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트릿의 서거
세틴에게 울라프와의 만남은 여러 모로 뜻 깊었다.
둘이 작성한 합의안대로 협상이 마무리될 수 있다면, 동부 왕국은 더 이상 제국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걱정거리가 아니게 되는 셈이었다.
동부에 모그란데와 그의 잔당이 일부 남아 있고 옴비두스는 행방조차 묘연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동부 왕국에서 힘을 빌어 오지 못한다면, 큰 화근거리가 되지 못할 터였다.
또한 세틴에게 더 큰 힘이 되는 지점은 그가 제국에서 일으키려 하는 변화의 바람에 더없이 좋은 조력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울라프는 세틴보다 훨씬 이 세계의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선진적인 문화를 전파하려는 사명감을 갖고 있으며, 많은 나라, 다양한 사람들과 일을 해본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세틴이 가진 현대의 지식들은 대부분 이곳에 적용하기 힘들었고, 더구나 그의 과학적 지식은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구체적인 현실에서 적용할 만한 내용이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울라프는 종족이나 국적을 초월하는 넓은 시야를 갖고 있었고, 고리타분한 고정관념에서 나오는 편견도 거의 없었다.
세틴과 호아니가 여러 가지 면에서 상통하기는 했으나, 호아니도 천년제국이라는 좁은 세계와 그 역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쳬계의 한계가 뚜렷했다.
만민 평등이나 개인의 자유라는 현대적 사고에 익숙한 세틴으로서는 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만나게 된 셈이었다.
실제로 울라프는 확고한 사해동포주의자였으며,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본국에 갖고 있던 상당한 지위와 재산을 포기하고 떠나온 사람이었다.
총독 회의가 개최되기 이전에 모든 총독들을 한 번 씩은 만나보아야 하고, 총독 회의의 준비 상황도 점검해야 했기에, 세틴은 또다시 홀로 테오를 재촉하여 황도로 향했다.
테오가 달릴 수 있는지만 살피면서 거의 휴식도 없이 달린 세틴은 총독 회의 개시 이틀 전 새벽에 황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밤이 차츰 길어졌다고는 해도 해가 뜨기 세 시간 전 쯤에 관저에 도착한 세틴을 자다 깬 호아니가 맞이했다.
그는 세틴이 언제 도착하든 곧바로 영접할 수 있도록 아예 관저에서 기거하기로 사전에 얘기가 되어 있었다.
세틴은 찬 물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곧바로 호아니에게 물었다.
“별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
호아니가 피로에 찌든 세틴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문제가 많다면 많고 없다면 없기도 합니다.
사령관님이 너무 힘들어 보입니다.
일단 숨이나 좀 돌리시지요.
그렇게 급할 일은 없습니다.”
세틴이 픽 하니 웃으며 말했다.
“너무 강행군을 한 건 사실이네요.
그럼 한숨 돌리는 의미에서 좋은 소식부터 알려 드리죠.
울라프와 얘기가 아주 잘 됐습니다.
내 생각대로만 진행된다면 동부와 동부 왕국, 모그란데의 잔당 문제 등이 어렵지 않게 풀릴 겁니다.”
세틴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호아니에게 건네 주었다.
세틴과 울라프가 작성한 합의문안이었다.
호아니가 수 차례 반복해서 문안을 읽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했다.
“명분은 제국이 갖고 동부 왕국에 상당한 실리를 제공한다는 취지군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과연 동부왕국에서 제국으로 진출하려는 야욕을 가진 자들이 그리 쉽게 포기를 할 것이냐입니다.
제가 직접 동부 왕국을 방문했을 때 접촉했던 자들과 그쪽의 분위기를 살폈을 때, 이번 기회에 제국으로 세를 확대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는 제가 착각을 하거나 편견을 가지고 봐서 그렇게 판단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둘째는 울라프라는 자가 이 합의문안을 동부 왕국에서 그대로 관철시킬 가능성이 있느냐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불발된다면 우리가 섣불리 동부 왕국에 손을 내밀었다 거절을 당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동부왕국의 상인들이 제국에서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때, 발생할 문제들에 대한 대책입니다.
당장 그들에게 세금을 징수해왔던 귀족들이 반발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일단 생각 나는대로 간단하게 말씀드렸지만, 비단 저의 우려일 뿐 아니라 조정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하리라 예상됩니다.”
세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군사께서 지적하신 문제들은 마땅히 충분히 검토해야 합니다.
사실 그보다 더한 반응이나 격렬한 반대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총독 회의가 코앞인데 당장 조정에 분란 거리를 던질 이유는 없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동부 왕국의 전권 대사가 본국으로 돌아가서 논의한 결과가 오기 전에 분명하게 합의된 내용은 없는 것으로 해둘 생각입니다.
합의문에는 양측에서 동시에 추인을 받아 확정한다고 되어 있지만, 동부 왕궁에서 나오는 결과와 추가적인 요구사항 등을 고려해서 우리 조정에서 공식적인 처리에 들어가면 됩니다.
울라프에게도 우리에게는 총독 회의라는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결정을 그 뒤로 미루겠다고 이미 양해를 구해 두었습니다.
일단 시간적인 여유는 조금 있는 셈이니 차츰 의논해 보십시다.
그런데 총독 회의는 ?”
호아니가 순간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거 본의 아니게 사령관님에게 먼저 보고를 듣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군요.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세틴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게까지 신경쓰실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이제 와서 그런 격식을 따질 필요 있나요.
그저 내가 먼저 경에게 동부 왕국 쪽 소식을 알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호아니가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총독 회의에 대한 준비는 큰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브라스트의 나바니아 총독, 노스롭의 숄츠 총독, 남서부의 베르토프 총독, 서부의 페드로 총독, 북부의 베그던 총독, 북동부의 푸스킨 총독, 총 6 명의 총독이 모두 이미 황도에 도착해 있습니다.
각 지역의 현황과 시급한 현안에 대해서는 제가 총독들을 접견하여 보고를 접수했습니다.
저의 의견까지 곁들여서 보고서를 준비해 놓았으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령관님께서 언제 도착하실지 몰라 접견 일정은 아직 잡지 않았으나, 순서는 정해 두었습니다.
총독에 부임한 순서대로 남서부, 노스롭, 브라스트, 서부, 북부, 북동부 순입니다.
회의의 공식 일정은 모레 오전에 총독들이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리고 보고서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황태자께서 그 자리에 사령관님이 꼭 같이 참석해 주실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오전은 좀 쉬기도 해야 하니 일정을 잡기 어렵겠네요.
오후에 황궁에 잠시 들렀다 나와서 베르토프 총독부터 만나지요.
북부와 북동부는 사실 부임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고, 내가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앞의 네 총독들을 충분한 시간을 갖고 만나 봐야겠습니다.
오늘은 베르토프와 숄츠 두 총독만 만나 보겠습니다.”
세틴은 황궁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황도 내 여러 세력들의 움직임에 대한 보고까지 모두 듣고 날이 어슴푸레 밝아올 즈음에야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세틴이 황태자에게 동부 왕국과의 협상 결과에 대해 보고하기 위해 황궁을 찾았을 때, 예상했던 바이기는 하나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이 황자 골트릿이 마침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었다.
오디어스는 몇몇 대신, 황자들과 골트릿의 장례 문제를 의논하고 있었다.
골트릿은 딱히 적이라 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세틴이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무언가 언성을 높여 싸움이라도 벌인 듯한 험악한 공기와 어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오디어스가 세틴을 반겼다.
“어서 오게, 사령관.
그렇지 않아도 눈이 빠져라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오늘 새벽에 둘째 형님이 세상을 하직하셨다네.
그래서 지금 장례 문제를 의논하고 있는 중이었지.”
세틴이 황태자에게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자리를 잡고 앉고 나서야 오디어스를 주시하며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하는 눈길을 보냈다.
오디어스가 말을 이었다.
“내가 말이야.
둘째 형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의 뜻을 존중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워낙 언성을 높여 무언가를 고집하시는 분이 아닌지라 크게 부딪칠 일도 없었지만, 나는 언제나 형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이 어떤 상황인가.
내일 모레면 총독회의가 시작되고, 이번 총독회의의 결과에 따라 제국의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는 중차대한 시점이지.
그래서 나도 평소 그렇게 중시했던 황궁 증축 문제도 접어두고 총독회의에 집중하고 있는 참이야.
우리의 마음이 중요하지 장례야 간소하게 치룬들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둘째 형님은 가족도 별로 없으니 거창하게 일을 벌인다면 형수님 혼자서 어찌 감당을 하시겠나.”
세틴은 오디어스의 말을 들으면서 회의실 분위기가 왜 그리 어색했는지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총독회의는 총독회의고 이 황자 전하의 장례는 장례입니다.
이 황자 전하의 장례를 국법과 절차에 따라 제대로 치르는데 무슨 장애 요인이라도 있는 겁니까 ?
저는 이미 골트릿 전하께 만약 돌아가시면 제가 상주 노릇을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당연히 제가 상주가 되어 장례를 주도하겠습니다.
조정에 예산이 없어서 문제라면 제가 사재를 털어서라도 장례는 제대로 치르겠습니다.”
단호한 세틴의 말 한 마디로 그 동안 황자들과 대신들이 벌였던 논란은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세틴은 그 문제로 논란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전에 없이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오디어스와 다수의 대신들이 말이라도 맞춘 듯이 장례를 간소하게 치른다는 결론으로 몰아가던 상황이 졸지에 뒤집어진 셈이었다.
아마도 다른 황자들과 일부 대신들이 그에 맞서 논란을 벌였을 터인데, 세틴이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한 마디 말도 보태지 않고 이미 결론이 난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오디어스는 다른 문제는 몰라도 골트릿의 장례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주장을 해봤자 세틴의 태도로 보아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뻘쭘한 표정으로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상주까지 맡기로 했다면 뭐......
난 빠질 테니 알아서들 해보라고.”
그것으로 장례문제는 결론이 났고, 세틴이 동부 왕국과의 교섭 결과를 황태자와 조정에 보고하는 자리가 되었다.
세틴은 합의한 내용을 사실 그대로이기는 하나 대충의 윤곽만 설명했고, 구체적인 합의는 울라프가 동부 왕국으로 돌아가서 논의한 내용을 전해 오면 그것을 보고, 제국 조정에서 세부적인 논의를 하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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