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들어야 내 사람
돌이켜 보면 세틴을 호구 잡은 사람들은 식구들 뿐만이 아니었다. 단지, 세틴이 본인 입장에서 딱히 모자란 것도 없고 어려움도 없이 자란 터라 그것들을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하고 좋게 좋게 넘어갔을 뿐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얻어먹을 게 많은 호구는 당연히 친구가 많고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그 많은 친구들 중에서 세틴이 고른 사람은 딱 두 명이었다. 경학이나 정치,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이 가능한 사람, 세틴을 이용해 먹으려 하기보다 그냥 같이 하는 일들이 즐거웠던 사람, 무엇보다 자질이 뛰어난 사람을 추리다 보니 두 명이 남았다.
공교롭게도 그 둘은 모두 대공가의 선조인 사울 브라스트의 동생들 중 하나의 자손으로 브라스트 성을 같이 쓰기는 해도 남이나 마찬가지였고, 당대 가주와의 거리가 먼만큼 권력에서도 멀어진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울브린은 18 세로, 세틴보다 약간 먼저 아카데미를 마치고 은빛 날개 기사단에 근무하고 있었고, 토마스는 19 세로, 친위대의 정보 부서에서 1 년 가량 근무한 상황이었다. 4 대 전에 같은 조상을 두고 있지만, 그 둘 간에도 가까운 친척이라는 생각이 아예 없을 만큼 가족적인 유대감은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자주 어울리는 편이기는 했으나, 세틴이 따로 패거리를 만들어 어울려 다닌 적은 없었기에, 세틴이 둘만을 따로 불러 활쏘기 시합을 하자고 했을 때, 울브린과 토마스는 의아한 마음이 앞섰다.
“어서 오게, 친구들. 오랜만에 솜씨를 보기 전에 차라도 한 잔 하지.”
“13 공자께 인사 드립니다.”
둘은 이구동성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서 일어나 여기 앉으라구. 아카데미에서 함께 구른 사이에 뭘 그리 예의를 차리고 그래.”
50 여 개의 사대가 마련된 아카데미 궁술장은 축구장보다 넓었으나 마침 사용하는 사람은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둘이 사대 한 켠의 휴게실에 그럴싸하게 차려진 다과상을 마주하고 앉자 세틴은 주저없이 본론을 꺼냈다.
“내가 오늘은 그대들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는 입장이라 준비를 좀 해 보았어. 궁내에서도 맛보기 힘든 것들이니 마음껏 들면서 얘기해 보자고. 얘기가 끝나고 나면 오랜만에 활쏘기 시합도 한 판 하고 말이야.”
둘 모두 사근사근한 성격도 아니고 아부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차려진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어서 본론을 얘기하라는 눈치를 보낼 뿐이었다.
“그래. 바로 말하지. 내가 그대들 두 사람을 내 새로운 호위로 점찍었어. 내 시동과 시녀들이 이번에 전부 결혼하고 나가게 되어서 말이야. 하지만 절대로 강요할 생각은 없네.”
“거절하겠습니다.”
울브린이 강요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단칼에 자르고 나왔다. 표정을 보아 하니 토마스도 역시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하는 눈치였다. 나름대로 큰 꿈을 안고 이제 막 경력을 시작한 그들에게 고작 13 공자의 호위나 하라는 제안은 씨도 먹히지 않을 얘기였다. 둘 다 속해 있는 조직에서 나름 촉망받는 신입이었다.
“이거 참 맛있네. 일단 한 번 먹어 보게. 이게 한 입에 웬만한 사람 한 끼 식사 값보다 비쌀 거야. 궁내 장인들이 엄청 귀한 재료들로 만들었거든. 차도 좀 마시고.”
원래 세틴은 발끈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몇 살 위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신분사회에서 다짜고짜 거절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세틴은 다과를 권하며 두 사람이 자신의 제안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토마스가 입을 열었다.
“13 공자의 제안이 일전에 대공 전하께서 연설하신 내용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 공자께서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를 하실 분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했습니다. 좀더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
세틴은 토마스에게 엄지를 들어보이며 웃었다.
“당연히 바로 그 얘기지. 내가 대공가를 이어야겠으니 두 사람이 날 좀 도와줘야겠어. 내가 앞길이 창창한 사람들을 망치자고 호위나 하랄 사람은 아니잖아 ? 나도 생각을 많이 하고 그대들을 골랐어.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당신들밖에 없더라고.”
울브린과 토마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에게 후계 경쟁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하는 세틴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세틴의 외 통수에 걸려 들었다는 생각에 난감하기만 했다. 그런 제안을 듣고 거절을 하게 되면 곧바로 적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만약에 세틴이 대권을 잡게 되면 자신들의 인생은 끝장나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세틴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세틴은 나름 다재다능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권력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강단이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답해야 하는 겁니까 ?”
울브린이 꽤나 언짢은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아니야. 내가 세 가지 시험을 제안할게. 셋 중에 하나라도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대들이 오늘 들은 얘기는 깨끗이 잊어도 좋아.”
“어떤 시험입니까 ?”
“첫째, 수많은 공자들 중에서 왜 내가 차기 대공이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할 거야. 당신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바로 탈락이지. 둘째, 현재 제국의 정세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토론을 제안하지. 역시 토론에서 내가 설복하지 못하면 포기할 거야. 셋째, 궁술과 검술 중에 자신있는 것으로 골라서 나와 대련을 해보는 거야. 하나라도 내가 진다면 두 말할 필요도 없지.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할 수 있다면 내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나 ?”
“다른 것은 몰라도 세 번째 시험은 저한테 안될 겁니다. 만약에 제가 지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울브린이었다.
“공자님의 시험이 무척 흥미롭네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셋 중에 하나라도 공자님께 질 자신이 없는데요. 하하하.”
토마스는 좀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조건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울브린은 검술에서, 그리고 토마스는 궁술에서 수위를 다투던 실력자였다. 아카데미에서 세틴과 대결을 해본 적도 많았다.
“그럼 판정이 쉬운 활하고 검부터 하지.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여기로 불렀어. 누가 먼저 할 거야 ?”
세틴은 그들이 자신 있어 하는 것부터 새로운 인식을 심어줄 생각이었다. 남자는 역시 몸으로 부대껴 봐야 서로를 아는 법이었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마침 활터니까요.”
토마스가 간만에 실력 발휘할 생각에 신이 나서 나섰다. 실제로 아카데미 시절, 토마스는 세틴에게 궁술 점수에서 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브라스트 공국의 활은 단궁이지만 사거리가 길고 살상력도 뛰어난 편이었다. 철을 비롯한 금속류가 귀하고 석유나 석탄같은 화석연료가 나지 않는 이 세계에서는 동물이나 몬스터의 뼈나 힘줄, 가죽 등을 이용하는 기술이 많이 발달했다. 지구에서 복합궁으로 알려진 활과 유사한 형태가 주로 쓰였는데. 몬스트의 뼈와 뿔, 힘줄을 가공해서 만들었다.
사대의 과녁은 무려 200 보의 거리를 두고 있었고, 세 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었다. 궁술 시합은 열 발을 쏴서 누가 더 좋은 점수를 얻는지로 승패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토마스, 긴장해야 할 거야. 아카데미에서 우리가 솜씨를 겨룰 때는 내가 겨우 12 살이었다고. 그 때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자랐어.”
“하하하”
세틴이 말로 기선을 제압하려 한다고 생각한 토마스는 ‘그래 봐야 공자는 아직 꼬맹이입니다’는 말을 웃음으로 삼켜버렸다.
“활을 두 개 준비했는데 공정하게 해야 하니 먼저 골라.”
“공자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활터에 오면서 활을 준비하지 않을 제가 아니지요. 저는 제 활을 쓰겠습니다. 공자님만 고르시면 됩니다.”
“어, 그래 ? 역시 준비성 하나는 철저하군. 하긴 활 하면 토마스지.”
시합은 한 사대에서 번걸아 쏘는 방식으로 하기로 했다. 아랫 사람이 먼저 쏜다는 규칙에 따라 토마스가 먼저 활을 당겼다. 첫 발은 보기 좋게 중앙을 맞춰 3 점을 얻었다. 점수는 중앙부터 차례로 3, 2, 1 점이고 과녁을 맞춰도 원을 벗어나면 점수가 없었다. 보통 열 발을 쏴서 15 점을 넘기면 명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아카데미에서 처음 활을 배울 때, 대부분은 과녁을 맞추는 데만 2, 3 년이 걸렸고, 오러를 각성하기 전에는 과녁에 한참 못미치는 지점에 화살을 떨구곤 했다. 그래서 일반 병사는 100 보 거리에서 활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오, 출발이 좋은데 ?”
세틴이 사대에 서서 활을 당기기 시작하자, 토마스는 자기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세틴에게서 풍겨나오는 기세가 평소하고는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활을 쏘면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오러가 토마스가 알고 있던 세틴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사대에 서서인지 세틴의 첫 발은 1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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