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틴의 유민 구호
죽을 나눠주기 시작하자 주변은 온갖 소리들로 시끄러워졌다. 새치기를 하느니 마느니 다투는 소리, 왜 나만 죽을 조금 주느냐 따지는 소리, 유민들을 윽박지르는 관리들의 호통 소리, 아이들 우는 소리들로 조용하던 강변이 시장바닥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판을 뒤집을 만큼 심하게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행여 오랜만에 접하는 곡기를 들이키느라 정신없는 유민들을 방해라도 할 새라 멀리서 지켜보던 사절단이 움막촌 전체를 둘러보기 시작하자, 한 사내가 안내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곳의 대표격인 자로 보였다.
“죽지 못해 사는 것들이라 사는 것이 거지 만도 못하니 볼 것도 없습니다요. 움막이라고 해봐야 구덩이를 파고 나무 막대기 몇 개 걸치고 갈대를 엮어 덮개를 씌운 거라 밤에 이슬이나 피하지 비라도 오면 다들 쫄딱 젖을 수밖에 없습죠. 그래도 다들 비가 오기만을 학수고대 하고 있습니다요. 비라도 와야 집으로 돌아갈 희망이 생기니까요.”
세틴이 물었다.
“평소에 먹는 것은 어찌 하고, 먹는 물은 어찌 하오 ?”
“곡식이 떨어진 지는 오래라 강에서 물고기 한 두 마리라도 건지면 먹어서 탈이 안 나는 온갖 풀떼기를 잔뜩 넣고, 있는 곡식 없는 곡식 긁어 모아서 끓여 먹지요. 잠깐 허기라도 달랠 뿐이지만 그나마 없어서 못 먹습니다요. 물은 그냥 강물을 먹지요.”
“강물을 그냥 마시면 배탈은 안나오 ?”
“먹은 것도 없이 배앓이를 하는 자들이 많기는 하나, 먹을 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든 고향 마을보다는 백 배 나으니 어쩔 수 없습죠.”
죽을 나눠주는 구호소를 몇 군데 더 돌아보고 해거름녘이 되어서야 귀로에 올랐다. 오스틴 백작의 마차가 유일한 마차인지라 올란드 후작과 오스틴 백작, 세틴이 동승했다.
마차 안은 유민들의 처참한 현실을 보고 난 비감인지, 피로감 때문인지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세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민들의 비참한 상황을 목도하고 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제 입에 든 것이라도 꺼내서 나눠주고 싶다는 것도 마음 뿐입니다. 제가 한 가지 건의코자 하는 게 있습니다. 백성들의 영양 상태가 엉망인 상황에서 강물을 그대로 마시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배앓이를 하는 자들도 많다 하고, 아직까지 역병이 발생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가능하면 구호소 근처에 우물을 하나씩 파서 먹는 물이라도 우물물을 마시게 하면 어떨까 합니다. 유민들은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라 우물 하나 파는 것도 스스로 하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오스틴 백작이 말했다.
“나도 강물을 그냥 마시면 좋지 않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소. 공자께서 그렇게 보셨다니 당연히 따라야지요. 그런데 강물이 그렇게 위험하오 ?”
“강물이나 바닷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작은 생물들의 각축장이라고 쓴 글을 봤습니다. 오랜 옛날부터 강물이나 냇물을 마시지 않고 우물을 파서 식수로 삼은 선조들의 지혜를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분명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입니다. 우물도 파주고 먹는 물은 반드시 우물물을 사용하도록 재삼재사 알려주어야 합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후작이 말했다.
“오늘로 우리 사절단이 할 일은 모두 한 것 같소. 백작께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오스틴에 대한 지원은 2 할 증액하여 12 만 부르를 제공하겠소. 백작께서 진심을 다해 백성을 구제함은 물론이고 대공의 방침에 적극 협력해 주신 보상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오스틴 백작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대공 전하와 후작 각하, 그리고 13 공자께도 오스틴의 백성들을 대신해서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단, 우려되는 바가 없지는 않소. 벼룩의 간이라도 빼먹을 작자들이 오스틴에도 없지 않다는 점입니다. 백작께는 미처 알리지 않았으나 구호 물자를 빼돌리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며칠 전 예정보다 일찍 물자를 백작께 인도한 이유지요. 백작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서스텐도 없는 마당에 그런 작자들이 무슨 수작을 벌일지 걱정됩니다.”
백작도 수심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덕이 부족하여 가신들이 모두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염치 없는 부탁이지만 서스텐을 빠르게 복귀시킬 묘안이 없을까요 ? 부끄럽지만 서스텐 없이 몰지각한 자들의 분탕질을 단속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것입니다. 사절단이 가고 나면 경질 사유인 ‘사절단과 대공께 저지른 무례’는 백작과 6 백작령을 위한 용감한 행동이 됩니다. 대공께서 문제 삼지 않는데 감히 누가 시비를 논할까요 ? 그게 바로 ‘과보다 공이 크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백작께서는 주저할 것 없이 서스텐을 복귀시켜야 합니다.”
“정녕 그래도 되겠소 ? 대공 전하의 의심을 사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서스텐만큼 통쾌한 사내도 흔치 않아요. 대공께서 나중에라도 추궁하시면 제가 벌을 달게 받지요.”
백작은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안도하고 감격한 표정이었다.
“내 후작과 13 공자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소. 그것은 서스텐도 마찬가지일 거요. 힘도 없고 부족하나마 어떻게든 갚을 것이니 내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기별해주시오. 사울 대공 당시 우리 오스틴 선조께서는 큰 전공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백작의 작위을 주고 6 백작령의 하나가 된 이유를 사울 대공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다 합니다. ‘오스틴은 내가 가장 믿고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있어서 내가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었지’ 그 말씀으로 저의 마음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선조의 일화를 들먹인다는 것은 ‘조상님을 욕되지 않게’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니 오스틴 백작의 감동이 작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유민들의 구호 현장을 돌아보는 일은 누구나 상당히 지치게 하는 일이었다. 야영지로 복귀하자마자 다들 일찍 쉬고 싶어하는데, 시오미가 세틴에게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세틴은 다들 먼저 쉬라 하고 시오미에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밖으로 불러냈다.
“피곤할 텐데 일찍 가서 쉬지. 무슨 일로 ?”
“공자님은 오늘 처음이겠지만, 나는 이미 여러 차례 구호 현장이라는 데를 본 적이 있어요. 오늘 보신 장면들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에요. 실상은 완전히 딴판이죠. 백작과 사절단이 참관한다니 그나마 조심한 것이 그 정도에요. 사절단이 내일 떠나고 나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될 거에요. 아니, 몇몇 ‘뜻있는 자’들이 의도적으로 아수라장을 만들죠. 무슨 대책이라도 있으신가요 ?”
“일단 서스텐을 복귀시키도록 조치는 해놨어. 서스텐마저 없으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될 것이 뻔하지. 하지만 그 이상 개입하기는 힘들어. 그랬다간 무슨 말이 나올지 알잖아 ?”
“그렇다고 알아서 하라고 가버리는 건 무책임하죠. 서스텐도 통제가 안되는 자들이 몇 있어요. 다른 백작들에게 선을 댄 자들인데 물자를 빼돌리려던 바로 그 자들이에요. 그걸 뻔히 알면서도 방치해 두면 분명 나중에 사단이 생길 거라구요. 일을 시작했으면 제대로 끝을 봐야죠.”
“흠, 그거야 말로 새날의 빛이 가장 바라는 상황 아닌가 ? 부패한 관리들의 농단에 분노한 백성들의 궐기, 그들을 도와 승리의 길로 이끄는 새날의 빛. 대충 그런 그림 아니었어 ?”
“문제가 생기게 방치해 두고 생긴 문제를 이용한다는 건 우리의 방식이 아니에요. 솔직히 새날의 빛은 잘 모르겠고, 적어도 티리아나 내 방식은 아니죠. 저에게 오스틴의 상황을 해결할 묘책이 있는데 그걸 알려드리면 공자께서는 저에게 뭘 해주실 거죠 ?”
세틴이 다급하게 물었다.
“시오미가 ? 일단 들어나 보지. 또 무슨 엉뚱한 소리나 늘어놓지는 말고.”
“흥, 공자는 여전히 저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군요. 마음 같아서는 모른 척 하고 싶으나, 어디까지나 대의를 생각해서 말하는 거니 잘 들어두세요. 지금 오스틴에서 세 사람을 빼내면 다른 자들은 쉽사리 준동하지 못할 거에요. 코리스, 판, 개롤, 이 세 명은 각각 다른 백작들의 앞잡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에요. 오늘 구호 현장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설치던 자들이죠. 그 세 명을 우리가 데리고 가는 거죠. 식량 수송이라는 ‘무엇보다 중요한 중책’을 맡겨서요. 물론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고, 백작을 통해서 그렇게 조치하면 되지 않겠어요 ?”
세틴의 엄지척이 절로 나왔다.
“절묘하군. 난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오스틴의 가신들에 대해서 그토록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워. 보태고 뺄 것도 없이 그대의 방책을 바로 실행하도록 하지. 그래, 상으로 원하는 거라도 있나 ?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 주지.”
“그건 웬 해괴한 동작이에요 ? 사람을 희롱하는 것도 아니고......”
원래 이 세계에서 엄지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사오미가 엄지척에 대해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 이건 내 나름대로 최고라는 뜻이야. 희롱하거나 하는 뜻은 전혀 없어. 우리 세틴의 식구들은 이제 가끔 따라 하기도 하는 동작이니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내가 바네사 언니에게 확인해 볼 거에요. 얼렁뚱땅 넘기려는 거면 가만 안 있을 거라구요. 제가 따로 바라는 건 없어요. 공자께서 절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만 않으면 되요.”
“시오미를 무시한 적도, 쉽게 생각한 적도 없어. 왠지 마음이 편해져서 놀리고 싶어질 때가 가끔 있기는 하지. 원래 내가 아랫사람들에게도 그러지 않는 편인데...... 아무튼 각별히 유념하지. 난 무엇보다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해. 쉽지는 않겠지만 시오미가 내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용의가 있어.”
“됐어요. 그 한 마디면 선물로 충분해요.”
늦은 시간이었지만 세틴은 곧바로 후작을 찾았다. 다행히 후작은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공자의 대책도 놀랍고, 정보력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소. 시오미라는 마법사가 생각보다 쓸모가 있구려. 내심 공자 주변에서 무슨 사고라도 생기지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내가 가장 고심하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주니 전화위복이 따로 없소. 그래서 어떻게 조치를 하면 좋겠소 ?”
“제가 믿을 만한 사람을 백작에게 급히 보내겠습니다. 스승님은 그냥 모르는 척 하시면 될 일입니다. 우리가 개입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적당한 사람을 보내서 해결하겠습니다.”
세틴의 말에 후작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과 허락의 뜻을 나타냈다.
이런 일에는 토마스가 제격이었다. 친위대의 정보부서는 잠입과 공작 임무 수행이 기본이었다. 세틴은 토마스에게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최대한 아는 사람이 적도록, 백작에게 직접 말을 전하도록 했다. 토마스는 다소 과하지만 오스틴 백작의 침실에 아무도 몰래 잠입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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