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참장 잘낫
잘낫은 말이 나오자마자 분통을 터트렸다.
“한 마디로 개판입니다. 새날의 빛이 백작령을 점거하고 날로 세력을 넓히고 있는데도 아무도 제압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습니다. 저마다 줄을 대서 위로 올라가려고 정치놀음에만 빠져 있지요. 그 와중에 제가 여기까지 밀려난 것이구요. 제국의 상비군은 황궁 근위대, 수도 경비대, 제국군 사령부, 크게 이렇게 셋이 있고, 지방에는 유일하게 역참들이 제국군 관할일 뿐입니다. 근위대와 경비대는 원래 임무가 제한되어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문제는 제국군 사령부입니다. 사령관은 무능하고 지휘부는 사분오열되어 제각기 유력한 제후들에게 선을 대기에 바쁩니다. 이대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새날의 빛을 토벌하자는 논의도 없단 말인가 ?”
“하루가 멀다 하고 회의가 소집되고 위에서는 어서 토벌 계획을 마련하라고 성화이긴 합니다. 사령관은 나이 핑계를 대며 누군가 나서주기만 바라고 있고, 총대를 매려는 사람이 없으니 백날 회의를 해도 탁상공론 뿐입니다. 정말 이상한 일은 제국의 대신들이 하나같이 어서 새날의 빛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은 하지만 막상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점입니다. 아예 이참에 마법사들을 적대하는 정책을 철회하여 그들을 달래보자는 목소리가 오히려 우세할 정도입니다.”
세틴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천년 제국에 그렇게도 인재가 없단 말인가.”
“인재가 없을 리 있겠습니까. 이미 황궁은 야심찬 황자들의 수족들만 득실거린지 오래입니다. 저기 있는 카우스 백작만 하더라도 3황자와 모그란데 공작의 주구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런 공도 없이 백작이 되고 외무대신이 될 때까지 그가 3 황자를 위해 벌인 짓으로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1황자께서는 너그러우시지만 무능하고, 2황자님은 아예 정치에 관심이 없으시니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데에는 두 분의 책임이 없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이는 저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황도에서는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1, 2 황자 본인들께서도 늘 자책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병석에 계신 폐하께서는 생사조차 불분명하다는 소문이 있다고 들었네. 그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는가 ?”
“황도에서도 폐하께서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병세가 심하시나 폐하께서는 건재하시다’는 것이 황궁의 공식적인 입장인데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폐하의 명이라 하여 알현이 허락된 사람은 3 황자와 막내 공주 둘 뿐입니다. 그러니 1황자께서 명색이 대리청정을 하고 있다 하나 말 뿐입니다. 3 황자께서 폐하의 명이 있었다고 한 마디 하면 모든 것이 뒤집혀버리니 1 황자께서는 아예 입을 닫으신지 오래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황궁은 3 황자께서 완전히 장악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 모그란데 공작의 지원까지 받고 있다면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정국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네.”
“그렇지만도 않은 게 4,5,6 황자의 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4 황자께서는 모그란데 공작의 독주에 반대하는 지방 귀족들의 지지를 두루 받고 계시고, 5 황자께서는 본인인 수도경비대장이면서 황궁근위대와 중앙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제국군 사령관도 5 황자를 지지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6 황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제국 제일의 부자 설리반 후작의 사위입니다. 설리반 후작은 제국 남부의 풍요롭고 방대한 영지를 기반으로 제국의 부를 절반 이상 움직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더구나 4, 5, 6 황자는 모두 정치적 역량이나 재능에서 3 황자를 능가한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니 3 황자께서 황궁을 장악하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 잘낫을 만난 것이 내게는 천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브라스트에서는 자네가 말한 정도라도 황도의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 그렇다면 나를 황도로 끌어 올린 사람은 3 황자와 모그란데라고 봐야겠군.”
“저도 황도에서는 제국군의 말단이나 다름 없는지라 깊은 속내를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제 짐작을 말씀드리자면 결코 3 황자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황도로 브라스트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일을 3 황자께서 독단적으로 진행했다면, 다른 황자들의 반발이 컸을 것입니다. 아무리 황명이라지만 폐지되었던 승상직까지 걸고 진행한 일을 독단했다면 황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요.”
“그렇겠군. 브라스트를 끌어들인다기보다 발을 묶어놓는 쪽에 무게가 실린 행사로 보는 게 타당한 것 같네. 그렇다면 그들이 모두 야합하는 게 가능했겠지. 아무튼 자네를 만나 내가 황도에 가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많은 도움이 되었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네.”
잘낫이 세틴의 감사에 겸양의 뜻을 보이며 말했다.
“제가 잘난 척 하는 게 아니라 평생을 군에서 굴러먹은 장수라면 군영이 차려진 모습만 보아도 군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가주를 수행하는 청랑대를 보니 황도의 어떤 부대보다 날이 선 모습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소가주께서 군대를 운용해 본 경험이 없으실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실로 궁금합니다.”
“과분한 칭찬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지금 인질로 잡혀가는 신세 아닌가.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 그런 위용을 보일 수 있겠는가. ‘감히 브라스트의 소가주를 인질로 삼겠다고 ?’하는 브라스트 사나이들의 독기를 우리 청랑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더구나 청랑대는 브라스트의 앞날은 짊어지고 나갈 대표적인 젊은 피들이네. 제국을 씹어먹을 기세라도 보이지 않으면 내가 우습게 보이지 않겠는가. 하하하.”
“대단한 의기입니다. 소가주의 말씀을 들으니 저 자신도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입니다. 오랜만에 접하는 군인다운 모습에 청랑대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세틴이 잘낫에게 제안했다.
“군인이라면 모름지기 몸의 대화를 해 봐야 진정이 통하는 법이지. 오랜만에 우리하고 칼을 섞어보지 않겠는가 ?”
“좋습니다. 지금의 기분이라면 한바탕 몸이라도 풀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술판의 한 가운데서 벌어진 대련은 한 시간 넘게 계속되었다. 잘낫과 청랑대는 서로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부장이라는 직위에 걸맞지 않게 마스터에 근접한 것으로 보이는 잘낫의 실력도 놀라웠고, 그런 잘낫에게 누구 하나 만만하게 물러서는 자가 청랑대에는 없었다.
청랑대 참군인 오클린 바트는 잘낫과 팽팽하고 치열한 대련을 벌였다. 수십 차례나 맞붙었어도 승부가 쉽게 나지 않을 걸로 보였다. 이에 세틴이 대련을 중지시켰다.
“이제 나하고 한 번 붙어보세. 많이 지치기도 했을 테니, 처음부터 전력으로 오게. 자네가 내 소문을 들었는지 몰라도 소문이 과장이 아니란 걸 확실히 보여주겠네. 지금부터 세 번, 가장 자신있는 공격을 해 보게. 반드시 죽이겠다는 각오로 말일세.”
잘낫은 세틴이 마스터급 암살자를 일격에 박살냈다는 소문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누구나 반신반의 할 수밖에 없는 얘기였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한들 이제 15세인 세틴이 그런 무용을 가졌다는 말을 그대로 믿기는 무리였다.
한편, 세틴은 잘낫이 달인으로 가는 마지막 장애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잘낫은 마스터와 싸워본 적이 없어 마스터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이 깨달음을 얻기는 힘든 법이었다.
잘낫의 검술은 압도적인 힘, 속도, 임기응변, 이 세 가지의 균형을 추구했다. 세틴이 알고 요구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마침 세 가지 필살기가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은 단순한 내려치기로 보이지만 머리, 어깨, 팔 중에 어디라도 가격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서너 발을 도움닫기로 하여 도약한 후 무릎을 들어올려 잔뜩 웅크린 자세로 내려치는 공격은 위력적이었다. 공격의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고, 웅크린 자세는 반격의 범위를 최소화시켰으며, 검을 피한다 해도 다리를 이용한 강력한 연속공격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잘낫의 첫 번째 공격은 너무 쉽게 파훼되었다. 잘낫의 도약에 맞추어 자세를 낮추며 정면으로 전진하는 세틴에게 내려치기 공격은 공간조차 나오지 않았고, 그럴 경우를 대비한 다리 공격의 공간에는 이미 세틴의 검이 내밀어지고 었다. 무리하게 다리 공격을 감행한다면 검을 향해 다리를 내미는 꼴이 될 뿐이었다.
잘낫은 하는 수 없이 공세를 수세로 전환하여 세틴의 검을 막으며 가까스로 착지하는 데 그쳤다. 세틴은 곧바로 반격을 하지 않고 잘낫이 두 번째 공격을 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세틴의 대응에 너무 놀란 잘낫은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쉰 뒤에야 두 번째 공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은 연계기입니다. 이번 공격이 실패하면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세틴은 말없이 손짓으로 어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잘낫의 두 번째 필살기는 힘과 속도에 기반한 연속베기였다. 상대의 수준에 따라 수많은 임기응변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었다. 또한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현란한 발놀림이었다. 이미 많은 청랑대원들이 잘낫의 이 공격에 무너졌다. 진퇴를 가늠하기 힘든 보법에 따라 예상 밖의 베기 공격이 이어짐에 일곱 차례 이상 버틴 대원이 없었다.
세틴은 발의 움직임이 거의 없는 상태로 베어오는 검을 툭툭 건드려 진로를 바꾸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조차 잘낫의 검이 간신히 그의 몸을 스쳐지날 정도로 최소한의 움직임이었다. 공격이 서너 차례 지날 때부터 잘낫은 발놀림이 불편한 것을 느꼈고, 예닐곱 차례부터는 발이 꼬이기 시작했다.
세틴은 잘낫의 독특한 보법에 주목하고 있었고, 그 흐름을 읽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툭툭 검을 건드리는 듯 보이는 그의 방어는 사실 그 방향과 강도를 조절하면서 잘낫의 보법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이럴 때를 대비한 것이 바로 잘낫의 세 번째 필살기였다. 온몸의 오러를 한 점에 집중하여 기습적으로 내뻗는 찌르기였다. 쉴 새 없이 휘젓는 연속베기 공격을 잘 방어하는 상대라도 한 순간 전력으로 다한 찌르기에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잘낫의 마지막 필살기는 허공을 찔렀고, 세틴의 칼등에 손목을 맞은 잘낫은 칼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세틴이 한 마디로 대련을 정리했다.
“수고했네. 굳이 조언을 하자면 오러는 강해져야 운용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 운용을 잘 해야 강해지는 법이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내가 대련을 하면서 한 줌의 오러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네. 오러는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무기가 아닐세. 마음이 가는 곳에 오러가 꽃피울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게.”
세틴의 알쏭달쏭한 말에 인사하는 것조차 잊은 잘낫이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소가주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을 계기로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하겠습니다.”
세틴이 역참이 제공하는 편의는 이용하되 야영을 고집하자 카우스는 세틴의 얼굴도 한 번 보기 힘들었다. 그는 중간중간 들르게 될 영주성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제국의 내로라 하는 영주들이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세틴이라도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자각하게 되리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그런 카우스의 기대는 처음으로 방문한 페드로 자작의 성에서부터 산산히 무너졌다. 자작성에는 무려 일곱 명의 주변 귀족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는데 카우스는 철저히 뒷전이었다. 그들은 제법 성대한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너도나도 자신의 딸을 세틴에게 소개하기 바빴고, 어떻게든 혼사를 성사시키겠다는 불꽃 경쟁이 벌어졌다.
세틴은 귀족 영애들과의 환담은 물론 춤을 주자는 신청도 거부하지 않았다. 세틴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카우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영애들에게 둘러싸인 세틴이 말했다.
“내가 황도에 인질로 잡혀간다는 소문이 돌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성대하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드릴 뿐입니다. 저의 혼사는 대공비 전하께서 주관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만난 영애분들에 대해서는 내가 대공비께 일일이 서신을 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대공비께서 보낸 서신에는 ‘세틴의 마음에 드는 처자가 우선’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소가주께 누구를 고르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만, 소가주께서 선망하는 색시감이 어떤 사람인지 힌트라도 주시지 않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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