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커드의 혼
“브라스틴 백작성은 원래 폴린 왕국의 궁성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어요. 과거의 궁성이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요즘까지도 가끔 폴린 왕국의 흔적들이 발견되기도 해요.”
아카시의 말이었다.
“브라스틴의 공물 목록에 간혹 폴린 왕국의 고문서나 서적이 올라 있는 걸 본 적이 있소. 그게 다 여기서 나온 것들이었군.”
“브라스틴이 갖고 있는 폴린 왕국의 유물 중에서 프라움에 공물로 간 것들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비밀도 아니에요. 폴린 왕국에 대한 13 공자의 지대한 관심과 열정, 지식이라면 그 유물들이 제 빛을 발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드네요. 아버지가 순순히 응할지는 모르겠으나, 기회가 있으면 유물들을 보여달라는 청이라도 해보세요. 공자의 말을 듣다 보니 유물들이 언젠가 팔아먹을 재산으로 썩어가기에는 너무 아깝네요.”
“나보다 아카데미 학장님께서 아신다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구입하려 할 것이오. 어떤 물건들인지는 몰라도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귀중한 자산임은 분명하지.”
“저의 마음 같아서는 공자님과 그 학장님께 모두 선물하고 싶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론 어렵겠지요. 어쨌든 오늘 귀중한 시간을 내어 저에게 폴린의 역사에 대한 눈을 넓혀 주신 점 무척이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런 기회가 자주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결국 어떤 결혼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운지 오래입니다. 모든 것을 떠나서 13 공자 같은 분과 맺어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게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저에게 즐겁고 보람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셔서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세틴은 아카시의 소탈하면서도 진솔한 고백에 상당히 감격했다. 하지만 내심 정치적인 면에서나 개인적인 감정에서나 아카시와 자신이 맺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오미는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세틴과 아카시의 다정한 모습을 보면서 세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스스로 생각하던 것보다 크다는 것도 깨달았고, 그렇다고 한들 자신이 세틴과 맺어질 가능성이 한없이 작다는 것도 깨달았다.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다. 자신의 무너진 가슴에 세틴은 관심조차 없어 보였고, 그렇다고 그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시오미가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은 세틴의 마음이었다. 그가 자신을 쓸만한 하녀나 이용가치가 있는 첩자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고 보였다. 자신을 나름 세심하게 배려해주기도 했고, 남달리 다정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세틴이 이성으로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오미는 한때 지나가는 감정의 희생양이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바네사와 난다, 완다는 그런 시오미의 상태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세틴이 함께 있는 마차 안에서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하여 모두들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어색해서라도 세틴이 뭔가 말을 하지 않을까 기대도 했지만, 세틴은 마침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가슴에 자리잡은 재커드의 혼의 기세가 날로 거세지고 있어서 가끔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시오미에게는 몇 차례 자문을 구해봤으나, 시오미도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했다.
야영지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네사가 조심스럽게 세틴에게 말했다.
“공자, 혹시 제가 익히고 있는 검법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 저는 검법 이름 따위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고, 상카도 원래 자신의 검법과 저에게 가르쳐준 검법은 많이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여자인데다 근력이 많이 딸리는 저한테 어울리는 검법으로 개량을 해서 알려준 거죠. 그런데 최근 상카에게서 원래 검법의 이름이 재커드 검법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재커드 검법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세틴에게는 수많은 영감이 떠올랐다. 상카는 북방 이민족의 특성이라는 신체적 특성이 확연했고, 그가 익힌 검법의 이름이 재커드 검법이라는 말을 듣자 곧바로 상카를 만나보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세틴을 대면한 상카는 세틴의 숨소리만 듣고도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공자께서 놀란의 고대 유적에서 이상한 주술의 힘을 흡수했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뵈니 저희 부족과 매우 긴밀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폴린 왕국에 저항하고 탄압받다 멸망한 재커드 부족의 후예가 맞습니다. 공자의 날숨에서는 저희에게 아주 친숙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세틴은 긴 세월을 격하고 이어지는 기묘한 인연의 끈을 느끼고 격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렇구려. 놀란의 고대 유적은 재커드 부족의 흔적이 확실하오. 그리고 그들이 남긴 강력한 주술의 힘이 내게 스며든 것도 사실이오. 그런데 사실 내가 요즘 상당한 곤란을 겪고 있다오. 명치 어름에 머무르고 있는 그 힘, 내가 임의로 ‘재커드의 혼’이라 이름을 붙였소. 갈수록 제어를 하기 힘들어지고,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불안감이 크다오. 혹이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있소 ?”
상카가 대답했다.
“저는 주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우리 일족에서는 주술을 아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짐작이 가는 점은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 힘은 가슴에 머물러서는 결코 안 되는 기운입니다. 아랫배의 오러 코어와 융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자칫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고 있는 재커드 호흡법도 기운이 지나치게 난폭하고 제어가 쉽지 않아 부작용을 겪는 사람이 가끔 나옵니다. 그래서 바네사에게는 호흡법을 따로 가르치지 않고, 일반적인 오러 제어를 위한 호흡법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지 확언할 수는 없으나 공자의 몸을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
세틴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만큼 다급한 심정이었다.
상카는 세틴을 반듯하게 눕도록 한 후 명치 부근에 손을 얹었다. 세틴은 자신의 몸에 들어온 상카의 기운이 시오미와는 완연히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상카의 기운은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운 느낌이 있었고, 시오미가 재커드의 혼을 어르고 달래는 느낌이었다면 상카는 함께 얼싸안고 뒹굴며 장난이라도 치듯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진땀을 흘리며 재커드의 혼과 세틴의 오러 코어의 융합을 시도하던 상카는 결국 포기하듯 물러났다.
“공자님, 재커드의 혼이 너무 강력하여 제 힘으로는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공자 스스로의 의지가 중심이 되지 않고서는 오러 코어에 합치시키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재커드 호흡법을 알려 드릴 것이니 시도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세틴도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곧바로 수긍했다. 상카는 세틴에게 정좌하고 앉아 아랫배에 양손을 모으게 한 후, 호흡법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재커드 호흡법은 일반적인 인간의 호흡법이나 오러 제어 호흡법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가 있었다. 꽤 길게 멈추다시피 가는 숨을 쉬다가 급하게 몰아쉬기도 하고, 가슴을 쥐어 짜듯 한줌의 숨도 남기지 않고 내뱉다가 빠른 들숨을 쉬기도 했다.
신기한 일은 그런 호흡법이 세틴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느껴졌다는 점이었다. 세틴 오래 알고 있었던, 혹은 잊어버렸던 호흡법을 되찾기라도 하듯 빠르게 상카의 호흡법을 받아들였다. 어느 순간부터 상카의 말에 따르기보다 세틴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어떤 리듬에 맞춰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기를 30 분 가까이 했을 때, 세틴은 주변을 잊고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상태에 접어들었다.
상카는 천막에서 모두를 물러가게 하고 자신만이 남았다. 그날 밤, 세틴의 천막에서는 밤새도록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천둥 치듯 포효하는 소리, 죽어가는 짐승이 지르는 비명같은 소리 등 다양한 소리들이 울려 나왔고, 때로는 강력한 기운이 하늘을 뚫기라도 하듯 솟아 오르기도 했다. 소리는 동녘 하늘이 서서히 밝아질 때가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사절단은 누구 하나 잠들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올란드 후작은 밤새 몇 번이나 셔틀리를 보내 세틴의 천막을 살피게 했다. 셔틀리도 정확한 상황을 알지는 못했으나, 세틴이 엄청난 기연을 만난 것은 확실하고 결과가 나쁘지는 않을 듯 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그가 보기에 세틴의 천막에서 펴져 나오는 기운이 점차 안정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신기한 일은 세틴이 평상시와 다름 없는 모습으로 천막을 나와 기지개를 켜고 있을 때 일어났다. 밝아오던 하늘이 다시 깜깜하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서남쪽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하인들과 병사들 사이에서는 13 공자가 비를 몰고 왔다고 수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연이겠으나, 세틴이 밤새도록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하고 난 후, 티끌 하나 없이 맑기만 하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금방이라도 비라 내릴 것처럼 축축한 공기가 감돌자, 반드시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세틴은 겉보기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걸음걸이와 동작 하나하나에서 힘이 느껴졌고, 자연스럽게 상대를 제압하는 패기가 넘쳐 흘렀다. 세틴은 자신이 이미 마스터의 경지를 뛰어 넘어 끝을 알 수 없는 고양의 새 발을 내딛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카는 세틴 앞에 엎드려 무조건적인 조력과 충성을 다짐했다. 세틴에게 일어난 일은 재커드 부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재커둠의 재래’가 틀림없고, 이는 재커드 부족의 끝없는 비상을 알리는 신호라 했다. 폴린 왕국에서 끝없는 핍박에 멸족되다시피 한 재커드 부족의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 바로 현재의 상카 용병단이며, 이제부터 세틴이 그들의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세틴이 상카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재커드 부족의 후예라면 내 생각과 부합하는 면이 있네. 내가 재커드 부족의 유물에서 발견하고 받아들인 것은 네 가지야. 대설원의 기상, 성난 파도에 굴하지 않는 의지, 재커드의 투지, 재커둠의 형제애. 단, 재커드 부족의 분노와 원한은 받아들일 수 없었네. 그들의 원한과 저주는 폴린 왕국의 몰락으로 이미 실현되기도 했고, 내 본성과도 너무 맞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대들이 나와 함께 하고자 한다면, 네 가지 정신을 공유하는 건 좋으나, 분노와 원한은 접어야 할 걸세. 그래도 되겠는가 ?”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폴린 왕국은 이미 망했지요. 지금의 재커드들에게는 선조들이 받았던 설움과 원망은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대설원, 파도, 투지, 형제애는 저희가 이미 추구하는 이상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집니다. 다른 생각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알았네. 그대들이 큰 일을 해주어야 할 때가 반드시 올 거야. 은인자중하며 무술 연마에 더욱 정진해주길 바라네.”
“공자께서 부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희가 달려갈 것입니다. 공자님과 늘 함께 하는 바네사가 있으니 저는 언제가 되든 그 때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날, 오후부터 겨울비가 촉촉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굶주림이 극에 달한 6 백작령의 백성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이었다. 당장 먹을 것이 없다 하더라도 다가오는 봄에 대한 기대만으로도 사람들은 살아남을 것이었다.
올란드 후작은 세틴에게 일어난 일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세틴이 고대 유적에서 어떤 힘을 얻었고, 그 과정에서 우연찮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방치했다. 그리고 이 소문은 6 백작령 전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이런 엄청난 일들이 연속되는 와중에 시오미가 세틴에게 말을 붙여볼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많은 비는 아닐지라도 꾸준하게 지속되는 가랑비에 메마른 대지가 환호작약하고 있었으나, 야영지의 사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야영을 하기에 비오는 날씨는 최악이기 때문이었다. 눅눅한 공기에 좁은 천막에서 각자 일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시오미의 우울한 얼굴은 모두를 더욱 답답하게 하고 있었다.
바네사가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려웠는지 지나가는 말처럼 세틴에게 물었다.
“13 공자는 우리 시오미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시나요 ?”
“시오미 ? 내게 가장 좋은 동료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지. 시오미가 그럴 생각이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원망섞인 눈빛으로 바네사를 바라보는 시오미의 표정은 세틴의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세틴에게 물었다.
“동료라구요 ? 무슨 일을 위한 동료죠 ?”
세틴도 시오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대답했다.
“시오미도 느끼고 있겠지만,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어지러운 세상이 다가오고 있어. 난세가 오면 힘없는 백성들이 먼저 죽어 나가고, 모든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겠지. 나는 그런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불이 되고 싶어. 굳이 말하자면 그 일을 함께 할 동료겠지.”
시오미의 반응은 냉담했다.
“저는 남자의 야망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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