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 옹립 문제
다음날 열린 어전회의에서 모그란데는 황자들의 연금을 푸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제적으로 황태자 옹립 문제를 제기했다.
아울러 황태자를 세우고 나면 자신은 섭정의 지위를 내놓겠노라 선언했다.
황자들의 연금이 풀리고 나면 황태자 옹립은 곧바로 따라올 문제였고, 황태자가 세워지면 섭정이 왜 있어야 하냐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모그란데가 이렇듯 앞서 나간 것은 정국의 주도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계책이었다.
누구를 황태자로 할 것이냐 하는 결정권을 자신이 갖고 조정 관료들과 귀족들을 각기 지지하는 황자의 세력들로 분산하여 자신에게 집중되는 견제를 약화시킨다는 목적도 이룰 생각이었다.
세틴은 역시 모그란데는 얕볼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모그란데가 자칫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상황을 무난히 넘기고, 조정의 중심적인 인물로 남을 수 있는 묘안이자 나름의 결단이었다.
세틴은 그 자리에서 ‘황자들이 모두 외숙부’라는 명분을 들어 자신은 황태자 옹립문제에서 철저히 중립을 지키고 모그란데의 결정을 무조건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천명했다.
또한 자신은 당연히 황자들에게 인사를 드리겠지만, 다른 사람이 황태자 옹립 문제로 자기를 괴롭히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아버렸다.
세틴이 보기에 황태자를 세운다면 어차피 3 황자 외에 대안이 없었다.
1, 2 황자는 본인들이 제위에 의지가 없었고, 4황자는 갈리온 후작과의 관계 때문에 모그란데의 선택을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5황자는 본인의 지지세력이 이미 완전히 붕괴되다시피 했고, 그 과정에서 모그란데와 적지 않은 원한이 쌓였을 터였다.
6황자는 자질이 너무 떨어진다는 평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모그란데가 자신에게 뒤통수를 맞은 3 황자를 얼마나 잘 회유하거나 협박해서 수족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세틴은 모그란데가 어떻게 하든 별로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은 누가 되든 황실에 충실하게 복종하고 따르겠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정치적인 아귀다툼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전략이었다.
모그란데는 어전 회의가 끝나자 사람을 보내 세틴을 만찬에 초대했다.
단둘이 만나는 자리였으나, 차려진 식탁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산해진미와 온갖 술이 갖춰진 자리였다.
평소에 한 두 가지 가벼운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건 물론, 부하들과 함께 하는 연회에서도 몇 가지 음식을 나누는 데 익숙한 세틴은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순간적으로 당황할 만한 식탁이었다.
“대공가의 식탁 문화가 우리보다 초라하지는 않을 터인데 뭔가 다르기는 하겠군.
얘기는 일단 식사를 마치고 하도록 하세.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자네가 손으로 가르키기만 해도 하인들이 알아서 먹기 좋고 준비해줄 걸세.”
실제로 모그란데와 세틴에게 붙어서 식사 시중을 드는 하인만 각각 네 명씩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조각상처럼 보이는 큰 가재에 세틴이 관심을 보이자, 가재를 해체하고, 부위별로 굽거나 튀기거나 끓는 물에 담그고, 각종 양념과 야채류를 더하여 순식간에 작은 접시에 서로 다른 세 가지 요리를 대령했다.
이 과정에서 네 하인은 기계처럼 빠르고 능숙하게 움직였다.
세틴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먹고 살려면 한 끼에 평민 한 가족이 일 년 먹을 것을 소비하고도 남을 거라 짐작했다.
그런 생각이 드니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목에 걸리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몇 가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식사를 마쳤다.
“그렇게 먹고도 어찌 그리 힘을 쓸 수 있는지 신기하군.
자네의 신기에 가까운 무용담을 내가 들은 것만 해도 대여섯 가지는 되거늘...... 술 한 잔 할 텐가 ?”
세틴이 말했다.
“원래 많이 먹지 않는 편입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아직 어린지라 술맛을 모릅니다.
공작님의 흥을 돋워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모그란데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나름대로 세틴과 거리를 좁히려는 의도에서 마련한 자리를 거부당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 노련했다.
곧바로 안색을 수습하고 서둘러 식사를 마친 후, 자신의 서재로 세틴을 안내했다.
모그란데의 서재는 사방 벽에 책이 가득하고, 작지만 무척 세련되고 편안해보이는 침대까지 마련된 공간이었다.
탁자와 의자, 군데군데 설치된 장식물까지, 모그란데가 아끼는 사적 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그란데가 내준 차는 약간 씁쓸하면서 머리를 맑게 해주는 옅은 향이 매력적이었다.
처음 마셔보는 차가 세틴의 마음에 쏙 들었다.
모그란데가 차를 음미하는 세틴을 한참이나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황태자를 옹립하고 섭정에서 내려오겠다고 할 줄은 몰랐겠지 ?”
세틴이 말했다.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자칫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상황을 그렇게 마무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틴이 말을 아끼고 있음을 모그란데가 모를 리 없었다.
“나는 말이야.
자네가 황태자를 추천하고 내가 수용하는 그림을 생각하고 있었네.
어제 우리가 그렇게 합의하지 않았던가 ?”
세틴을 추궁하는 말투였으나 모그란데가 그 때문에 화가 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공작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4 황자 측에서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려 했을 뿐입니다.
공작에게 맞서 다른 생각을 가질 만한 세력은 그쪽 뿐이니까요.
설사 공작께서 4 황자를 밀더라도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모그란데가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보긴 했어.
자네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나를 밀어내보려는 자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을 거라 믿었네.
그리고 내가 4 황자를 밀 거라는 농담도 재밌었어.
하지만 갈리온이 그리 쉽게 포기할 자가 아니네.
솔직히 나는 자네가 갈리온과 손을 잡는 상황을 가장 우려한 것도 사실이야.
만약 이번에 자네가 갈리온과 야합한 정황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황도가 피바다가 되는 건 물론이고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이대로 넘어가지 않았을 걸세.”
세틴이 화제를 바꿨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정치놀음에 놀아날 생각이 없습니다.
당장 제가 할 일은 제국군 재건입니다.
공작께서 제국군에 얼마나 힘을 실어주실지에 따라 재건의 방향과 폭이 정해집니다.
제가 공작께 뭘 요구하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선을 제시해주셨으면 합니다.”
모그란데가 새삼 놀랍다는 눈으로 세틴을 바라보았다.
“내가 꽤 오랫동안 고심해온 문제인데 그렇게 간단히 말해줄 줄 몰랐네.
자네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면 내가 왜 쓸데없이 골치를 앓을 일도 없었을 텐데......
일단 북부군을 제국군에 편입할 수는 없네.
그리고 남부군을 받아들여서도 안 되네.
동부는 지금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 전혀 도움이 안될 거고, 브라스트와 노스롭, 남서부, 서부, 북서부에서 병력을 보충하는 것은 자네 재량에 맞기겠네.
단, 총 병력이 8 만을 넘어서는 안 되네.
부장급 이상 장수들의 급여와 병사들에게 지급할 식량은 조정에서 부담하도록 하지.
그게 지금은 최대한이야.
그것조차 못하면 제국 중앙군이 아니라 그건 자네의 사병이겠지.
그래서 힘들더라도 두 가지 만은 지키도록 하겠네.”
세틴이 싹싹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북부군에서 제국군에 파견할 장수도 없습니까 ?
서로 원할한 연락과 협력을 위해서라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
모그란데가 약간 뜸을 들였다.
“제국군에 나와 가까운 장군들이 꽤 여럿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걸세.
지금도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 자들도 있지.
사실 그들이 자네에 대해 좋게 얘기하지 않았다면 자네를 황도에 들여놓을 생각조차 안했을 거야.
나는 사실 제국군에 내 사람을 더 심을 필요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네.”
세틴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국군 내에 공작의 사람들이 늘어나는 걸 견제하려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명분상 북부군은 제국군의 지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것을 강요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더 이상 공작께서 사적인 관계를 통해서 제국군을 파악하고 관계를 설정해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제국군과 북부군 간에 공식적인 관계설정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수록 불필요한 오해나 갈등이 부각될 뿐이지요.
어차피 우살리드와의 전쟁은 제국군과 북부군이 협력해서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래서 서로 연락관을 파견하자고 제안드리는 겁니다.”
모그란데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틴이 정말 싫어하는 모습이었으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답하긴 어렵네.
북부군 지휘관들과 상의해보겠네.
솔직히 우리 사이에는 일방적인 정보의 우열이 있지.
그것을 만회해 보겠다는 의도가 보이기는 하나,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어.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네.”
세틴이 사의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당분간 공작님과 제가 직접 만나는 일은 자제했으면 합니다.
적어도 둘이 모든 사안을 좌지우지 한다는 인상을 줘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일이 있으면 시오미를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모그란데가 웃었다.
“시오미는 심지가 굳은 아이지.
적어도 자네를 위해 날 배신하지는 않을 거라 믿고 있네.
시오미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도 이해해.
그런데 왜 굳이 우리가 가까운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하는지는 모르겠군.”
세틴이 정색하며 물었다.
“공작께서는 갈리온 후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구체적으로는 공작님과 비교해자면 말입니다.”
모그란데가 말했다.
“무섭지.
남부는 제국을 떠받치는 알토란같은 지역일세.
영토의 크기, 인구는 물론이고 종합적인 역량이 제국 전체의 삼분의 일 이상이라고 봐야 해.
더구나 갈리온은 내가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구축한 세력까지 집어삼켰어.
하지만 갈리온이 남부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했네.
남부에는 유서깊은 가문이 많고, 독자적인 역량과 자부심이 강한 영주들이 갈리온을 쉽게 추종하지는 않을 거야.”
세틴이 말했다
“황도에 있는 귀족과 조정 관료들 상당수가 갈리온의 영향권 안에 있는 걸로 들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관계가 쉽게 무너질 가능성도 별로 없습니다.
저는 당분간 갈리온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작과 제가 하나로 돌아간다고 판단한다면 갈리온의 마음이 급해지지 않겠습니까 ?”
모그란데의 눈동자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럴 듯 하군.
협력하되 한통속이 되지는 않았다는 그림이 적당하다는 뜻에 동의하네.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말이야, 하하하.
하지만 시오미도 나름 바쁘다네.
셔플린을 보내면 좋겠는데 왠지 자네를 꺼리는 것같아.
어쨌든 자네가 그렇게까지 대국을 염두에 두고 있다니 놀랍네.
황실과 조정의 일은 내게 맡겨두고 제국군 재건에 전념하도록 하게.
우살리드를 치우는 것도 마냥 미룰 수는 없어.”
세틴이 말했다.
“지금부터 서두른다 해도 우살리드와 맞붙는 건 올 겨울이 될 겁니다.
눈밭에서 단련된 우살리드와 굳이 겨울에 싸울 이유는 없습니다.
본격적인 싸움은 빨라도 내년 봄으로 생각하고 준비할 생각입니다.”
모그란데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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