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도로
세틴이 잠시 말을 멈추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그란데와의 일전을 각오하고 있던 대다수의 장수들에게 세틴의 선택은 의외였다.
한편 황도에 남아있는 가족들에 대한 불안이 컸던 것도 사실이라 당장 싸우지 않고 황도로 귀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도하는 마음이 큰 장수들도 적지 않았다.
“모그란데도 우리를 온전히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게 손을 내민 이유는 궁지에 몰렸기 때문입니다.
제국 북부와 동부 일부를 제외하고 모그란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영주들이 별로 없습니다.
북동부의 우살리드는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고, 가장 강력한 남부의 갈리온 후작도 모그란데와 분명하게 거리를 두고 있지요.
지방의 영주들과 여러 인연으로 묶여있는 조정의 관료들도 모그란데를 견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일단 황실을 온전히 보존하고 조정을 정상으로 되돌리려면 모그란데와 손을 잡아야 합니다.
지금은 희생을 줄이고 천년 제국의 황실이 되살아날 가능성을 살리는 일이 가장 시급합니다.
내가 황제 폐하의 외손자라서가 아니라 끝까지 제국 황실을 수호하겠습니다. 지금 황실이 무너지면 제국 전체가 끝도 없는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끝까지 황실을 수호한다는 신념만큼은 여러분이 저와 같이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황실 수호에 대해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분은 당장 우리 군을 떠나셔도 붙잡지 않겠습니다.
설사 생각이 다르더라도 당장 공개적으로 그런 생각을 나타내기는 어렵겠지요. 나중에 조용히 나를 찾아와 말해주어도 좋고 토론을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세틴이 다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술렁임도 별로 없었다.
“내가 제국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 노스롭 토벌군으로 출발한 세틴군은 해산되는 셈입니다.
내 생각에는 모그란데가 자신의 군세를 허물어서 제국군에 편입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껏해야 견제나 정보 수집을 위해서 장수 몇을 파견하는 정도겠지요.
결국 우리가 제국군을 새롭게 재건하는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황도에 도착할 때까지 제국군 제구축에 대한 방안들을 만드는데 의견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모그란데와 피튀기는 정략 싸움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유리한 무기들이 적지 않으니 그에 대해서는 군사참모부를 중심으로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런 중대한 문제를 여러분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지 않고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점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나 자신이 결단을 해야 할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반대를 하거나 고려해야 할 다른 문제가 있다면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제는 남서부 총독이 된 베르토프가 가장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장군께서 결단하실 문제라는 점에 적극 공감합니다.
또한 일시적으로 모그란데와 손을 잡더라도 황실을 수호하겠다는 충심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같이 황도에 입성하지는 않지만, 이 자리를 빌어 세틴 장군의 행보를 온힘을 다해 지원하겠다는 다짐을 드립니다.
브라스트 대공가야 말할 필요도 없고, 6백작령에도 총독부가 마련되었다 하니 남서부, 노스롭 반도, 서부까지 제국의 거의 삼분의 일에 달하는 지역이 세틴 장군의 뒤를 받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국군 사령부가 든든하게 재건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병력이든 물자든 부족함이 없도록 각 총독부들이 한 마음으로 나서겠습니다.”
노스롭 총독 바드랑 숄츠가 뒤를 이었다.
“제가 할 말은 베르토프 총독께서 이미 다 하셨습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자리에는 일찍이 모그란데와 손을 잡은 장수들도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세틴 장군께서도 알고 계셨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문제를 삼거나 뒤를 캐지도 않았습니다.
장군의 행사에 부끄러움이 없고 정정당당했기에 맡은 임무만 충실히 하면 굳이 문제 삼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황도에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사사건건 직접적으로 모그란데와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겁니다.
모그란데를 위해 첩자 노릇을 하고 언제든지 칼자루를 돌려세울 사람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양심이 있다면 황도에 귀환하기 전까지 거취를 확실히 해주기 바랍니다.
계속 모그란데를 위해 일할 생각이라면 우리 군을 떠나야 할 것이고, 세틴 장군 휘하에서 새출발을 할 생각이라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합니다.
제국군에 오래 몸담은 베르토프 장군이나 나는 물론이고 대부분 장군들이 서로 뻔히 아는 사이입니다.
속이거나 숨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줄은 누구보다 본인들이 잘 알겠지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다소 충격적인 숄츠의 발언에 일순 회의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런 분위기가 못마땅한 듯 다혈질인 뱅골 도이어 기병대장이 벌쩍 일어섰다.
“숄츠 총독께서 속 시원히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나는 모그란데에게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첩자 노릇은 물론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짓은 못합니다.
나는 세틴 장군이 내가 믿고 따라야 할 분이라고 작정한지 오래입니다.
기회가 온다면 모그란데에게 은혜를 갚도록 노력하겠지만, 결코 제국군과 장군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코머스 한셈 우군 대장이 발언권을 얻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내가 모그란데와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최근까지도 모그란데와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은 것도 맞습니다.
그와는 젋어서부터 잘 알고 지내며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정치적 동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세틴군에 모그란데가 알아서는 안될 비밀이 있었습니까 ?
내 기억에는 모그란데에게 보내는 편지에 세틴 장군을 칭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이 세틴군이 최소한의 희생으로 노스롭의 반란을 평정할 수 있는 힘이었었습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황실을 수호해야 한다는 세틴 장군의 신념을 절대적으로 지지합니다.
이 문제에 이견이 있다면 언제든지 모그란데와 의절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나를 불편하게 여긴다면 제국군을 떠날 용의도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할까요 ?”
세틴이 말했다.
“한셈 장군의 말씀이 전적으로 맞습니다.
제국군에 세틴에게 충성하는 사람들만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숄츠 총독께서 우려하시는 바는 알겠으나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양심에 맡길 문제는 맡겨야 합니다.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법과 군율에 따라 처리하면 됩니다.
입장을 분명히 하라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기밀을 요하는 문제에 기밀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내 책임입니다.
제국군은 제국과 황실에 대한 충성이 유일한 기준입니다. 다른 원칙은 없습니다.”
문제를 제기한 숄츠만 뻘쭘하게 된 상황이기도 했지만, 의미나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그가 모그란데와의 연계 문제를 공론화함으로써 일정한 기준과 한계를 분명히 한 셈이었다.
애초에 세틴이 기밀에 관해 허술하지 않았다.
심지어 청랑대 출신의 친위대원에게도 매수나 포섭 공작이 있었고, 세틴이 이를 사전에 간파하여 없던 일로 만들어버린 적이 꽤 있었다.
셔플린이 도청을 하고 있는 사실까지 알아채고 역이용해버린 세틴이었다.
정작 모그란데가 알고 싶어 할 세틴 주변의 극비에 속하는 내용이 유출된 적이 없으니, 대외적으로 공표된 사항들만 모그란데에게 전달되었던 것이었다.
세틴은 4 만 가까운 병력을 세심하게 나누었다.
시건 군영은 각 총독부에서 모병하는 병사들을 훈련하는 훈련장이자, 세틴의 뒤를 받치는 보급창이자, 각종 무구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기지가 되어야 했으니 이를 위해 1만 가량의 병력을 남겨두기로 했다.
시건 군영은 비교적 나이가 많은 보병대장 하푼 페드로가 맡기로 했다.
경험 많고 신중하기로 유명한 하푼은 앞으로 닥칠 전쟁에도 충분한 역할을 해낼 인재였으나, 본인이 뒤로 물러나 지원하는 일을 맡기 원했다.
시건 군영의 중요도를 감안하면 그 정도의 총책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세틴은 흔쾌히 하푼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베르토프, 숄츠와 함께 제국군의 최고참에 속하는 장군들이 모두 일선에서 물러서서 후방 지원을 맡게 된 셈이었다.
3만 정도로 줄어든 세틴군은 황도를 향해 나아갔다. 세틴은 황도로 향하는 가도 주변의 영주들이 준비한 환영연을 모두 거절하고, 백성들을 동원해서 군대를 환영하는 행사도 열지 못하게 했다.
거꾸로 주둔하는 군영에 주변 영주들을 초대하여 간단한 연회를 배풀었다.
세틴의 공을 찬양하고 당장이라도 세틴에게 모든 것을 들어 바칠 각오를 늘어놓는 영주들의 말을 세틴은 귓등으로 흘려듣는 태도로 일관했다.
“여러분이 나를 나이도 어린 것이 오만하고 버릇없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노스롭의 반란 진압은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환란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내가 칭송이나 받으며 희희낙락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대로 다시 태평성대가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여전히 생사가 불안하고 황자들은 모조리 연금당해 꼼짝달싹을 못하고 있습니다.
섭정을 자칭하고 있는 모그란데 하나를 몰아내서 이 상황이 끝날 수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모그란데를 반역자로 지목하고 황도로 진군했을 것입니다.
내가 일 년 반 전에 황도로 갈 때도 여러분이 맞아주었습니다.
그때는 꼼짝없이 인질이 되어 끌려가는 신세였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똑같은 심정으로 황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며 환영이나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한 마디만 드리겠습니다. 영지를 맡아 다스리고 있는 여러분이 제국의 기둥뿌리입니다.
여러분이 적당히 눈치나 살피며 내 땅이나 보존하겠다고 생각하신다면 제 삼, 제 사 모그란데, 노스롭, 우살리드 같은 자들이 득세하여 설치는 상황이 끝없이 반복될 뿐입니다.”
가혹한 질책이나 다름없는 세틴의 말에 적극적으로 반박하거나 화를 내는 영주는 없었지만, 대부분이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세틴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인정하더라도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하는 반응이었다.
실제로 대놓고 그렇게 묻는 자들도 간혹 있었다. 세틴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노스롭과 그 주변 영주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실 겁니다.
대부분이 계승권을 비롯한 주요 권한을 박탈당했습니다.
사실, 반란에 가담할 것 치고 관대한 처분이었지요.
이미 시작된 피바람이 여러분을 피해갈 거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나 또한 제국 제일의 귀족이라는 브라스트 대공가의 소가주입니다.
우리 가문이 얼마나 속으로 곪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지요.
당장 여러분이 거느리고 있는 식솔과 백성들을 챙기는 데만도 벅차다는 것도 압니다.
제국과 황실을 지키는데 스스로 적극 나서지 않으면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방법까지 내게 알려달라고 하실 겁니까 ?
영지의 상황과 주변 정세가 모두 다르니 당장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고 제국과 황실에 대한 충심을 증명하세요.
그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세틴으로서는 영주들이 살아남을 대책을 진심을 다해 제시해준 셈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세틴의 말을 받아들이느냐는 그들의 몫이었다.
세틴은 정연한 군기를 유지하며 빠르게 황도로 나아갔다.
장군들은 새로 제작한 오우거 가죽 갑옷을 검은 색으로 물들여 무장하였고, 말들은 번쩍이는 마갑을 자랑하고 있었다.
무기와 갑옷이 전에 보던 것과 확연히 다른 세틴군이 자로 잰 듯 오와 열을 맞춰 행군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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