 것이 3 황자의 금지옥엽인 카스텔라의 배필로 적당해 보였다. 멀린은 황실의 예법에 따라 세틴과 카스텔라의 혼인을 서둘러라. 그리고 세틴은 짐을 대신하여 새날의 빛이라는 역도들의 수괴를 만나 잘 설득해서 귀순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라. 이상 황명이다.’ 황명은 전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
세틴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두 가지 황명에 기가 찼으나, 어쩌겠는가, 황명이라는데.
“일단 알겠습니다. 그런데 좀 너무 하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 제가 보기에 황제폐하께서는 도저히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폐하를 알현하기까지 했으니 황명을 거부할 수는 없겠지요. 하라면 하라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강행을 하시려면 3 황자가 독점적인 알현권을 이용해서 황명을 날조한다는 소문이 그럴 듯하게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브라스트의 사내는 부러질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하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디어스는 세틴이 이렇게 대놓고 강경하게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린 나이에 제국의 황궁에 홀몸으로 들어와 있는 처지에 세틴이 그렇게 당당하게 맞설 줄은 몰랐다.
“세틴은 말을 가려서 하라. 지엄하신 황명을 그런 식으로 무시하고도 무사하기를 바라는가 ?”
“저는 황명을 거부한다고 말한 기억이 없습니다. 단지, 황궁의 내막에 대한 일부 진실이 밖으로 알려질 것을 우려할 따름입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 내가 네깟놈 하나를 어쩌지 못할 사람으로 보여 ?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고만.”
“3 황자 전하, 제가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황도에 올 때에는 이미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렸습니다. 제가 부리는 사람들은 물론 저와 함께 온 청랑대 60 명은 모두 죽을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어설프게 소리나 지른다고 고개 숙일 제가 아닙니다. 좀 솔직해 지시지요. 누가 뭐래도 3 황자께서는 저에게 외삼촌이 아니십니까 ? 조카된 입장으로는 제가 삼촌 앞에서 재롱을 부린다 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공가의 소가주로 처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잘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오디어스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비쳤다.
“그래, 내가 졌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 하지만 두 가지 중에서 적어도 하나는 반드시 이행을 해야 한다. 그것은 나도 절대 양보할 수 없어.”
“대공 전하께서 3 황자께 청혼을 넣는 일은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브라스트에서 저의 혼인 이야기가 나왔을 때, 대공께서 분명하게 천명하신 사항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세틴의 혼인을 통해 차기 황권을 노리는 세력과 연결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대공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일이 없습니다. 새날의 빛 수장을 귀순시키는 일은 아무리 황제를 대신한다 한들 제가 무슨 재주로 성사시킬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차차 논의를 해서 황명을 받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늘의 황명은 일단 접어두시지요. 황실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알았다. 새날의 빛 수괴에게 사절로 가는 일은 받아들이는 걸로 알겠다. 이만 물러 가거라.”
세틴이 황궁에서 물러가자 오디어스는 고심에 찬 얼굴로 앉아 있었다. 카우스가 그런 오디어스를 위로했다.
“전하, 그래도 일단 애초의 목적은 달성한 셈입니다. 사절로 결정되어 가는 순간, 세틴은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시끄러워. 목적이 이루어지면 뭐 하나. 내게는 저런 아들이 없다. 오늘 세틴하고 얘기를 나눠 보니 멀린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 내게 저런 아들이 하나 있었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꼬. 아깝구나, 정말 아까워. 지금 내 심정은 멀린에게 고개를 숙여서라도 카스텔라와 맺어주고 싶은 마음 뿐이야.”
“황손들께서 아직 어리시니 차츰 잘 가르치면 될 일입니다.”
뭐라 계속 말을 이어가려는 카우스를 손짓으로 가로막으며 오디어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리기는 뭐가 어려. 막내라는 놈도 벌써 열 일곱이야. 세틴은 겨우 열 다섯 살이라고. 됐네, 됐어. 내가 말을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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