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스트의 본가
사우셔로 들어오는 구호 물자를 접수, 보관, 운송하는 일을 총괄하는 슈타인 남작과 상단 인원들은 사우셔에 남게 되었다. 사절단의 규모가 절반 가까이 줄어든 반면, 사절단은 물자를 운송하는 일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게 될 것이었다.
마빈은 역시 단신으로 브라스틴으로 가는 갈림길까지 사절단을 배웅했다. 그는 사흘 내내 기회 있을 때마다 세틴과 유적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고, 언젠가 프라움을 방문해서 같이 연구할 기회를 갖고 싶다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마빈 놀란 백작은 헤어지는 날 세틴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말이라며 눈처럼 하얀 말을 선물하고 돌아갔다. 테오라는 이름의 백마는 언뜻 보기에 애완용이나 완상용으로나 쓸 만한 말로 보였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은 반면. 잡털 하나 없이 새하얀 털이 전체적으로 길게 나 있어서 말이 아니라 커다란 강아지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빈은 테오가 어떤 말보다 뛰어난 전마라 하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겁을 먹지 않고, 도약력과 순간 주력이 탁월하여 거침없이 전장을 누비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슈타인은 테오가 최고의 전마로 이름 높은 품종으로 놀란에도 몇 마리 없는 말이라 했다. 놀란 백작이 13 공자를 얼마나 좋게 보았는지 보여주고도 남을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틴이 테오와 친해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선뜻 등을 내주곤 했지만, 유독 세틴을 잔뜩 경계하고 겁을 먹어 눈길을 피하는 인상이었다. 오래지 않아 세틴은 그것이 자신의 가슴에 자리잡은 재커드의 혼 때문인 것을 알아차렸다. 세틴이 간혹 그르릉거리는 야수의 낮은 포효가 날숨에 섞여나오는 것을 느낄 만큼 재커드의 혼은 존재감을 키우고 있었다.
세틴의 가장 가까운 식구들조차 세틴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사나운 기운에 깜짝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을 정도이니, 말 못하는 짐승인 테오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세틴은 결국 브라스틴 백작성에 도착할 때까지도 테오의 등에 올라 보지 못했다.
브라스틴 백작성까지는 갈림길에서 닷새가 걸리는 길이었다. 곧게 난 가도는 넓어지고, 완만한 구릉지 사이로 들판이 나타났다. 원래는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장관이었겠지만, 들판에는 마른 풀만 듬성듬성 나뒹굴고 있었고, 그린테일 강에 인접한 농토에서만 간혹 푸른 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황량한 풍경도 풍경이지만 인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더욱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첫 번째 야영지 부근의 관리인에 따르면, 브라스틴 백작이 역병을 이유로 주민들의 주거지 이탈을 엄격하게 금했기 때문이는 것이었다.
대공령을 벗어나 6 백작령에 들어서면서부터 백작의 가신들은 물론 제법 큰 영지의 관리인들도 작위를 가진 경우가 거의 없었다. 공국에서는 오직 대공만이 작위를 수여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전통적으로 브라스트 대공들은 작위를 극히 제한했다. 특히 자치권과 관할권을 가진 봉신 작위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멀린은 특히 작위 수여에 인색했다. 평생 수여한 작위가 열을 넘지 않고 자기 대에서는 결코 열을 넘기지 않을 거라 강조하곤 했다. 작위의 남발은 나라와 백성들에게 부담만 가중시킨다는 것이 멀린의 지론이었다.
이는 프라움에는 선조로부터 작위를 물려받은 계승 귀족들이 넘쳐나는 반면, 6 백작령에는 작위를 가진 귀족이 극히 귀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정한 수준 이상의 관직에 오르면 귀족으로 대우하는 관례가 있다고는 해도 작위에 대한 갈망이 큰 수밖에 없었다.
브라스틴에서 만난 관리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주인인 백작보다 높은 올란드 후작을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그들은 브라스틴 백작에 대한 원망과 험담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는 백작을 두려워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브라스틴에서는 백성에 대한 백작의 가렴주구가 비밀도 아니었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려는 목적도 있어 보였다.
관리인들의 한결같은 요구는 사절단이 구호 물자를 일률적으로 백작에게 넘기지 말고 구역별로 물량을 할당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백작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달라며 자기의 담당 구역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보여주었다 자료들은 잠깐 지역을 둘러보고 대조해 보아도 진위를 확인한 수 있을 만큼 상세하고 구체적이었다.
브라스틴 백작성에 도착을 하루 앞둔 저녁 후작이 수뇌부를 소집했다.
“브라스틴 백성들의 처지는 다른 데와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비참하오. 루이 핀들 대사의 오만불손이 그의 백작과 무관하지 않음은 물론이지. 공공연하게 ‘브라스트의 본가’를 자처하는 브라스틴이지만, 오면서 보았다시피 브라스틴의 실상은 초라하기 그지 없소. 브라스트 공국 전체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다는 알짜배기 땅을 독차지하고 있으면서 어쩌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는 건지 모를 일이오. 브라스틴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우리 사절단의 제일 난제라면 난제요.”
발탄 남작이 말했다.
“오면서 만난 관리인들의 제안이 그나마 나은 대안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사절단이 구역별로 물량을 할당해서 넘겨준다면 백작이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방안을 관철할 묘책을 찾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자들의 말에 일말의 진심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들이 제출한 자료도 믿을 만했소. 하지만 구역별로 할당을 해달라는 제안이 순수하게 백성들을 위한 고육책일까 ? 설사 백작이 그 방안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일은 사절단이 다 하고 원망과 책임을 다 뒤집어쓰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아무리 상세한 자료에 근거를 둔다 하더라도 브라스틴 백작령은 대공령에 버금갈 정도로 넓고 인구는 오히려 더 많은 지역이오. 우리가 여기서 몇 달 동안 죽치고 앉아 죽을 힘들 다한다면 욕은 먹지 않을 수도 있겠지. 부사(副使)와 내가 여기서 뼈빠지게 한 번 매달려 볼까 ?”
율리의 말을 들은 발탄은 안색이 붉어졌다. 천하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일벌레인 후작과 함께 일에 파묻혀 지내는 상상은 끔찍하기만 했다. 관리인들의 농간에 자신이 놀아났다는 생각에 분노마저 일었다.
“백성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브라스틴이라지만, 따지고 보면 영지를 가진 귀족들에게 그다지 큰 흉도 아니오. 제국의 귀족들 대부분이 브라스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것이오. 우리 대공께서나 자기 먹을 것까지 아껴가면서 백성을 위한다는 생각을 하지, 그런 귀족이 흔한 건 아니라오.”
후작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순행 사절단의 본래 목적은 6 백작과의 친선 우호를 다지고 공국의 공동 번영을 위해 공감대를 넓히는 것이오. 굶주린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우리의 사명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사절단의 근본 취지를 벗어나서는 안될 말이오. 13 공자는 브라스틴에 대해 어찌 하면 좋겠소 ?”
세틴이 지체없이 대답했다.
“제가 아는 바가 적어 따로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지나온 일들을 돌이켜 보면 브라스틴 백작이 선악을 떠나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직접 대면을 해보고 나서야 무슨 판단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적어도 알톤 총관은 말이 통할 사람으로 보였으니 그의 협조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피곤한 일들이 적지 않을 것이오. 푹 쉬고 어디 한 번 부딪혀 봅시다.”
사절단이 브라스틴에 도착하기 직전 마주친 것은 길바닥에 널부러진 수백 명의 굶주린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사절단이 가까워지자 외치기 시작했다.
“먹다 남은 빵 조각이라도 조금 나눠 주시오.”
“입가에 붙은 빵 부스러기라도 떼어 주시오.”
등등. 온갖 소리를 지르며 사절단에게 다가와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늘어질 태세였다.
행렬을 멈추고 흑룡기사단과 병사들이 나서 경계태세를 취하는 사이, 백성들을 헤치고 몇몇 관리와 기사들이 다가왔다. 그 선두에는 알톤 총관이 있었다.
“후작 각하, 13 공자.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해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병사들을 동원해서 저것들을 다 치울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톤은 고개를 굽신거리며 연신 사과를 했다.
올란드 후작이 엄중하게 말했다.
“우리가 브라스틴 백작에게 이렇게 환영받지 못할 존재일 줄을 몰랐소. 역병 때문에 집밖 출입도 못한다는 백성들이 백작성 지척에서 저렇게 농성을 벌이는 게 우연이겠소 ?”
알톤이 양손을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절대 오해십니다. 저희가 아무리 모자라기로 이런 일을 꾸미기야 하겠습니까. 저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모르나, 바로 조치할 것이니 노여움을 푸시지요.”
“그래 ? 힘없는 백성들을 병력을 동원해서 막무가내로 몰아내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오. 그러면 저들의 대표를 내 앞에 데려 오시오. 말이나 들어봐야겠소.”
잠시 후, 피골이 상접하고 행색이 초라하지만 눈빛 만은 살아있는 한 중늙은이가 올란드 후작의 앞에 끌려왔다.
“내가 사절단의 정사를 맡고 있는 율리 올란드 후작일세. 우리는 구호 물자를 수송하지는 않으니 그대들에게 내어줄 식량은 없네. 길을 막을 때에는 필시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라 생각해 불렀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
“식량이 하루 늦으면 수십이 죽고 이틀 늦으면 수백이 죽습니다. 높으신 분들의 사정이야 저희같은 무지렁이들이 알 길이 없지만, 우리는 백작을 믿을 수 없습니다. 대공 전하의 신하들께서 직접 식량을 나눠 주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것 하나 뿐입니다.”
“그대들의 청을 들어 준다 장담할 수 없네.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충분히 알았으니 이만 물러가게. 여기서 이런다고 달라질 건 없어. 먹은 것도 없이 괜한 기운이나 뺄 뿐이지.”
중늙은이는 순순히 물러갔다. 브라스틴의 병사들이 길을 청소한다, 석회가루를 뿌린다 부산을 떠는 동안 사절단은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후작이 알톤에게 물었다.
“그래서 백작은 사절단을 마중하지도 않는 건가 ? 브라스틴이 브라스트의 본가를 자처하며 대공가를 가볍게 본다는 소문이 마냥 근거없는 소리는 아닌 모양이구려.”
“아닙니다. 본가라니요. 그건 호사가들이 과거의 일을 빌미삼아 지어낸 얘기에 불과합니다. 브라스틴의 선조가 사울 대공의 친 형이어서 누군가 지어낸 말일 뿐, 브라스틴 백작께서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사절단의 도착 시간을 알 수 없고, 오늘 마침 공녀님의 생일인지라 행사 때문에 백작께서 미처 몸을 빼지 못하셨을 뿐입니다. 백작께서는 성에서 사절단을 성대히 맞이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이 판국에 공녀의 생일잔치까지 챙기는가 ? 참으로 대단한 백작이시군.”
율리는 곧바로 백작성으로 가지 않고 적당한 야영지를 꾸리고 저녁 식사까지 마친 뒤에야 백작을 방문했다. 오지 않겠다는 사람과 쓸데없는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다는 게 후작의 말이었다.
오커스트 브라스틴 백작은 자신의 딸인 아카시 브라스틴과 함께 사절단을 맞았다. 생일의 매인 이벤트인 만찬 중이어서 그녀와 함께 나왔다는 변이었다. 오커스는 팔자 수염을 곱게 기르고 다소 익살스러운 인상이었다. 아카시는 스물이 가까워 성숙해 보이면서도 티없이 명랑한 성격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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